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519
선단이 덕주를 지날 때까지 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덕주에서 창주까지는 수심이 얕아 큰 배로는 갈 수 없고, 강폭이 좁아 육상에서의 습격도 가능하기에 특별히 신경을 썼지만 역시 적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창주에 도착한 황제.
후군도독 곽승과 좌군도독 장현이 군대를 거느리고 찾아와 황제 앞에 부복하고 그동안 고생하도록 한 불충을 사죄했다.
황제는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모두 과인이 부덕한 탓인데 누굴 탓하겠는가. 일어나라.”
두 도독은 그동안의 경과와 자신들이 보유한 병력 현황, 그리고 그동안 파악한 적의 동향 등을 보고했다.
그 자리엔 북경 안의 정세를 정확하게 염탐한 개방 방주이나 무림맹주인 주일비가 자리를 하여 황제를 뵙는 영광을 누렸다.
“북경 내부의 분위기가 지금 심상치 않습니다. 관리들과 백성들 모두 황상의 복귀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척회왕은 금군까지 동원하여 백성들 사이에 떠도는 유언비어를 차단하려 애쓰고 있지만 그게 잘 안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주에 큰 문제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병력을 움직이지 못한 것입니다.”
황제는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호오!~ 어떤 소문을 누가 퍼뜨렸는가?”
“소문이라기보다는… 제가 수하들을 시켜 진실을 얘기하도록 했을 뿐입니다.”
“아! 그대가…”
“백성들은 긴가민가했지만 허창과 창주에서 연달아 승전 소식이 전해지자 완전히 마음이 돌아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하하하!…. 민심은 천심이라, 가짜를 용인하지 못하는 것이지.”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린 황제는 주일비가 황족이라는 내관의 말을 듣고는 곧 족보를 가져오게 해서 촌수와 항렬을 따져보도록 했다.
“그대는 내 재종형제 뻘이 되는군.”
“부끄럽사옵니다.”
“부끄럽다니. 어서 일어나게. 국가가 위난을 맞이했을 때 일가를 만났으니 이 얼마나 기쁘고 마음 든든한 일인가. 하하하!…”
재종형제라고 해도 황제와 주일비 사이의 촌수는 너무 멀었다.
그래도 남보다는 일가붙이라는 사실이 황제를 기분 좋게 한 것이다.
주변의 문무관원들 눈이 빛났다.
잘 보여야 할 목표가 또 하나 나타난 것이다.
황제가 창주에 자리 잡은 후 장군부가 합류했고, 각 성의 포정사, 도지휘사 들이 앞다투어 충성을 맹세하는 서찰을 보내왔다.
그 과정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수는 확실히 황제의 복귀가 전략적으로 옳은 선택이었음을 확인했다.
탁지연이 옆으로 바짝 다가와서 물었다.
“뭘 그렇게 흐뭇한 표정으로 봐요?”
“응. 저 전령들. 이젠 여론이 완전히 돌아선 것 같아서…”
“북경의 고관들까지 심부름꾼을 보낸다고 하더라고요.”
“하핫!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척회왕과 가짜 황제가 그냥 이 나라를 집어삼키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언제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전세가 뒤바뀐 거지?”
탁지연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궁주님 덕분이죠.”
“내가 뭘 했다고?”
탁지연은 좌우를 살핀 후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관리들이나, 백성들이나, 누가 황제가 되건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뭐…. 솔직한 심정은 그럴 수도 있겠지.”
“센 쪽에 붙어서 자기들 생업에 지장만 주지 않으면 되는 거죠.”
“그래서 척회왕이 역적인 줄 알면서도 그냥 넘어갔다?”
“딱히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남경에서 옛 권신들이 뭉치면서 조금씩 사람들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죠. 그러다가 창주가 떨어지고, 허창에서 삼군도독부가 패하면서 사람들이 알게 된 거죠. 어느 쪽이 더 센지.”
기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지금 서찰을 보내 충성을 맹세하는 관리들은 다들 척회왕 편에도 머리를 조아린 경력이 있다고 봐야 했다.
진짜 황제가 창주까지 올라오니까 잽싸게 자기 앞날을 위해 한 번 더 변절한 것이다.
‘기회주의자 새끼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하면 관리라는 게 원래 다 그렇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탁지연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수는 어깨로 그녀를 슬쩍 밀며 물었다.
