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72
암천제의 행렬은 도룡문의 대형 연무장에 멈추었다.
소혼랑이 평소와 달리 비단 궁장을 입고 얼굴에는 예전의 그 귀신 화장을 한 채로 마중 나와 암천제를 맞았다.
“천제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가마의 휘장이 걷히고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30대 중후반쯤으로 보였는데, 키는 180에 약간 마른 몸매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머리를 묶은 두건과 장포가 화려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었고, 얼굴도 단번에 눈에 띄는 미남형이었다.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 곧은 콧날은 약간 매부리코처럼 끝이 휘었고, 깨끗이 면도한 턱은 강인해 보였다.
기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선, 얇상한 입술 끝에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미소가 습관처럼 걸려 있었고, 소혼랑을 비롯한 도룡문 제자들을 훑어보는 눈길도 거만했다.
천마교의 삼천제 중 한 명이라면 그래도 되는 신분이긴 하지만 기수가 보기에 기분 나쁜 건 나쁜 거였다.
현대 한국에도 남자가 화장하고 다니는 놈들이 있는데 꼭 그 짝이었다.
화장이 나쁜 게 아니라 그놈들이 하는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던 기수였다.
암천제도 아무리 인권이 무시되는 세상이라고 해도 여자들에게 가마를 들게 한 때부터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기수는 암천제의 시녀들을 둘러보았다.
‘그런 힘든 일을 감당해야 하다니… 불쌍하기도 하지….’
머리의 생각은 그랬지만 눈은 습관대로 우선 얼굴, 가슴, 몸매와 키를 살펴보고 등급을 순식간에 매겨갔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레벨이 상당히 높았다.
암천제가 공을 많이 들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소혼랑이 암천제에게 물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러자 암천제가 티껍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내가 여기 오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암천제의 목소리는 입술처럼 좀 얇고 고음으로 치우쳐 있었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소혼랑과 제자들을 둘러봤다.
기수는 그의 시선이 자기 쪽으로 향하자 급히 시선을 내리 깔았다.
혈천제도 이기지 못하는 처지에 비슷한 레벨의 고수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켜서 좋을 일이 없는 것이다.
암천제는 가마에서 나와 뒷짐을 지고 느리게 걸어 소혼랑 앞으로 갔다.
그리고 싸늘한 코웃음을 쳤다.
“흥! 너희들의 멍청한 짓거리가 어떤 결과를 이끌었는지 모른단 말이냐?”
소혼랑은 쩔쩔맸다.
“잘 모르겠습니다. 부디 가르쳐주십시오.”
“화양문!”
“아! 그, 그 일은…..”
소혼랑 입장에선 실패한 작전이고 부끄러운 과거였다.
암천제가 쯧쯧하고 혀를 차더니 말했다.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깟 놈 하나 죽이지 못하다니….”
소혼랑은 자기도 모르게 기수가 있는 쪽을 한 번 힐끔거렸다.
기수만 없었다면 화양문은 그날 밤 사라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때의 일이고, 지금의 기수는 자신은 물론 사부님에게도 절대 놓칠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 되었으니 원망하거나 미워할 수 없었다.
암천제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화양문 문주 양호중이 무림맹에 가 있던 아들 양화린을 불러들였고, 무림맹에서도 지원군을 파견했다.”
“아! 그, 그런 일이…..”
“한심하구나! 적의 동향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계곡에 처박혀서 그동안 뭘 했던 거냐?”
“죄, 죄송합니다.”
“에잉~! 한심한 것들. 무슨 일이건 직접 해야지, 아랫것들은 믿을 수 없단 말야.”
그는 도룡문 문도들을 다시 한 차례 훑어봤다.
문도들은 문주부터 욕을 먹는 판이다 보니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기수도 고개를 푹 숙이고 기도를 감추는 데만 집중했다.
암천제가 소혼랑에게 말했다.
“네 사부를 나오라고 해라.”
“예? 사, 사부님을 왜 여기서 찾으십니까?”
“흥! 그녀가 여기 있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당장 나오시라고 해라.”
소혼랑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혈천제가 자기는 이곳에 없는 것으로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암천제의 목소리에 노기가 더해졌다.
“왜 가만히 있느냐? 당장 모시고 나오지 않고.”
“처, 천제님…”
소혼랑이 곤란해 하자 혈천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왜 찾는 거지?”
그녀가 나타나자 비로소 암천제의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사매! 오랜만이군. 하하하……..!”
암천제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혈천제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그녀는 암천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가 없는 것처럼 하라고 시켰던 것이다.
혈천제는 지옥도의 아이들 중에서 단연 최고의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암천제도 그녀를 지극히 아껴주고 보호해주었다.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혈천제도 처음에도 암천제를 믿고 의지했다. 잘 생기고, 체격도 나이에 비해 튼튼할 뿐만 아니라 영리하고 무고에 대한 자질도 뛰어나서 여러모로 의지할 만 했다.
