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524
기수는 모험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처럼 싸워서는, 무난하게 버틸 수는 있겠지만 그대로 무난한 패배로 이어지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을 것이었다.
바둑으로 치면 정석에서 밀리고 중반 전투에서 손해 본 상황.
그냥 끝내기로 들어가면 패배가 확정적일 때 한 집 지나 만방 지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흔들기를 시도해봐야 할 시점이었다.
기수의 보법이 빠르게 변화하자 척회왕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기수는 자신의 선풍비가 상대보다 어쩌면 약간은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급한 공격엔 응징이 뒤따랐다.
“크윽!….”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기수는 신음을 흘렸다.
어깨에 피가 튈 정도의 상처를 입은 것은 천기오뢰강이 뚫릴 정도로 제대로 한 방 맞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기수는 멈추지 않았다.
상대의 정확한 응수에 젖힌 돌이 끊기고, 끊긴 돌이 잡혀도 어떻게든 활로 모색을 위해 비벼대야 하는 대마처럼 좌충우돌하며 간격을 좁혀 나갔다.
“후후… 멍청한 놈…”
척회왕은 기수를 비웃으며 계속해서 허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
그의 눈빛을 본 기수는 포기하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포기하면 괴로움도, 고통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내공을 더욱 끌어올렸다.
퍽! 소리와 함께 한 번 더 옷이 찢어지고 상처가 생겼지만 기수는 멈추지 않고 상대를 계속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자 척회왕도 웃음을 거두었다.
“이런 무식한 놈이 있나.”
그의 강기 사이즈가 갑자기 줄어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돌발적으로 십여 개의 강기로 나뉘어져 한꺼번에 쭉! 뻗어 나와 기수의 요혈들을 동시에 타격했다.
“젠장!”
기수는 그것들을 동시에 막아내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천기오뢰강에 모든 내공을 집중했다.
퍽! 소리와 함께 기수의 신형은 20여 미터나 뒤로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기공자!”
그러자 조민과 조현 자매가 황급히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도저히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여인들도 움직였지만 경공에서 조민과 조현이 독보적이었다.
그녀들이 나서자 다른 고수들도 움직였고, 척회왕 뒤쪽에서도 청탑산 무리가 일제히 튀어나왔다.
기수는 벌떡 몸을 일으킨 뒤 조민과 조현 자매에게 말했다.
“난 괜찮아. 뒤로 물러나.”
“하, 하지만 기공자…”
기수의 몸 곳곳엔 강기에 찔린 상처가 나 있었다.
옷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수의 뜻은 확고했다.
“이건 내 싸움이야. 방해하면 용서하지 않을 거다. 너희들이라고 해도.”
기수의 어조가 워낙 진지하다 보니 조민과 조현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황제 진영의 고수들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자 청탑산 무리도 물러섰다.
다시 전장엔 기수와 척회왕,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척회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왜 도움을 거절했느냐? 지금의 네 능력으로는 안 되는 게 분명한데…”
“글쎄.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맞아 보니까 너도 별 거 아니다.”
“뭐, 뭐라고?”
기수는 양팔을 벌려 보였다.
“봐라. 이렇게 멀쩡하지 않느냐? 너의 파천강기가 내겐 안 통한다는 거지.”
사실 속으로는 맞은 자리들이 엄청나게 아팠다.
하지만 내상은 미약했다. 그것은 솔직히 기수도 놀란 바였다.
척회왕이 아무리 깊은 내공을 보유했다 하더라도 자신과의 차이가 두 배, 세 배 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강기 공격으로 천기오뢰강까지는 파고들었다 하더라도 몸통을 꿰뚫을 힘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척회왕이 냉소를 지었다.
“흥! 한 번 더 맞아보겠느냐?”
“얼마든지.”
기수는 아예 무방비 상태로 양 팔을 늘어뜨렸다.
그러나 척회왕은 기수를 공격하지 않았다.
간격이 훨씬 벌어진 상태에서 공연히 진기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기수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 난 저 자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내공을 지녔다!’
괜히 자신을 위로하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제대로 한 방 맞고 보니까 상대의 펀치가 겁먹을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난 지금 혼자 싸우는 게 아니다!’
