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522
척회왕은 황제의 칙서를 꺼내어 펼치더니 죄목을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킬로와트급 파워앰프에 마이크를 연결한 것처럼 창주성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래서 성 위와 성 아래 병사들은 물론, 성 안의 백성들까지 그 내용을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대단한 내공이 아닐 수 없었다.
황제는 분해서 낯빛이 벌겋게 변했다.
감히 자기 앞에서 가짜의 칙서를 읽다니…
평생 상상도 못해본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큰소리로 척회왕을 꾸짖었지만, 음량 차이가 너무 났다.
황제의 목소리는 성문 위의 문무 대신들에게만 들릴 뿐, 조금만 거리가 떨어져도 척회왕의 목소리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기수는 답답했다.
마치 한 쪽의 마이크를 꺼놓고 100분 토론을 하는 것처럼 가짜가 진짜를 꾸짖고 그 죄를 나열하는 얘기만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기수가 황제에게 다가가 물었다.
“폐하. 제가 저 얘기를 중단시켜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게. 어서!”
기수는 심호흡을 한 뒤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죄인 척회왕은 헛소리 집어치워라! 전군도독 황호 등과 결탁하여 가짜 황제를 옹립하고 배후에서 역모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온 천하가 다 알고 있아. 네 죄야말로 참형이 마땅하다!”
척회왕은 잠시 조서 읽기를 멈추고 기수를 노려봤다.
기수는 순간 눈을 송곳으로 찔리는 듯 한 느낌에 깜짝 놀랐다.
그는 황급히 진기를 끌어올려 상대의 살기에 맞섰다.
그렇게 한참동안 눈싸움이 이어지다가 척회왕은 다시 칙서를 읽어 내려갔다.
기수도 곧바로 대응했다.
“네 딴에는 준비를 한다고 했겠지만,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으니 포기해라! 어찌 손으로 태양을 가리려 하느냐! 세 살 먹은 어린애도 네 놈이 역적이고, 지금 황궁에 들어앉은 놈이 가짜란 사실을 다 알고 있다. 멀리는 장강의 고을들에서부터, 지금은 황하 남북의 모든 성들이 우리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데 네놈이 얼마나 더 이 작태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당장 말에서 내려 포박을 받아라!”
결국 척회왕은 칙서 읽기를 멈추었다.
끝까지 다 읽어서가 아니라 기수의 방해 때문에 목소리가 섞여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수가 말하는 내용도 칙서를 맥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명분을 밝힌 후에 치려는 계획은 실패라고 봐야 했다.
그가 장창을 들어 기수를 똑바로 겨누며 말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게 바로 네놈이었구나. 기린궁주.”
“후후…. 이 모든 짓거리의 배후는 바로 너다. 친왕으로 태어났으면 황실을 광부하게 만드는 일이나 열심히 도울 것이지, 감히 황위를 노려?”
척회왕은 노한 모습으로 기수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내려와라! 말로만 떠들어서 무슨 소용 있겠느냐?”
“그건 맞는 말이다.”
기수가 청강대도를 챙겨 들고 내려가려 하자 공주가 말렸다.
“저기엔 청탑산 무리도 많은데 왜 위험을 자초하려고 그래? 놈을 올라오라고 해.”
그러나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놈이 여기로 오면 자칫 황상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었다.
“넌 여기서 지키고 있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싶으면 대기시켜 놓은 배를 타고 도망쳐. 황상을 모시고…”
“안 돼! 난 너와 함께 싸울 거야.”
기수가 지고 척회왕이 살아남는다면 어차피 도망친다 해도 소용없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황실의 미래를 생각해야지.”
기수는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었다.
자기는 마무리를 짓기 위해 어떻게든 마지막 사도와 싸워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목숨까지 걸 이유는 없는 것이다.
바로 그때.
기수를 살피고 있던 척회왕이 손을 휘저었다.
예리한 파공음을 들은 기수는 깜짝 놀라서 청강대도를 휘둘렀고, 황제의 얼굴로 향하던 두 개의 바늘 모양 암기를 쳐냈다.
따당! 하는 파열음이 어찌나 큰지 황제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 했다.
기수는 기수대로 침음성을 흘렸다. 바늘 크기의 암기를 막았을 뿐인데 도신이 홱 돌아갈 정도의 충격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서늘한 전율이 한 차례 전신을 훑고 내려갔다.
‘강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갑자기 엄습해왔다.
공주는 그 암기 공격으로 인해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황급히 황제 옆으로 다가가서 지켜 서며 말했다.
“알았어. 만약에 대비하도록 할게.”
그리고는 탁지연을 비롯한 사매들을 손짓으로 불러 황제를 호위하도록 했다.
