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80
기수는 한 관이 현대식 단위로 몇 킬로그램인지 생각해 봤다.
정확한 환산 비율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상춘관에서 약초 무게를 잴 때의 그 추를 생각하면 적어도 1kg 보다는 훨씬 무거웠다.
‘1만 관이란 말이지? 최소한….’
기수는 로또라도 당첨된 기분이 되었다.
그걸 찾아서 지금 이곳처럼 아무도 모르는 비밀장소에 감춰둔 후 나중에 현대로 돌아갔을 때 챙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이곳에 있는 돈만 해도 자기가 고황명의 마음을 읽지 않았다면 영원히 땅속에 묻혀 사라졌을 것 아니겠는가.
인류를 위해서도 그것은 낭비였다.
‘가만있어봐. 그런데 고황명은 왜 안 찾은 거지?’
그런 엄청난 보물과 무공이 숨겨진 보물지도가 있는데 성교육 교재 뒤쪽에 찔러놓기만 한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도를 다시 자세히 보니 절단면이 깨끗하지 않았다.
전체 지도가 아닌 4분의 1에 불과했던 것이다.
기수는 들떴던 마음이 식는 것을 느꼈다.
“이걸로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잖아. 아! 좋다 말았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하면, 나머지 4분의 3을 가진 사람도 한숨 쉬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이 지도가 없는 한 그것만으로는 무용지물 아니겠는가.
‘나머지는 누가 가지고 있을까?’
기수는 두 번째 종이를 뒤집어보았다.
그러자 앞과는 다른 필체로 독종(毒宗)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독종이라면 환우구종에 속하는 그 독종을 말하는 거겠지?’
그들이 지도의 나머지 부분을 가지고 있다면 고황명 정도가 어찌 해볼 수 없었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환우구종은 달마조사 이전부터 중원에 자생적으로 있던 문파들이 오랜 세월 발전해온 것으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많은 변화를 이루었다.
대표적인 게 독종으로, 시작은 독으로 했지만 지금은 약으로 더 유명했다.
본래 약과 독은 서로 통하는 것이었다.
상춘관에서 약을 다뤄봤기 때문에 기수도 그걸 잘 알았다.
적게 쓰면 약인 게 함량을 높이면 독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독종이 약선문(藥善門)이라는 자선단체 같은 문패를 걸고 제자들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문주가 특별히 착해져서라기보다는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 때문이었다.
사천당문이 독과 암기로 유명해지자 독종은 자기가 원조라며 우월함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환경이 너무 달랐다.
약선문이 자리 잡은 청주(靑州)는 온대 기후지만 사천은 여름에 몹시 더웠다. 뿐만 아니라 열대지방인 남만과 이어져 있기 때문에 조금만 남쪽으로 채집을 하러 가면 온갖 종류의 독사, 독충, 독초를 입수할 수 있었다.
독을 다루는 법이 아닌 재료에서 완패였다.
결국 약선문은 사천당가와 차별화를 하기 위해 독을 약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것이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었다.
독종일 때는 사람들이 꺼리고 기피했지만 사람 살리는 일로 업종을 바꾸니까 친구도 많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 거대문파가 되었고, ‘독’자 대신 ‘약’자를 더욱 전면으로 내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그들의 출발점이 어디인지 잘 알았다.
그래서 계속 약종이 아닌 독종이라고 불렀다.
경계심을 늦추어선 안 된다는 의미였다.
“좋아! 일단 청주로 가보자.”
기수는 지도를 원래 자리에 잘 넣어두었다.
복사나 스캔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사본을 가지고 다니겠지만 달랑 얇은 종이 한 장인데 비라도 맞으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곳에 놔두는 게 가장 안전했다.
낙양은 하남성이라 지리적으로 접근성은 좋은 편이었다.
기수는 무기들 중에서 가지고 다닐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맨손으로 다니는 것보다 칼이라도 한 자루 차고 다니면 무림인인 줄 알고 귀찮게 하지 않는 면이 있었다.
현대로 치자면 깍두기 머리, 노타이, 배바지와 비슷한 의미였다.
무기 선택 기준은 간단했다.
최대한 가벼운 것.