그러나 사람이 극한상황에 처하면 자신의 본래 인간성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녀는 암천제가 살아남기 위해, 좀 더 편하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료들을 어떻게 이용해먹는지 똑똑히 알게 되었고, 그에게서 정을 떼게 되었다.
그러나 암천제는 달랐다.
혈천제를 잊을 수 없었다. 수많은 시녀들을 모으고, 난잡하고 방탕하게 놀아 봐도 누구 하나 혈천제를 대신할 수 없었다.
지금 다시 만나고 보니 그녀에 대한 흠모의 정이 훨씬 더해졌다.
못 본 사이에 혈천제는 엄청나게 예뻐져 있었다.
원래 바탕이 아름다운데다가, 소녀에서 숙녀의 나이로 옮아가면서 성숙미가 물씬 풍겼고, 요즘 내공이 깊어져서인지 피부에서 광택이 났다.
암천제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그녀가 자기의 청혼만 받아준다면 지금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고 해도 기꺼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바램과 달리 혈천제는 냉랭했다.
“얘기해 봐. 왜 나를 찾은 거야?”
암천제는 씩 웃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한 주먹에 죽여 버렸겠지만, 혈천제만큼은 달랐다. 반말을 하고 틱틱거리는 게 건방진 게 아니라 귀엽게 보였다.
“왜긴 왜겠어? 너와 제자의 실패를 만회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왔으니까 당연히 머리는 맞대고 작전을 짜야지. 흐흐흐….”
기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제 보니까 저 새끼가 혈천제한테 흑심이 있네?’
기분이 상당히 나빴다. 어쩌면 질투심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당장 뛰어나가서 암천제의 이마에 구멍을 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마교 삼천제의 무공이 비슷한 수준이라고 봤을 때, 자기는 아직 그를 이길 수준이 아니라고 봐야 했다. 더구나 혈천제가 제지하기라도 한다면 괜히 정체만 탄로나고 말 것이었다.
혈천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암천제에게 물었다.
“무림맹이 움직였다고?”
“난주가 온통 무림맹 사람들로 북적거리는데 사매도 소식이 깜깜이군. 이런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 처박혀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폐관수련.”
혈천제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기수는 속으로 웃었다. 자기도 이곳에서 같은 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암천제가 양팔을 벌리며 물었다.
“날 계속 여기 세워둘 건가? 아니면 적과 싸울 대책을 의논할 건가?”
혈천제는 턱짓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안에서 얘기하도록 하지.”
그녀가 암천제를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무림맹의 난주 집결은 천마교 입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상황이었. 심각하고 신중하게 대응해야 했다.
기수는 그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혹시라도 암천제가 수작을 부릴까봐 신경이 자꾸 쓰였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도룡문의 평제자 역할을 해야 했다.
수장들이 자리를 비우자 남은 마교도들은 암천제 쪽 무사들에게 석실을 배정해주고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기수도 그들 사이에 섞여 물건을 옮기기도 하고 군막을 펴기도 하면서 도왔다.
암천제와 함께 온 예쁜 시녀들을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도도했다. 도룡문 문도들뿐만 아니라 자기네 쪽 무사들에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 걸 보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쳇! 가마꾼들 주제에….’
기수는 곧 그녀들에게서 흥미를 잃었다.
여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게 그의 평소 지론이지만 암천제의 가마나 들고 다니면서 콧대만 높은 여자라면 별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혈천제, 소혼랑, 광혼랑 들과 놀다 보니 암천제의 시녀들 중에 특별히 눈에 띄는 마스크가 없는 것도 한 이유였다.
도룡문의 집무실.
암천제는 마주앉은 혈천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까운 곳에서 보니 더 아름다웠던 것이다.
“사매. 이제 시집가도 되겠어. 후후후…..”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신랑감을 제발 알아봐 달라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혈천제는 냉랭했다.
“142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적의 동정이나 얘기 해.”
암천제는 혈천제를 매번 사매라고 불렀지만 혈천제는 그를 사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옥도에서 서로를 부르던 호칭을 고집했다.
암천제는 그녀의 행동 모두가 그저 사랑스럽기만 했다.
혈천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손가락만 까딱했다.
그러자 암천제의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마령 영마(影魔)와 철우(鐵牛) 중 영마가 앞으로 나서서 큰 지도를 탁자 위에 펼친 후 그동안 수집한 정보를 보고했다.
혈천제와 소혼랑, 고혼랑은 심각한 표정으로 지도에 집중했고, 암천제는 혈천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저걸 내 손에 넣을 수 있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하룻밤 동침만 하면 내 여자가 될 텐데…..’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 혈천제는 삼천제 중 유일한 여자고, 따라서 무공도 셋 중에선 가장 처진다고 할 수 있지만 아무리 자기라고 해도 100수 이내에 제압할 수준은 아닐 것이었다. 강제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래도 약을 먹여야 할 것 같군.’