사매들은 모두 검을 뽑아 들었다.
또 다른 암기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기수는 척회왕을 내려다봤다.
그는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기다리기 지루하구나. 어서 내려와라.”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심호흡을 한 차례 했다.
이제까지 많은 싸움을 해왔지만 이 정도로 자신을 떨리게 만드는 적은 처음이었다.
기수는 자기를 집어삼키려는 두려움에 맞섰지만, 좀처럼 이겨내기 어려웠다.
이 싸움을 뒤로 미루고 싶다는 생각만 계속 이어졌다.
‘조금만 더 내공을 쌓으면 될 텐데…’
그러나 그럴 기회가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황제가 모든 병력을 이끌고 올라온 상태.
척회왕 역시 마지막 힘을 짜내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가 죽건, 척회왕이 죽건, 바로 이곳 창주에서 결판이 나야 하는 것이다.
자기가 척회왕을 죽이기만 하면 그를 따라온 금군은 불필요한 저항을 포기할 것이고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 반대라면 자기 주변의 무림고수들 중 척회왕을 상대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합격진으로 시간을 끈다면 황제의 목숨은 살릴 수 있을지 몰라도 황위 복귀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기수는 주먹을 꽉! 쥐고 힘을 주었다.
‘어떻게든 내가 놈을 죽여야 한다. 그게 안 된다면 중상이라도 입혀야 한다.’
두려움을 이겨내야만 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바로 내 일이다!’
엄마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어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기수는 두려움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성 아래로 훌쩍 뛰어내린 것이다.
자꾸만 도망치고 싶은, 뒤로 미루고 싶은 마음을 아예 없애버리고 배수의 진을 치는 거라고 할 수 있었다.
막상 아래로 내려와 척회왕을 향해 걸어가자 확실히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
여전히 솜털이 쭈뼛거릴 정도의 긴장감은 남아 있지만 공포가 자기를 집어삼킬 정도는 아니었다.
척회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제법 사내다운 면이 있는 놈이었구나.”
기수는 대도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땅에 쿡! 찍어 세웠다.
싸울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사도와 마주할 때 느껴지는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척회왕 역시 같은 걸 느끼는지 몸을 한 차례 떨었다.
그때 등 뒤에서 파공음이 들려왔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조민과 조현 자매, 혈천제와 마령들, 주일비와 무림맹 고수들, 여인들이 차례로 기수를 따라 내려온 것이었다.
기수 입장에선 고마운 일이었다.
그들 역시 척회왕의 가공할 기도를 느꼈을 텐데 이렇게 자기를 위해 와준 것이다.
여인들은 그렇다 쳐도 주일비까지 내려온 것은 좀 의외였다.
아무래도 황제가 친척이라고 각별히 대해주는데 이런 장면에서 뒤로 물러나 있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기수는 그들이 뒤에 서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서 얼굴에 미소도 돌아왔다.
“자!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그러자 척회왕이 손짓을 하여 군대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
“서두르지 말거라.”
금군이 500미터쯤, 사람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멀어지자 척회왕이 기수에게 말했다.
“방해 없이 단둘이 놀아보는 게 어떻겠느냐?”
자기가 먼저 청탑산 무리를 뒤로 퇴각시켰으니 기수도 지원군을 등에 업을 이유가 없어서 흔쾌히 응했다.
“좋다!”
두 사람은 성벽과 금군 사이 벌어진 간격의 딱 중간쯤 되는 위치로 이동했다.
누구의 도움이나 방해도 없이 단둘이 결전을 벌이는 모양새라 기수를 따라 성벽을 내려온 고수들도 멀찍이서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양측의 간격을 확인한 척회왕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투구와 갑옷 상의를 벗어 말안장에 얹은 후 엉덩이를 때려 자기 진영으로 보냈다.
“갑옷은 영 익숙해지지 않는군. 후후…”
기수는 그의 행동을 이해했다.
자기 수준의 고수와 싸울 때 갑옷은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 방어력에 보탬을 주는 부분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척회왕의 얼굴은 날카롭던 기세와 달리 약간은 편안하고 기품이 느껴지기도 했다. 황제와 약간 비슷한 분위기였다.
기수는 그의 엄심갑에 새겨진 용 문양을 보고 한 마디 했다.
“벌써 황제가 된 기분을 내고 있군.”
“이거 말인가? 후후… 서열로 보나, 힘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내가 황제가 되는 게 맞지. 자네는 어떤가?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게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나?”
기수는 그의 말투가 갑자기 우호적으로 변한 걸 느끼며 대답했다.
“이상은 그런데… 현실에선 잘 이루어지지 않더군.”
