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78
기수는 통쾌한 기분으로 한 차례 웃었다.
“하하하하…….!”
만묘와의 약속을 지킨 것도 그렇고, 까불던 놈들에게 맛을 보여준 것도 통쾌했다.
현대와 달리 마음껏 살육본능을 충족시킨 흥분감도 기분을 들뜨게 했다.
그런데 잠시 시간이 지나자 한 가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젠 도룡문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철우가 죽었으니 그가 만하를 죽인 범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설령 범인이란 증거가 나온다고 해도 기수의 신분 상 마음대로 암천제 휘하의 마령을 죽일 권리는 없었다.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쩝….이제 천마교와는 안녕이군.”
막상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니까 은근히 기분이 들떴다.
도룡문에서 멀찍이 떨어져 나왔으니까 이대로 도망치면 자유를 얻는 것이다.
뇌 속의 마옥혈린수도 유효 거리가 있을 것이었다.
‘설마 천하 어디를 가건 리모트 스위치가 작동되지는 않겠지? 무슨 GPS가 달린 것도 아니고 말야.’
마녀에게서 탈출하는 것은 늘 꿈 꿔오던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발길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혈천제의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자꾸 떠올랐던 것이다.
‘아! 진짜 예뻤는데….’
예쁘기만 한 게 아니었다. 최근엔 감정적으로도 교류가 깊어져서 섹스가 서툴던 시절의 그 까탈스럽고 악독하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오늘 하면 어제보다 훨씬 느낌이 좋을 게 분명했다.
기수는 그녀가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지옥도라는 무시무시한 트레이닝캠프에 갇혀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 시달렸으니 인성이 피폐해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라도 예쁘고, 귀여운 아가씨로 바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데, 자기가 그걸 해내도록 옆에서 도와줄 수 있는데 이대로 떠나야 하나 갈등이 생겼다.
“으으……..”
기수는 그녀의 예쁜 얼굴, 특히 자신의 존슨을 고 도톰한 입술로 머금고 흰 치즈액이 입술 밖으로 꿀럭, 꿀럭, 삐져나오던 그 광경을 떠올리며 몸을 한 차례 떨었다.
‘돌아갈까?’
그러나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록 혈천제와의 사이가 급속도로 친밀해졌지만 그녀는 마교의 여인, 그것도 교주 바로 다음 가는 삼천제 중 한 명이었다.
마령을 둘이나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면 가만 놔둘 것 같지 않았다.
특히 암천제가 알면 그녀 개인적으로는 봐주고 싶어도 불가능할 것이었다.
기수는 도룡문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안녕! 혈천제, 그리고 소혼랑…. 광혼랑…..”
그는 도룡문과 반대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까봐 액셀을 이빠이 밟았다.
내공 증진 이후에 제대로 펼치는 선풍비는 정말 대단했다.
“우와! 씨발….. 스파이더맨에서 슈퍼맨으로 업글됐네!”
한 번 도약하는 거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기수는 한 시간도 안 되어 수백 리씩 멀어져 갔다.
그가 떠난 자리.
암천제의 부하들이 뒤늦게 도착하여 영마와 철우의 주검을 확인했다.
그들은 즉시 시신을 수습하여 도룡문으로 돌아갔고, 암천제에게 보고했다.
“뭣이! 영마와 철우가 모두 죽었다고?”
암천제는 격분했다.
그는 즉시 혈천제를 찾아가 따졌다.
“사매! 그놈은 도대체 누구야? 어떻게 내 제자 둘을 동시에 죽일 수 있었지?”
혈천제는 밤사이 증진된 내공 덕분에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런데 암천제가 다짜고짜 찾아와 고함을 질러대자 화가 났다.
“누굴 말하는 거예요?”
“매일 밤 여기 와서 한참 동안 있다 가는 그 사내 놈 있잖아!”
혈천제의 눈썹이 역팔자가 되었다.
“당신. 그 동안 나를 감시했나요?”
“흥! 시집도 안 간 과년한 처녀가 왜 남자를 불러들인 거지? 혹시….”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예요!”
“왜 아냐? 우리 삼천제는 교주님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야 하는데 서방질에 한눈을 팔면 어떻게 해?”
“뭐? 서방질?”
격분한 혈천제가 내공을 끌어 올리자 그녀의 궁장 소매자락이 퍽! 하고 부풀었다.
“요게 어디서 감히 눈을 똑바로 뜨고 노려봐!”
암천제도 화가 났다.
그동안 오냐오냐 해주고, 무슨 짓을 하건 예뻐했지만 두 마령이 시체가 되어 돌아온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건방진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는 생각.
