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98
기수는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고 그 앞에 부복했다.
뭔가 궁중 예법은 훨씬 더 복잡하고 뒤에 ‘만세, 만세, 만만세!’도 붙이는 것 같았지만, 기수는 그냥 공주가 툭 치는 횟수만큼 절을 했을 뿐이었다.
황제가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입을 열었다.
“그대가 기수인가?”
“예. 그렇습니다.”
“얘기는 많이 들었네. 이번 일에 큰 공을 세우고 있다지?”
“아! 예… 제가 좀…”
공주가 발끝으로 툭 쳤다. ‘하핫!..’ 하고 자기 자랑으로 이어지는 기수 습관이 나올까봐 미리 막은 것이다.
“제가 원래 황실을 보위하고, 천하 만민의 삶이 평화롭게 이어지는데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려고 늘 애쓰기 때문입니다.”
“훌륭하군! 하하하!…”
이제까지 무겁던 황제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상처가 쓰린지 곧 인상을 썼다.
“부황폐하. 붕대를 새로 갈까요?”
“아니다. 난 괜찮다.”
그리고는 기수에게 물었다.
“한귀비를 죽였다고 들었네만…”
“개봉에서 황호도 참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황제의 얼굴에 기뻐하는 기색이 번졌다.
기수는 슬쩍 고개를 들고 그를 찬찬이 살펴보았다.
어려서부터 떠받들려 자라온 오연한 기세가 나이 들어서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인상이지만, 자상하고 다정한 성품도 어느 정도는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일국의 황제답게 기본적으로 배어 있는 품격과 위엄은 독보적이었다.
황제는 이전보다 훨씬 친근한 어조로 기수에게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애써주게.”
“예! 알겠습니다.”
“짐은 좀 쉬어야 할 것 같네.”
완곡한 축객령에 기수는 인사를 한 뒤 먼저 밖으로 나왔고 공주는 남아서 황제의 상처를 돌봤다.
갑판으로 올라간 기수는 탁지연을 붙잡고 물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탁지연은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궁주가 떠난 후 우리는 금군 내의 역도 색출에 집중하고 있었어. 그러다가 장군부의 백시랑이 중상을 입고 실려 온 것을 알게 되었지. 나는 그게 척회왕의 북경 공격을 알리는 신호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만약에 대비하여 퇴로를 준비했는데 그때 육채주가 포구에서 대기 중이란 걸 알게 됐어.”
“퇴로부터 준비했다고?”
“궁주가 얘기했잖아. 역모의 주동자는 엄청난 고수일 거라고. 게다가 황상의 안전이 걸려 있는 일인데 가능한 모든 경우에 대비해야지.”
탁지연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동창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그들이 습격당했다는 급보가 전해진 거야. 그래서 공주마마와 의논한 후 일단 황상을 모시고 피신하기로 했어.”
“하지만 궁을 비우는 것은…”
그것은 사실 심각한 문제였다. 황제가 쉽게 말을 들어주지도 않았을 것 같았다.
“황상께서는 반대하셨지만 제독동창이 직접 와서 거듭 주청을 드리자 결국 수락하셨어. 그때 척회왕의 무시무시한 무공을 직접 보셨거든.”
기수는 깜짝 놀랐다.
“척회왕이 황궁 내부까지 들어갔었다고?”
“응. 우리는 동창의 무사들이 목숨 걸고 막는 동안 겨우 지하비도를 통해 빠져나올 수 있었어. 하지만 지하 비도를 지나는 동안 등 뒤로 계속해서 석문 부서지는 소리가 따라왔어. 얼마나 무섭던지…”
탁지연은 당시를 회상하는지 몸서리를 쳤다.
다른 사매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럼 적은 동창을 습격한 데서 끝난 게 아니라 황궁까지 들어갔었던 거네. 그런데 어째서 다들 황궁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알고 있는 거지?”
탁지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일단 궁을 빠져나온 우리는 황상께서 건재하신 한 놈들을 언제든지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 황궁은 건물에 불과하니까…”
“그거야 그렇지.”
공주가 치료를 마치고 돌아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우리 생각이 안일했어. 궁을 나온 지 하루가 지났는데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 거야. 부황폐하가 안 계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천하가 발칵 뒤집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당연히 그렇게 되었어야지.”