그는 십여 종의 음약과 최음제를 가지고 있었다.
혈천제의 미모가 이 정도로 활짝 피어나 있다면 더 놔둘 이유가 없었다. 여기 온 김에 반드시 자기 여자로 만들겠다고 각오를 했다.
작전회의는 오래지 않아 끝났다.
암천제의 정신이 다른데 팔려 있었기 때문에 혈천제 진영에서 어떤 제안이 들어오건 다 쉽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매.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나 한 잔 하지?”
“강적을 눈앞에 두고 무슨 술을 마시겠다는 거야? 정신 차려.”
암천제는 술자리에서 어떤 방법으로 약을 탈까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졸랐지만 혈천제는 단호하고 쌀쌀했다.
“여긴 도룡문이니까 정 술을 마시고 싶으면 문주에게 달라고 해.”
암천제는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소혼랑도 미녀지만 지금 그의 정신은 오로지 혈천제에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룡문에서 내어 준 석실로 간 그는 화풀이라도 하듯 손에 잡히는 시녀를 벗겨 침상에 누이고 자기가 시킨 말을 반복하도록 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의 청혼을 받아들일게요.”
“흐흐흐….. 아무렴. 당연히 그래야지.”
암천제는 혈천제를 상상하며 시녀를 범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알몸의 시녀를 침상에서 밀어냈다.
“아냐! 나의 사매는 이렇게 쉽게 벌어지고, 쉽게 젖을 리가 없어! 아직까지 나를 위해 순결을 간직하고 있을 거란 말이다!”
시녀들은 눈치만 봤다. 이미 다 건드려놔서 처녀라곤 없는데 어쩌라는 건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결국 평소처럼 물량공세로 달래주는 수밖에 없었다.
암천제가 그렇게 시녀들과 어울려 놀고 있는 동안 그를 따르는 두 마령 중 한 명인 철우는 계곡 안을 둘러보았다.
그는 30대 초반의 거한으로, 본래 흑도방파 출신이었는데 타고난 완력한 잔인한 손속이 암천제의 마음에 들어 제자가 되었고 마공을 전수받아 고수가 되었다.
그는 암천제의 제자가 되기 전부터 본래 살인과 방화를 즐겨 했다.
그리고 끊을 수 없는 또 한 가지 취미가 부녀자 겁탈과 강간이었다.
암천제의 제자가 된 후 다른 건 다 좋은데, 여자 문제가 마음에 안 드는 철우였다.
예쁜 시녀들이 수십 명이나 있지만, 그녀들은 전부 암천제 차지였다.
눈길만 줘도 눈알을 뽑아버리는 형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철우는 꽃 같은 미녀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정욕을 억눌러야 하는 형벌을 받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암천제는 씀씀이가 컸다. 그래서 기녀들을 사와서 남자 제자들에게 마음껏 욕정을 발산하도록 해줬다. 또한 전투가 벌어지는 경우에도 전리품으로 생포한 아녀자들은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출정을 나와 있는 기간 중에는 기녀를 사 올 곳이 없었다.
그래서 전투가 벌어질 때까지 참아야 했다.
철우는 다른 제자들과 달랐다. 참기 싫었다.
암천제의 시녀들에겐 감히 흑심을 품지 못하지만 도룡문 제자들이라면 상관없는 것이다. 안 그래도 들어오는 내내 계집들을 살펴본 터였다.
같은 천마교 식구들끼리 그런 짓을 해선 안 되지만, 자기는 마령이고 상대가 평제자라면 신분에 큰 격차가 있었다. 죽이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배 맞대고 놀자는 건데 뭐가 문제되겠느냐 하는 게 철우의 생각이었다.
철우는 우선 일을 치를 장소부터 물색했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밀집되어 있다 보니 계곡 안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고, 절벽과 그 너머의 경계선엔 빈자리가 많이 보였다.
지형 정찰을 마친 철우는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식당으로 가서 오가는 도룡문 제자들 중 젊은 처자들을 집중적으로 관찰했다. 며칠 여자를 품지 못해서 그런지 전부 다 예뻐 보였다.
그러다가 눈에 확 띄는 20대 중반의 여인을 발견했다.
눈매가 예쁘장하고 얼굴도 갸름한 게 요염함과 귀여움을 겸비하고 있었다.
‘흐흐흐…..너로 결정했다.’
철우는 그녀의 뒤를 밟았다.
따라가면서 보니 탐스런 엉덩이가 좌우로 실룩거리는 게 아주 애간장을 녹였다.
‘요거, 요거 아주 제대로 골랐구나. 흐흐흐……’
그녀가 화톳불에서 멀어지자 철우는 주변을 둘러본 후 민첩하게 몸을 날려 그녀의 혈도를 짚었다. 그리고 굳어버린 그녀를 어깨에 걸치고 계곡 위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