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504
기수는 심호흡을 한 뒤 지난번 장무검과 만났던 정황을 되짚어 보았다.
분명히 자기보다 고수였다는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한귀비가 나타나자 그녀에게 싸움을 떠넘겼고, 자기는 돕지 않고 방치함으로써 결국 한귀비를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과 더 이상 싸우지 않고 떠나는 이유가 척회왕을 괴롭히기 위해서라는 식으로 얘기했었다.
사조의 약속은 지키겠지만 척회왕의 뜻대로 되는 꼴은 보기 싫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첩첩산중으로 찾아와 대규모 인력 지원요청까지 한 것을 보면 비궁의 실체에 상당히 접근했다는 뜻이고, 또 그것이 바로 척회왕과 한 약속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척회왕은 왜 비종을 찾으려는 거지? 원한 관계인가?’
세상에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지내는 비종이 언제 그와 악연을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장무검을 보낸 후 다섯 명의 무관은 모두를 기상시켰고, 손재주 있는 자들을 골라 대나무로 호각을 만들도록 한 후 조장들을 불러 담당구역을 지정해주었다.
회의에서 돌아온 방렬이 13조 조원들을 모두 모은 후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다섯 명씩 네 개 조로 나뉘어 태무신궁이라는 문파의 흔적을 찾는다. 수상한 사람을 잡으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면 인공의 흔적이라도 찾아라. 가장 먼저 찾는 조에 은 30냥을 상으로 준다니까. 우리가 그걸 받도록 하자!”
돈 얘기가 나오자 다들 눈이 반짝였다.
기수는 네 무리 중 한 무리의 리더를 맡았다.
우연이건 실수건, 조장을 쓰러트린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기수와 네 명의 조원은 저마다 신호용 호각을 하나씩 받고, 건량과 물도 싸서 짊어진 뒤 배정된 봉우리로 떠났다.
한중의 험난한 산들은 그 범위가 어마어마했다.
산 하나를 뒤지는 데도 열흘은 족히 걸릴 것이었다.
그러나 동원된 인원이 무려 1,500여명. 5명씩 300개 조.
산이라고 해도 사람이 살 수 있는 지형은 정해져 있으니 이 정도 대규모 인원으로 뒤지면 어디선가 흔적이 나타나긴 할 것이었다.
태무신궁의 인원 규모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먹고 살려면 농사를 짓거나 외부에서 식량을 사와야 하는데, 그런 흔적들을 모두 감출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럴 목적으로 실력이나 출신성분 상관없이 머릿수를 채웠던 거군.“
자신이 태무신궁 사람이라고 생각해보니 확실히 걱정이 되었다. 개미떼처럼 바글거리면서 산맥을 하나씩 뒤져 나간다면 언젠가는 발각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기문진도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그쪽으로 들어간 자들을 가둘 수는 있겠지만, 복귀하지 않으면 전 날 배정한 지역이 집중 수색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걱정하며 수색을 시작한 첫 날.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둘째 날에는 멀리서 호각소리가 들려와 기수를 긴장시켰다.
‘벌써 찾았단 말인가? 설마…’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중들이 버리고 간 낡은 암자를 발견한 것이었다. 사람의 흔적이긴 하지만 태무신궁은 아니었기 때문에 발견자들은 상금을 받지 못했다.
그렇게 밤엔 모여 새 지점을 배정받고 해가 뜨면 산을 헤매는 일과가 반복되었다.
숲을 헤맬 때는 어느 세월에 다 할까 싶었지만, 막상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면 진도가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엿새째 되는 날.
호각 신호가 집중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수는 자기가 먼저 찾아내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
“어이! 양십오. 어딜 가려고?”
“발견한 것 같은데 여기서 얼쩡거려봤자 소용없잖아.”
하고는 곧장 소리 나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네 명의 조원들도 기수를 따랐지만 숲을 벗어나자마자 그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기수는 달려가면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을 들었다.
벌써 싸움이 시작되는 게 분명했다.
경공에 좀 더 힘을 실어 도착해 보니 과연 싸움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비단 무복을 입은 한 무리의 신비인들과 수색대의 대결.
사실, 그것은 대결이라 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수색대는 급조한 패거리라 진형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 자빠지기에 바빴다.
기수는 비단무복 입은 자들에 집중했다.
남녀가 섞여서 30여 명.