“그대도 황제보다 내가 낫다는 걸 인정하는 건가?”
“아니. 자기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백성들이 전란에 시달려도 된다는 생각은 애당초 글러먹었어. 그러니 넌 자격이 없다고 봐야지.”
척회왕은 미소 지었다.
“누군가가 한귀비를 찾아내지 않았다면 아주 조용히 처리할 수도 있었지.”
기수는 코웃음을 쳤다.
“그랬을 것 같지 않은데? 마신을 만족시키려면 피가 필요한 것 아니었나?”
“후후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가?”
“자기가 이용당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군…. 역시 사람은 권력에 눈이 멀면 다른 걸 돌아볼 여유가 없어지는 모양이야.”
똑똑한 사람도 국회의원이 되면 바보짓 하는 걸 이미 많이 보아 온 기수였다.
척회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가 이용당한다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네가 계약한 마신은 피를 원한다. 그래서 난세를 만들려고 하는 거야. 쉽고 빠른 길이 보여도 자꾸 어려운 쪽으로 일이 진행되었을 걸? 더 많은 피를 보는 쪽으로…”
척회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 기색은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분명한 것은 이제까지 걸어온 길은 모두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고, 난 거기에 대해 단 한 점도 후회가 없다.”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마신이 바보가 아닌 이상 피를 요구하는 계약을 맺지는 않았을 것이다.
권력이란 게 원래 피를 보지 않고는 얻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척회왕은 자기가 걸어온 길이 자신의 선택이라고 굳게 믿는 것이다.
“네가 후회를 하건 말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 자! 슬슬 시작해볼까?”
기수는 서서히 진기를 끌어올렸다.
황제에게 암기를 던진 것처럼 자기에게도 언제든 암수를 쓸 수 있기 때문에 일단 가장 효율이 좋은 천기오뢰강을 몸에 둘렀다.
척회왕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서두르나?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죽은 목숨이 될 텐데… 그보다 먼저 얘기를 좀 해보는 게 어떤가?”
“무슨 얘기를…”
척회왕이 기수를 똑바로 보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나와 손을 잡자.”
“하핫! 무슨 말도 안 되는…”
“무엇을 원하는가? 권력?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모든 권력을 누리도록 해주겠다. 돈? 액수를 말만 하라. 명예? 그대 이름을 청죽에 새겨 만세에 걸쳐 온 백성이 우러르도록 하겠다. 여자? 천하의 모든 미인을 마음대로 취하도록 해주겠다.”
네 번째 조건에서 살짝 흔들렸지만 기수가 척회왕과 손잡을 수는 없었다.
“이봐. 잊었나? 난 너의 부하 11명을 죽였다.”
“알고 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이 제안을 하는 것이다. 너는 그 11명 중 누구보다도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했으니까.”
“자기 부하… 아니 제자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들을 모두 죽였는데도 나를 포섭하겠단 말이지?”
“그렇다. 천하를 경영하는 데는 인재가 많이 필요하거든.”
기수는 그가 갑자기 말투까지 바꿔가며 자기를 대우해 준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필요하다면 숙적이라도 데려다 쓴다?
척회왕은 야망에 걸맞는 배포를 가졌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이봐. 우리는 각각의 신을 대표하고 있다고. 그들은 형제인 동시에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숙적이기도 하지. 우리가 공존하는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존재들이 아냐.’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할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일단은 무슨 소리를 하나 들어보고 싶어서 속마음을 숨기고 물었다.
“내가 원한다면 받아줄 수도 있단 말이지?”
“그렇다. 마음을 완전히 돌아섰다는 증거로 한 가지 일만 해주면 된다.”
“그게 무엇이냐?”
“비종 태무신궁의 궁주를 잡아와라.”
“하하!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했군. 진영군이 남긴 얘기는 낭설이다. 불로장생의 비결 같은 것은 없어.”
척회왕이 미소 지었다.
“비법을 알아낸 이후엔 네게도 가르쳐주겠다. 그러면 우리 둘이 영원히 천하를 지배할 수 있다. 어떤가?”
기수는 척회왕의 한계를 보았다.
평생 권력을 쫓다가, 이제 나이가 들고 나니까 영생을 추종하는 것이다.
설령 이 세상 모든 부와 미녀를 준다고 해도 이런 사람 밑에 있기는 싫었다.
“아! 그냥 시작하자! 더는 못 들어주겠다.”
기수가 대도를 한 바퀴 돌려 척회왕에게 겨누며 발을 진각하자 쿵! 하는 굉음과 함께 멀리 떨어진 일행에게까지 발바닥으로 진동이 전해졌다.
척회왕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