“나중에 소문을 들어 보니 동창이 습격당하고 황궁은 봉쇄되었다고 하더라고. 실제 전투는 대부분 황궁 안에서 벌어졌는데…”
“척회왕이 사실을 은폐한 건가?”
이부상서를 비롯해 그를 따르는 신하들이 있다는 게 생각났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척회왕과 이부상서 패거리가 역도라는 사실을 이미 만천하가 다 아는데 어느 누가 그들의 말을 믿고 따르겠는가.
탁지연이 말했다.
“내 생각엔 저들이 대역을 준비한 게 분명해.”
“대역이라고?”
탁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 만에 안정을 되찾기는 불가능해. 절대로…”
“대역이라…”
기수는 황궁에 들어가려 했을 때 금군들이 출입과 외부연락을 모두 통제했던 게 생각났다. 탁지연의 가설이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공주가 기수에게 물었다.
“지금 북경 상황은 어때?”
기수는 자기가 경험한 일들을 상세히 얘기해주었다.
다 들은 공주는 분개하여 발을 굴렀다.
“역시 황궁이 놈들 손에 넘어간 거야. 틀림없어.”
선실 안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황제를 안전하게 빼내온 것 까지는 잘 했는데, 적의 준비가 예상보다 훨씬 더 철저했던 것이다.
기수는 자기가 북경에서 지낸 기간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황호의 대도를 들고 동창과 장군부와 금군을 다 만나면서 돌아다녔는데, 황궁은 이미 척회왕의 손아귀에 들어간 상태.
만약 한윤의 산공독에 당한 채 황궁으로 찾아갔을 때 척회왕을 만나기라도 했다면 그야말로 힘 한 번 못 써보고 죽을 뻔 한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11명 잡아놓고 12번째 만나서 개죽음 당할 뻔 했네.’
포구에서 수로맹 선장이 눈물까지 보이며 자기를 만류했던 게 새삼스레 고맙게 느껴졌고, 어느 정도 운도 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수로맹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수송로 차단을 통해 허창과 개봉의 반군 막는 일을 하고 있었다.
육대기의 급보를 듣고 황급히 달려온 모양인데, 진짜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면서 잔뜩 들뜨고 상기된 표정이었다.
기수가 탁지연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수로맹주, 공주, 사매들 모두 탁지연을 바라봤다.
“원래는 여기 잠시 머물면서 칙령을 발표하여 궁을 점령한 무리들을 몰아낼 계획이었는데… 적이 황궁을 안정시켰다면 그런 식은 힘들 것 같아.”
공주가 물었다.
“어째서?”
“만약 저들이 가짜를 앉혀놓고 궁주가 말한 것처럼 일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면 옥새도 가지지 않은 우리 쪽의 말을 누가 믿어주겠어?”
공주는 뭔가 말하고 싶어 입술을 움직였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기수는 탁지연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현대였다면 TV나 인터넷 등 각종 매체를 통해 황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지금 이 시대에 면류관, 곤룡포, 내관, 금군, 옥새 없이 본인을 증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특히나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고 있다면.
탁지연의 말이 이어졌다.
“일단 우리에겐 세력이 필요해.”
그러자 수로맹주가 끼어들었다.
“세력이라면 얼마든지 모을 수 있습니다. 당장 우리 수로맹과 천마교, 무림맹만 해도 적은 숫자는 아니니까요.”
“물론 무림 세력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하지만 황상의 권력을 되찾는 데는 조정 관료들의 지지가 반드시 있어야만 해요.”
공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던 부황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신하들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던 것이다.
“남경으로 가야겠네. 거기엔 오랜 세월 황실에 충성을 바친 세가들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남경은 한 때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북경 다음으로 권문세가가 많았다.
다행히 양주와 남경은 아주 가까웠다.
항해하는 동안 기수는 무림맹, 천마교, 장군부, 좌군도독부 등에 서찰을 썼다.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알리고 협조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황제가 궁에서 도망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척회왕이 이 정도까지 준비를 해놓았다면, 부끄럽다고 숨겨서는 일이 해결될 리 없었다.