거기에 더해서 자기 말고 다른 남자를 불러들여 정을 통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더해져서 그 역시 내공을 끌어올렸다.
두 고수가 대치하자 석실 안의 공기가 팽창했고 소혼랑과 광혼랑도 황급히 내공을 끌어 올려 스스로를 내상으로부터 지켜야 했다.
암천제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그 놈의 이름과 소재를 대라. 만약 그러지 않았다가는 내 손에 성치 못할 것이다.”
소혼랑과 광혼랑은 암천제가 내뿜은 가공할 사기(邪氣)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혈천제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뭘 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일과는 별개로 네가 나에게 도전한다면 받아주겠다.”
“뭐라고? 하하하…..! 이거 사람 웃기는군.”
혈천제의 미소가 짙어졌다.
“우리가 지옥도에서 겨뤄본 게 벌써 몇 년 전이지? 그때와 지금은 다를 거라고 생각 안 해?”
“흐흐흐…. 당연히 달라졌지. 난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너 따위가 따라올 수 있는 수준이 아냐.”
“말로만 떠들지 말고 진짜로 한 번 붙어보는 게 어때?”
광혼랑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차, 참으십시오. 두 분 천제님은 우리 교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두 분이 서로 싸우시면 안 됩니다.”
“닥쳐라!”
암천제는 광혼랑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손바닥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장심에 붉은 구슬 같은 것이 만들어졌고, 암천제는 그것을 똑바로 혈천제에게 날려 보냈다.
무시무시한 빠르기.
암천제는 그 진기환이 혈천제의 몸을 관통할 정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건방진 사매에게 따끔한 교훈을 줄 정도는 충분히 될 거라 생각했다.
‘일단 내상을 입힌 다음, 치료해준다고 하면서 미약 중 하나를 약에 타서 먹이면…’
나름대로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혈천제가 붉은 진기환을 손으로 덥썩 잡더니 자신의 장심을 통해 그대로 흡수해버린 것이다.
“헉! 어, 어떻게…….”
암천제는 깜짝 놀랐다. 그걸 쳐내거나 피했다면 그럴 수도 있으려니 했겠지만, 자신의 암경이 가득 담긴 진기 덩어리를 몸으로 흡수한 것은 격이 다른 대응이었다.
혈천제가 피식 웃었다.
“그동안 수행한 성과가 고작 이거냐?”
그리고 그녀가 진기를 집중하자 석실 전체가 붉은 광채에 뒤덮였다.
“으으……..”
암천제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일찌기 경험해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마기였다.
“사매. 네, 네가 어떻게 이런 경지에….”
“지옥도 시절과는 다를 거라고 했지?”
암천제는 갑자기 진기 집중을 풀었다.
“좋다! 모른다는 네 말을 믿기로 하지.”
그의 갑작스런 반응에 혈천제는 당황했다.
평소 마음에 안 들던 암천제와 한 판 제대로 붙어볼 생각이었는데 상대가 전의를 거둬버린 것이다.
암천제가 다시 말했다.
“두 마령의 죽음에 대해 조사해야겠으니 잠시 계곡을 떠나도록 하겠다. 어쩌면 돌아오는 게 늦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다.
혈천제도 내공을 거둬들였다.
소혼랑과 광혼랑은 감격을 금할 수 없었다.
마교 삼천제 중 혈천제는 항상 말석이었다.
여자라는 이유도 있지만 셋 중 무공이 가장 딸린다는 게 직접적인 이유였다.
그래서 좀 무리를 해서라도 좀 더 위력이 강한 마공을 찾아 익힌 것이고, 주화입마의 위험성에 노출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기수를 통해 마공을 완성시키고 나니까 천하의 암천제가 겁먹고 도망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암천제가 갑자기 꼬리를 말고 물러가는 것은 혈천제와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살아남는데 누구보다 민감한 그가 둘 사이의 실력차이를 명백하게 간파한 것이다.
소혼랑과 광혼랑은 혈천제 앞에 부복했다.
“감축 드립니다! 사부님.”
혈천제는 손짓으로 두 사람을 일어나게 했다.
“나가서 알아봐라. 정말 기공자가 암천제의 두 제자를 죽였는지.”
“예. 즉시 확인하겠습니다.”
소혼랑과 광혼랑은 상황을 알아보고 엽청문과 만묘 부부를 대동해서 돌아왔다.
광혼랑이 보고했다.
“아무래도 사실인 듯 합니다.”
그녀는 만묘에게 자초지종을 모두 얘기하라고 했다.
그동안 수심에 쌓여 지내던 만묘는 얼굴 가득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죽은 동생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원수놈은 대가리가 깨져 죽었으니까 통쾌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만묘의 얘기를 들은 혈천제는 상황을 짐작했다.