기수는 자신의 세 단전에 20명의 내공이 뭉쳐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그동안 그녀들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몸을 불살라 주었던가.
그 노력을 헛되이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수는 척회왕을 향해 걸어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뚜벅뚜벅.
척회왕은 기수가 가까이 다가와도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전투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가 긴장하며 바라보는 가운데 기수는 척회왕과 2미터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선 후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까지도 척회왕은 기수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기수가 미소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자. 이제 진짜로 시작해볼까?”
“후후후…. 좋다.”
두 사람은 강기 대결로는 승부가 날 수 없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기수가 척회왕의 파천강기에 밀려나기만 했을 뿐 뚫리지는 않은 것으로 입증된 사실이었다.
팔다리로 직접 치고받는 박투술.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는 기본공으로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척회왕은 기수의 접근을 기다려준 것이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기수는 이 대결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자신에게도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 방에 치명타를 먹여야 한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경계심만 키우고 두 번째 기회를 잡지 못하게 될 거야.’
문제는 어떤 수법을 쓰느냐 하는 것이었다.
생각할 여유는 많지 않았다.
척회왕의 주변 공기가 급격히 팽창하는 느낌에 기수 역시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렸고 순간, 확! 하는 폭음과 함께 화염이 원형으로 퍼져 나갔다.
척회왕은 근거리에서 퍼지는 화염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거기로 기수의 분광권이 파고들었다.
숨 돌릴 겨를조차 없는 연속공격.
그러나 척회왕은 단지 내공만 깊은 게 아니었다.
초식 운용에 있어서도 정묘하고 변화가 풍부했다.
기수가 화염을 통해 잡았던 우세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손이 닿을 때마다 찌릿! 하는 불쾌한 자극과 함께 몸으로 파고드는 암경을 감지할 수 있었다.
‘단월쇄심장이구나!’
처음에 장창과 대도로 싸울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암경의 강력한 침투.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암경이 기수에겐 낯설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자신이 익힌 단정홍과 비슷한 성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얼얼할 느낌이 번지기는 해도 기경팔맥이나 단전이 침범 당하지는 않았다.
암경보다는 척회왕의 노련한 초식 운용이 더 신경 쓰였다.
원래 방어에 특화된 단월쇄심장이다 보니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가 여의만상권이 돌발적으로 섞이자 우세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으으….”
기수는 이를 악물고 최선의 초식을 펼쳐냈지만 상대는 암벽처럼 단단했다.
수류 태포련으로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척회왕은 그것에까지 대비하면서 초식을 운용했다.
그래서 수류 태포련은 위기에서 벗어날 때만 겨우 써먹을 수 있을 뿐이었다.
‘아! 정말 안 되는 건가?…’
척회왕과 자신의 레벨이 예상했던 것보다 차이가 크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나름 고무적인 성과였다.
그러나 막상 척회왕이 그 차이를 인정하고 딱 그만큼만 이기겠다고 단단하게 지키면서 압박해 오니까 그걸 넘어서기가 너무 힘들었다.
운룡비결로 쳐도 흘려보내거나 흡수할 정도이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내공, 초식, 그리고 심리적인 면에서까지 자기보다 강한 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이대로 당할 수는 없어.’
기수는 머리를 쥐어짰다.
지기는 싫었다. 엄마를 보고 싶었고, 사랑하는 여인들을 다시 안고 싶었다.
그때 문득 한 가지 떠오르는 수법이 있었다.
화류의 태포련.
자기가 사용하는 태포련 말고 합비에게서 처음에 배웠던 오리지널 태포련.
방법은 알지만 자기 손이 익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에 겁을 먹어서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한 수법. 그거라면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척회왕은 지금도 단월쇄심장의 암경을 계속해서 흘려보내고 있었다.
거기에 역으로 화류태포련을 실어 보낸다면?
그렇게 해서 상대의 손이나 팔을 익혀버릴 수 있다면?