“아아!…”
자기도 모르게 탄성이 나온 것은 그들의 보법이 너무나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다 선풍비를 쓰고 있었다.
비록 형태가 조금 다르고 성취도도 자신에 비해 떨어졌지만 같은 무공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태무신궁이구나!’
기수는 조민, 조현 자매를 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한 쪽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을 죽여라! 머리 하나 당 은 열냥씩을 주겠다!”
다섯 명의 무관들이 수색대를 독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공에 현격한 격차가 있기 때문에 다들 눈치만 볼 뿐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태무신궁 제자들은 개개인의 능력이 청탑산 출신과 비슷했다.
일 대 일로는 약간 처진다 해도 두 명으로는 다섯 무관 중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보니 무관들은 결국 은혈대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겨우 균형이 맞는 것 같았지만 수적으로 태무신궁이 훨씬 유리했다.
그때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장무검이 나타났다.
놀라운 경공이었다.
태무신궁 제자들은 싸우던 상대를 내버려두고 일제히 검진을 펼쳤다.
상대가 고수라는 사실을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뒤쪽에서 두 명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민아! 현아!’
그녀들은 비단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바디라인만 봐도 딱!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것인가!
기수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그녀들을 안고 싶었지만 제자들 앞이라 참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너희들은 누구기에 우리 경계를 침입한 것이냐?”
기수는 조현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시일이 꽤 지나서인지 앳된 기운은 사라지고 약간의 성숙미가 느껴졌다.
장무검이 검을 뽑아들고 말했다.
“난 검종의 장무검이라고 한다. 너희들이 태무신궁이냐?”
“그렇다.”
“네 옆에 있는 계집이 궁주냐?”
그러자 조민이 나섰다.
“흥! 말투며 행동이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마.”
기수는 그녀가 궁주답게 단호한 모습을 보이자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자기도 그렇지만, 자매도 예전에 함께 지내던 때와는 많이 달라진 것이다.
장무검이 장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부탁받고 하는 거라, 너희들을 찾아내는 데서 내 일은 끝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종의 무공을 견식하게 해준다면 마다할 이유도 없지. 흐흐흐….”
조민, 조현 자매는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서지 말라고 수신호를 한 뒤 둘이 함께 나섰다.
장무검의 기세가 만만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장무검은 진기를 끌어 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그래, 그래. 한꺼번에 덤비는 것도 괜찮지. 흐흐흐…”
“닥쳐라!”
순간, 두 여인의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쨍! 쨍!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장무검의 검에서 불꽃이 튀었고, 그는 서너 걸음 뒤로 밀려났다.
기수는 언제든지 싸움에 끼어들어 두 여인을 도우려고 준비 중이었다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민아, 현아의 무공이 저 정도였단 말인가?’
아무리 둘이라고 해도, 자기도 이기지 못해 쩔쩔매는 장무검을 몰아붙이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물러선 장무검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흥! 특이한 무기를 쓰는구나. 좋다! 기어이 네년들을 쓰러트려주마.”
기수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 생각하며 조금 더 앞으로 나갔다.
언제든 싸움에 뛰어들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일단은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무슨 무기를 썼다는 거지?’
대결의 당사자가 아니라 가려진 각도라서 볼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세 사람의 대결은 곧바로 다시 이어졌다.
조민과 조현은 함께 나선 이유가 있었다.
그녀들은 환상의 복식조였다.
손발이 척척 맞아서 마치 한 사람에 팔이 4개, 다리가 4개 달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들의 무기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뾰족한 마름모꼴의 금속 조각이었다.
크기는 신용카드를 세로로 접은 정도.
그 끝에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줄이 이어져 있어서 필요에 따라 다시 회수할 수 있는 암기처럼, 어떤 때는 채찍처럼 사용했다.
처음에 기선을 제압할 때 바로 그것을 사용했던 것 같은데, 상당히 위험해 보이면서도 마치 세 번째 손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여서 장무검조차도 쉽게 대응책을 찾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저런 무기도 있었나?’
자기는 폐관수련 기간 중 일부만 함께 있었기 때문에 태무신궁의 무공과 무기에 대한 지식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궁주가 된 이후에 얻은 무기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2:1의 대결은 점점 치열해져 갔고, 장무검은 끈기 있게 버티면서 놀랍게도 조금씩 자기 쪽으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인간성은 어떨지 몰라도 검술 하나만큼은 정말 대단했다.