“그는 떠났군.”
말해 놓고 나니까 갑자기 허전함이 밀려 들어왔다.
“모두 물러가라.”
소혼랑이 쭈뼛거리다가 말했다.
“암천제의 병력이 모두 철수하고 있습니다. 그냥 둬도 될까요?”
말은 두 마령의 죽음을 조사하러 간다고 했지만 사실은 혈천제를 피해서 달아나는 것이었다.
문제는 무림맹 병력이 집결하는데 원군이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도룡문 문주인 소혼랑 입장에선 심각한 문제였다.
혈천제가 말했다.
“암천제 따위 없어도 나 혼자 모두 막아낼 수 있으니 무림맹과의 결전은 걱정마라.”
“예! 알겠습니다.”
두 마령의 죽음으로 인해 사이가 벌어졌으니 암천제와 함께 작전하는 게 불안한 면도 있었다. 혈천제가 암천제와 짧은 대결에서 보여줬던 신위를 다시 드러낸다면 무림맹 병력이 아무리 많아도 걱정 없을 것 같았다.
문이 닫히고 석실에 혼자 남은 혈천제는 한동안 멍하니 침상만 바라봤다.
“정말 떠난 건가?”
마기를 쏟아낸 후 버릴 그릇.
맨처음 만난 기수는 딱 그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마음 속에 들어찬 기수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녀는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그러자 그 안에서 방금 전 암천제가 날렸던 것과 같은 붉은 진기환이 쑤욱 빠져나왔다. 그 크기는 거의 참외만 했다. 암천제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였다.
평소 같았으면 자신의 마공이 완성되어 이제껏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던 암천제를 넘어섰다는 사실에 뛸듯이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혈천제는 자기 가슴이 아프고, 아프고, 또 아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인에 불과한 남자. 하지만 그의 품안에 안겨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고 그의 가벼운 입맞춤이 눈과 뺨과 이마에 스치는 느낌을 다시 만끽하고 싶었다.
기수가 의협심 때문에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암천제의 제자 둘을 동시에 죽일 정도의 고수였는데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도 용서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돌아올 수 없었다.
마령을 죽였다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천마교 전체의 적인 것이다.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단 말인가?’
만나면 그를 죽여야 했다. 그러니 차라리 만나지 않기를 바라야 할 처지였다.
혈천제는 기수를 잃은 게 빛을 잃어버린 것처럼 그저 아프게 느껴졌다.
‘니가 없으니까 숨을 쉴 수 없어.’
한숨만 나왔다. 기수가 없으니까 머물 수도 없었다.
마치 자신이 죽어가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가 없으니까 웃을 수도 없고, 망가져만 갈 것 같았다.
혈천제는 손등에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한편, 기수는 밤새도록 달리며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했다.
“하하하…….! 왜 진작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엽청문의 석실로 거처를 옮긴 이후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탈출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혈천제와 소혼랑, 광혼랑 모두 자기가 떠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기수 본인도 철우를 죽이지만 않았다면 굳이 떠나려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젠 떠나간 버스고, 더 생각해봤자 부질없는 일이었다.
밤새 선풍비를 시전해도 몸은 전혀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진기순환이 왕성해져서 힘이 더 솟아났다.
기수는 되도록이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을 닫아버리려고 노력했다.
세 미녀의 주요 부위 영상이 자꾸만 그를 괴롭히고 손이 아래로 가게 만들었다.
“어허! 양기수씨.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스스로를 자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체면이 있지.
천하의 양기수가, 무림맹과 마교에서 손꼽히는 미녀들을 두루 섭렵한 자신이, 아무리 양기가 불끈거린다고 해도 그걸 손으로 빼내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참자! 자존심을 지켜야지.’
그게 어떻게 해서 자존심과 관계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무공을 익힌 이후로 뭔가를 참으면 대개 결과가 좋았기 때문에 자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기수는 분광권과 새로 배운 탈백도 48초식을 이미지 트레이닝했다.
그러면서 진기가 회음혈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순환시켰다.
그러자 금세 잡념이 사라졌다.
‘후후…. 이게 바로 진정한 고수의 면모지.’
성욕은 사라졌는데 대신 배가 고팠다.
기수는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다가 멀리 마을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동이 막 터오는 아침.
밥 짓는 연기 올라오는 객잔을 발견한 기수는 급히 그쪽으로 가려다가 불현듯 돈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복면 하나뿐이었다.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된 것이다.
중간에 나뭇가지에 멈춘 기수는 복면을 꺼내어 뒤집어보기도 하고 써보기도 하면서 생각했다.
‘소지품은 이거 하나뿐인데, 어쩌지? 복면강도라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