물론, 연습조차 해보지 않은 수법을 실전에서 써먹는다는 게 너무나 가능성 희박한 시도이기는 했다. 잘못하면 자해가 되어서 종말을 앞당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수는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것 말고는 철벽같은 단월쇄심장을 파해할 어떤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기수는 분광권을 운용하는 중에 중단전을 비워 화류 태포련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합비의 구결을 머릿속으로 한 번 확인하고 이제까지 목욕물을 데우던 수많은 시도들의 감각을 기억해냈다. 황하에서 수영하며 강물을 데우던 생각도 났고, 청동향로를 녹이던 일, 돌을 마그마로 만들었던 일도 기억났다.
‘난 할 수 있다! 겁먹지 마!’
기수는 자기 손이 익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억지로 떨쳐내며 태포련을 운기했다.
“으음!….”
척회왕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손이 움츠러드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기수는 뛸듯이 기뻤다.
‘돼, 됐다!.. 해냈어!…“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손가락들을 오므렸다 펴 보았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척회왕이 노갈을 터뜨렸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냐?”
“후후…. 오븐에 들어간 느낌을 맛보게 해주마.”
“무슨 헛소리냐!”
기수는 양손 모두에 화류 태포련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양손이 붉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박투술이 이어지자 척회왕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단지 뜨거운 게 아니라 닿은 이후에 손으로 열기가 파고들어서 못 견디게 고통스러웠다. 암경이 파고드는 거라면 내공으로 몰아낼 수 있겠지만, 진기가 아닌 열기가 전해지는 거라서 대처하기가 난감했다.
당황한 척회왕과 달리 기수는 점점 더 화류 태포련 운용에 능숙해졌다.
의식을 목표지점에 집중하는 게 포인트였다.
그러면 불꽃이나 화염이 일지 않고도 열기를 전달할 수 있었다.
‘역시 난 천재였어!…’
기수는 계속 뒷걸음질 치는 척회왕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척회왕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 어떻게 이런…”
상대의 공격을 막아야 하는데 손이 닿을 때마다 화상이 늘어나는 상황.
기수의 공격목표가 전신 요혈이 아닌 방어하는 손 자체이다 보니 단월쇄심장의 방어초식도 의미가 없었다.
이런 식의 싸움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터라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기수가 척회왕에게 말했다.
“고맙다.”
“무, 무엇이 말이냐?”
“적이 약점을 보이면 그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라는 조언.”
“으으….”
기수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척회왕의 얼굴을 보면서 스스로를 다잡았다.
‘여기서 집중해야 한다! 절대 방심하지 마!’
기수는 상대가 암기를 던질 수도 있고, 파천강기로 자신을 밀어낼 수도 있다는 전제를 깔고 타격에 집중했다.
그러나 척회왕은 다른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양손 모두 극심한 통증만 전해져 올 뿐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배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정신력도 더 이상 버텨주지 못했다.
한 순간, 기수의 눈이 빛났고 그의 손바닥이 척회왕의 가슴에 닿았다.
기수는 척회왕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그의 심장에 청동도 녹이고 돌도 녹이던 열기를 주입시켰다.
“허억!….”
척회왕은 눈을 부릅떴고, 기수는 손을 거두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척회왕의 몸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손을 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끝났다!’
어쩌면 허무하기까지 한 결말이었다.
비틀거리며 서너 걸음 물러서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 선 척회왕은 부릅뜬 눈으로 기수를 노려보고 감각도 없는 손으로 자기 가슴을 더듬었다.
“헉…! 헉…!”
열기가 폐에까지 전해졌는지 그의 호흡은 몹시 부자연스러웠다.
최후를 절감한 척회왕은 고개를 들어 성벽 위의 황제를 노려본 후 시선을 기수에게로 옮겼다.
기수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더 강하기 때문에 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아니다. 내가 이겼기 때문에 내가 더 강한 것이다. 너와 마신은 상대를 잘 못 만난 거지. 후후후…”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했다는 사실이 정말 기뻤다.
“끼아아아!…..”
척회왕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향해 마지막 단말마의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서서히 뒤로 넘어가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청탑산 패거리가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주군! 저희들이 있습니다!”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기수는 그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으아아아아!……..”
전신을 감싸오는 희열 때문에 무방비상태로 장소성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