민아와 현아는 완강하게 버텼지만 기수가 보기에 상황은 기울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큰 차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고수의 눈엔 아는 만큼 수가 보이는 법.
바둑을 둘 때 다섯 집 쯤 손해 본 것을 중반 전투나 끝내기에서 만회하는 것은 아마추어 얘기고, 프로끼리는 그 차이가 끝까지 이어져서 결국 다섯 집 차이로 지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장무검과 민아, 현아의 레벨은 프로 9단, 그중에서도 상위 랭커 수준이라고 보면 장무검이 갑자기 실수해서 불리하게 될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 같았다.
민아와 현아가 능력의 극한까지 짜내고 있음을 확인한 기수는 더 이상 구경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성추를 꺼내서 빙글빙글 돌리며 세 사람 쪽으로 다가갔다.
수색대원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 세 사람의 싸우는 기세가 워낙 대단해서 근처에 다가가기도 두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기수는 싸움에 열중하는 장무검의 뒤통수를 향해 유성추를 던지려고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런 비겁한 수를 쓸 수는 없지.’
그는 내공을 끌어올리고 비폭대라수의 기수식을 시전했다.
순간, 숲 전체가 암흑에 뒤덮이는 느낌과 함께 수색대원들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러댔다. 질식할 것 같은 살기에 놀란 것이다.
세 사람의 대결도 한 순간에 중지되었다.
장무검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조민, 조현 자매는 장무검보다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수가 수색대 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장무검이 기수에게 물었다.
“넌 누구냐?”
“하핫! 뭐 통성명까지 할 필요가 있나?”
기수는 웃었지만 세 사람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그들뿐만 아니라 다섯 무관과 수색대, 태무신궁의 제자들까지 전부 다 겁먹거나 긴장한 표정이었다.
‘내가 좀 심했나?’
혈천제 앞에선 안 쓰기로 마음먹은 터라 없을 떄 제대로 해보자고 내공을 한껏 끌어올렸는데 살기가 너무 강력하게 폭사된 것 같았다.
수백 명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보니까 원래 싸우던 3명에게 미안해졌다.
“싸움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어떨까?”
장무검이 이를 갈며 말했다.
“무슨 헛소리냐?”
조민과 조현은 장무검과 수색대원이 같은 편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자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기수가 장무검에게 말했다.
“검종은 비종과 싸울 이유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왜 괜히 남 좋은 일 시켜주려고 그러지? 서로 실력은 대충 확인했을 테니까 이쯤에서 그만 둬.”
“흥! 우리 검종이 천하제일이란 것을 증명하려면 비종도 언젠가는 무찔러야 할 대상이다. 단지 차례가 먼저 왔을 뿐.”
기수는 코웃음을 쳤다.
“흥! 누가 검종이 천하제일이래?”
“내가 그걸 증명할 것이다.”
“웃기고 있네. 척회왕한테는 꼼짝도 못하면서.”
상대를 자극해서 실력을 간접비교 해보려는 의도였다.
장무검의 얼굴은 불그락푸르락 했다.
그러나 기수의 기대와 달리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반박하지 않는 걸로 봐서 무공고하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장무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흐흐흐…. 내 기필코 네놈을 죽여주마.”
그리고는 곧바로 기수를 향해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이제 조민, 조현 자매는 안중에도 없다는 투였다.
기수는 장무검을 향해 유성추를 던지는 동시에 반월도를 뽑아들었다.
그의 실력을 알기에 어설픈 무기로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장무검은 유성추를 간단히 쳐내고 기수를 찔러 들어왔다.
챙! 소리와 함께 장검과 반월도가 얽혔다.
기수는 손바닥과 손목이 한꺼번에 욱씬! 거리는 압박감을 느끼면서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호승심이 솟구치는 것을 감지했다.
‘이기고 싶다!’
지난번 대결과 지금 사이에 나름 열심히 연공을 했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간격이 좁혀졌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순식간에 10여 초식을 교환하면서 이기고 싶다는 생각은 더욱 강렬해졌다.
장무검이 입술을 이죽거리며 말했다.
“죽기 전에 이름이나 말해봐라.”
“죽는 쪽은 내가 아닐 거 같은데?”
“흥! 멍청한 놈.”
장무검의 공세가 한층 치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