자기가 직접 황제가 되지 않더라도 일단 꼭두각시를 내세워 국정을 제 마음대로 처리하고 조정 대신들을 자기편으로 채워 넣으면 1년도 안 되어 결국 옥좌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쪽 편에선 척회왕의 그런 흉계를 최대한 널리 알려야 했다.
항해하는 동안 수로맹주는 영리하고 예법에도 밝은 부하 두 명을 골라 뽑아 황제의 시중을 들도록 했다.
평생 내관들에 둘러싸여 살던 황제가 공주에게 의지하도록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번 기회에 황제 곁에 바짝 붙어서 점수를 따고 싶은 게 그의 속마음이었지만, 눈동자는 붉고 입술은 보라색인 기괴한 외모 때문에 황제가 꺼려하는 티를 내자 방법을 바꾼 것이다.
배가 남경 포구에 닿자 공주는 황제의 행차 준비를 했다.
그러나 탁지연이 그녀를 만류했다.
“아무래도 황상은 배에 계시고 만날 사람을 이리로 불러오는 편이 좋겠어. 지금 척회왕이 가장 바라는 일은 황상을 시해하는 것이니까, 언제 어느 때건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닻을 올리고 바로 떠날 수 있도록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
공주는 그녀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황궁 지하비도에서 쫓기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렸다.
동창의 환관들이 목숨 바쳐 막지 않았다면 부황은 살아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공주는 선실로 들어가 부황에게 그런 생각을 얘기했다.
황제는 의외로 쉽게 받아들였다.
“그리 하는 것이 좋겠구나.”
황제의 행렬엔 갖춰야 할 의례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것들 중 하나도 가진 것 없이, 부끄러운 모습으로 공연히 노출의 위험성만 자처할 필요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황제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에 적힌 사람들을 불러오너라.”
거기엔 고위관직을 지냈던 사람 중 현재 남경에 거주하고, 황제가 신뢰하는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공주가 명단을 들여다보는 동안 황제가 다시 말했다.
“모두가 어려우면 그 중 원의달 한 명만 와도 된다.”
“원의달이라면… 혹시 대학사 원인달의 형인가요?”
“그렇다. 네가 어렸을 때는 그가 대학사였지. 지금은 나이가 들어 물러났지만 짐과는 오랜 시간 함께 국정을 돌봤고 남경뿐만 아니라 조정에 영향력이 큰 사람이다.”
공주는 기뻤다.
그런 정도의 기반을 가진 원로대신이 부황폐하 곁에 있어 준다면 조정대신들이 척회왕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온 공주는 모두를 모으고 명단을 보여주었다.
기수는 대학사가 뭐 하는 건지 궁금했다.
그의 물음엔 조정의 조직에 빠삭한 춘매가 대답을 해주었다.
다 들은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대통령 비서실장과 국무총리를 짬뽕한 거구나.’
이름만 학사일 뿐, 학자가 아닌 정치인이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확실히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공주가 말했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어. 그러니까 우르르 몰려갈 게 아니라 나와 궁주 두 사람만 가서 데리고 올게.”
모두들 그러라고 해서 두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남경으로 들어갔다.
기수는 공주와 단둘만 있게 되자 은근히 다른 생각이 났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워낙 심각해서 감히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30분 만에 도착한 원의달의 집은 으리으리했다.
기수는 청지기에게 용건을 말했다.
“원대인을 뵈러 왔습니다.”
“어디에서 오신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북경에서 왔습니다. 대학사님의 긴급한 전언을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청지기는 그걸 알 리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기수와 공주는 어렵지 않게 원의달을 만날 수 있었다.
원의달은 수염이 새하얀 노인이었지만 눈빛은 아직 또렷했다.
“내게 전할 말이 있다는 게 그대들인가?”
“예. 그렇습니다.”
“무슨 일인가? 말해보게.”
공주가 나섰다.
“일단 주변을 물리쳐주십시오.”
원의달은 잠시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세 사람만 남게 되자 공주는 황제의 밀지를 얘기했다.
원의달의 표정은 점점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 그게 전부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저희와 함께 가주십시오.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아, 알았네. 당장 가세.”
원의달은 그렇게 포구로 가서 황제를 만났다.
“폐하! 어찌 이런 변을 당하셨습니까?”
원의달은 절을 마치자마자 울음을 터뜨렸고, 황제는 친히 그를 일으켜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곧바로 대책을 의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