“웬 한숨이야?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궁주님. 척회왕을 쓰러트리고 난 뒤엔 어떻게 하실 거예요?”
기수는 그녀가 자기한테 혼자 다가왔을 때 둘이서만 한 번 하자는 건 줄로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소항산 산채, 아니. 소항산 우리 문파로 돌아가서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면 되는 거지. 아! 그 전에 아투사의 고향까지 여행이나 한 번 다녀오고 말야…”
“거긴 누구를 데려가실 거예요?”
“그야 뭐… 우리 기린궁 식구들하고…또…. 에 또, 그러니까…”
왠지 모르게 척회왕을 처치한 이후가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림맹엔 몇 명이나 있어요?”
“일단 여섯…. 정도?”
“또 다른 곳엔요?”
“다른 덴 없어. 내가 무슨 바람둥이인 줄 알아?”
탁지연은 눈을 흘긴 후 다시 물었다.
“예매를 버리실 거예요?”
“공주를? 내가 왜? 그럴 생각 없는데…”
“그럼 그녀와 혼인하실 거예요?”
“혼인이라…”
공주는 황제가 혼처를 정해주는 신분이니까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야….”
“부마는 축첩할 수 없다는 거 아시죠?”
“그, 그런가?”
“공주마마와 혼인하면 그 순간 나머지 우리들은 전부 궁주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하핫!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냥 처니, 첩이니 따지지 않고 함께 지낼 수도 있는 거 아냐.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침대 위에선 너무 친해서 탈인 사매들이었다.
“우리는 그렇다 쳐도 무림맹 여인들은요?”
“그녀들이야…”
“쫓아내실 건가요?”
“그, 글쎄…”
그렇게 한다면 굉장히 미안한 일이 될 것이었다.
탁지연이 연이어 물었다.
“비종과 마종의 수장들이 자기 문도들을 버리고 소항산으로 와서 지내려고 할까요? 소항산으로 태무신궁과 천마교가 다 들어와 살 수는 없잖아요.”
“아!….”
기수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지금은 공동의 적을 맞아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있지만, 무림에 평화가 찾아온 이후엔 각자 저마다의 본거지로 돌아가는 게 맞을 것이었다.
각기 출신이 다른 여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으면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컸다.
비종과 마종은 공공칠빵 덕분에 하나로 뭉칠 수 있었지만, 그런 상황이 무림맹과 천마교 사이에도 적용될지는 미지수였다.
‘나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무림맹 여인들을 버릴 수도 없고…
‘그냥 현대로 돌아가 버릴까?’
불현듯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그것은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니었다.
“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참 믿음직스러운 말씀이네요.”
“어떻게 하면 좋겠어? 네 생각을 얘기해 봐.”
탁지연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거야 궁주님이 생각하셔야죠.”
“으으…. 그래. 생각해볼게. 일단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고 나서.”
탁지연이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척회왕은 지금쯤 진퇴양난일 거예요.”
“그래. 그러니까 황제 암살을 시도했겠지.”
장무검에게 자신의 독문절기를 가르쳐주겠다고 약속까지 한 걸 보면 몹시 절박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황제가 죽기만 하면 지금이라도 관리와 백성들은 또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설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기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그의 입장이라면 마지막 남은 한 수는 역시 황제 암살밖에 없어. 그것이야말로 이 모든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절대적인 한 방이니까.’
기수는 자기가 전령들 구경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여인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이도록 했다.
문을 닫고 보니 방 안엔 여인들의 향수 냄새가 가득했다.
기수는 한 차례 좌우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기린궁 8명, 무림맹 6명, 비종 2명, 천마교 3명 합이 19명이었는데 무슨 미스코리아 드레스 심사를 하는 것 같았다.
‘햐아! 어쩌면 이렇게들 예쁘냐?’
자기가 이 여인들과 모두 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자랑스러웠다.
일단 그 생각은 속으로만 하고, 그는 강기막을 펼쳐 방 외부와의 소리를 차단하고 허기침을 한 번 한 뒤 입을 열었다.
“너희들을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은 것은…”
19명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까 살짝 떨렸다.
“일단, 다들 좌우를 둘러보고 인사부터 나누지.”
분위기를 좀 풀어보려고 한 제안이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특히 무림맹 여인들은 자기네끼리 바짝 붙어 서서 다른 여인들을 몹시 경계하는 눈치였다. 기수는 그녀들의 그런 표정이 귀엽다고 느꼈다.
특히 능소화와 백서린은 볼수록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녀들을 내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기수는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말했다.
“너희들을 부른 것은 우리의 현재 상황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서야. 척회왕이 가짜 황제를 황궁에 집어넣고 천하를 집어삼키려고 하다가 지금은 처지가 꽤 곤란하게 된 상태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겠지?”
여기저기서 여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수는 이어서 말했다.
“너희들이 짐작하겠지만, 그에게 남은 마지막 한 수는 황상을 시해하는 거야.”
여인들이 술렁거렸다.
공주가 발끈해서 말했다.
“감히 부황을 시해하겠다고? 절대로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을 거야!”
기수가 손짓으로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래. 그건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일 거야. 하지만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치밀하게 대비해야 돼. 어떠한 변수도 용납해선 안 되니까 말이지.”
“변수라니?”
“우선, 우리는 그의 무공 수위가 정확하게 어느 정도나 되는지 몰라. 그게 가장 큰 변수야.”
“너. 지난번에 배에서 검종의 전인을 이겼잖아.”
“장무검 역시 척회왕에게 꼼짝 못하고 당했기 때문에 그의 부하처럼 시키는 일을 했던 거고, 척회왕이 무공을 전수해준다니까 황제 암살이라는 어마어마한 일에 선뜻 나섰던 거야. 척회왕의 무공에 목숨을 걸 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뜻이지.”
“장무검과 차이가 많다고 생각해?”
기수는 삼태공에 대한 얘기를 아는 대로 모두 해주었다.
19명의 여인들 중엔 처음 듣는 사람도 많아서 모두들 놀라워했다.
공주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춘신공과 진영군의 진전을 한 사람이 대성했다는 증거는 없잖아?”
“항상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지. 두 번째 기회는 없으니까.”
“그건 그런데…”
“알아본 결과, 일양심법, 은혈대법, 단정홍, 파천강기, 뇌전격 같은 수법들이 전부 다 척회왕이 변형시키거나 창안했다고 추정돼.”
“말도 안 돼. 그걸 어떻게…”
“그러니까 척회왕은 두 고인의 공동 전인이 될 만큼 자질이 뛰어난데다가, 어떤 경로로 미증유의 내공을 얻었고, 무학에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봐야지.”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잘 찾아보면 멀지 않은 곳에 그런 사람이 한 명 더 있어.”
자신과 척회왕은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즉, 척회왕이 최소한 자기 정도의 자질은 가졌다고 봐야 했다.
‘내가 만약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오랜 세월 준비를 했다면…’
결코 척회왕을 얕잡아볼 수 없는 이유였다.
공주가 조심스럽게 기수에게 물었다.
“그럼… 척회왕과 대결한다면….”
“솔직히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를 이긴다는 확신은 없어.”
“아!…”
공주뿐만 아니라 여인들 모두 탄식을 토했다.
황제의 안위도 중요하지만 그녀들에겐 그보다 기수가 더 걱정이었다.
공주가 있는 앞이라 말은 못해도, 다들 기수가 척회왕과 싸우는 걸 말리고 싶었다.
기수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난 척회왕을 반드시 내 손으로 쓰러트리고 말 거야.”
“아아!…”
공주와 여인들이 각기 다른 의미로 다시 탄식을 토했다.
기수는 19명 모두와 한 번씩 눈을 맞춘 후 말했다.
“그래서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해.”
눈치 빠른 몇 명은 벌써 볼이 붉어졌다.
공주가 살짝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어떤 도움?”
기수는 아주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음양대법이지.”
너무나 당연해서 의문을 제시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게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공주가 좌우를 살핀 후 약간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그, 그야… 그동안도 해왔고, 앞으로도…”
“아니. 내가 너희들을 특별히 한 자리에 모아서 부탁하는 것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대법을 시행하기 위함이야.”
“어떻게 다른데?”
“이제까지의 대법은 서로 가져가는 진기의 비율이 비슷했지만 이제부터 하려는 건 내가 가져가는 쪽이 훨씬 많을 거야. 아! 물론 채음보양술처럼 너희들이 손해 보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걱정 말고.”
여인들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서로를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