기수는 폭이 좁은 칼을 골라 들었다. 뽑아 보니 날도 잘 서 있었다.
석실을 나온 그는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을 지웠다.
이제는 이곳이 자신의 비밀창고가 되었기 때문이다.
낙양성으로 들어간 기수는 일단 제일 크고, 사람 많고, 비싸 보이는 객잔에 들어가서 그동안 먹고 싶었던 요리들을 다 시켰다.
배불리 먹고 나서는 방을 잡고 목욕물을 데워놓으라고 한 후 시장에 가서 새옷들을 샀다. 화려한 비단옷도 있었지만 질기고 튼튼한 것으로 골랐다.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튀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 위해서였다.
객잔으로 돌아가 목욕을 마친 그는 새옷으로 갈아입고 거울앞에 앉았다.
내공으로 하는 역용술을 연습하기 위해서였다.
무림맹에도 아는 사람이 있고, 마교에도 아는 사람이 있는 그로서는 조용히, 은밀하게 보물탐색에만 집중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이었다.
내공 중 일부로 얼굴 근육을 잡고 있게 하는 그 기법은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반복하다 보니 조금씩 요령이 생겼고, 마침내 얼굴 바꾸기에 성공했다.
‘와! 진짜 되네?’
거울 안에는 어딘가 낯익은 듯 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 얼굴로 웃고, 울고, 짜증 내고, 화내고, 슬퍼하는 표정변화가 모두 가능했다. 적지 않은 내공이 계속 배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기수의 현재 내공수위로 봤을 때 그 양은 0.1%도 되지 않았다.
‘이런 얼굴도 되려나?’
기수는 영화배우 얼굴들을 차례로 만들어 보았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근육 형태를 바꾸는 것과, 그렇게 바꾼 것으로 특정한 사람의 얼굴을 흉내 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피크로 줄 튕겨 소리 내는 법을 배웠다고 해서 모두가 다 앤디 티몬스처럼 기타를 치게 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도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얼굴 뼈의 골격 자체는 바꾸는 게 불가능했다.
기수는 남의 얼굴 흉내 내기는 포기했다. 그러니 마음이 편했다.
다른 얼굴은 하나면 충분했다.
그리고 목소리도 바꿀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내공을 이용해서 성대 주변 근육을 고정시키는 것으로, 약간 고음이 되었다.
“좋아! 이제부터는 이게 내 아바타다.”
기수는 언제 어디서라도 그 얼굴을 만들 수 있도록 연습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기수는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점소이를 뒤로 하고 객잔을 나왔다.
새얼굴에 적응하기 위해 시장을 돌아다니며 물건 흥정도 해보고 밥도 사먹고, 차도 사먹어 보았다. 얼굴과 목소리 모두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난 왜 이렇게 뭘 배우건 다 잘하는 걸까? 원래 천재이기 때문이겠지?’
기수는 건량을 사서 봇짐에 넣고 청주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는 경공술로 달리고, 배고파지면 마을을 찾아 들어가서 제일 맛있는 걸로 마음껏 사먹고 하다 보니 하루만에 산동으로 접어들었다.
기수는 황금뿐만 아니라 무공에도 슬쩍 흥미가 동했다.
그 보물지도의 장소에 어떤 무공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천하를 차지할 정도라면 진짜 수준 높은 최고의 무공일 게 분명했다.
지금 자신의 몸 안엔 두 개의 내공이 공존하며 능력을 80%로 제한시키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내공을 더욱 증진시킨다면 같은 80%라고 해도 훨씬 더 고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제 3의 무공이 지금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있었다.
기수는 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마침내 그는 낙양을 출발한지 나흘째 되는 날 청주에 도착했다.
청주는 제남에 비하면 큰 성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약선문의 존재가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다.
하늘색 바탕에 소매와 옷깃이 짙은 파란색으로 된 도복 입은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띄었고, 그들을 따라가다 보니 거대한 장원에 도달하게 되었다.
“우와! 완전히 궁궐이네.”
약을 파는 쪽 입구로는 드나드는 사람도 굉장히 많았다.
기수가 청주까지 온 것은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대충 집 밖을 감시하다가 기회가 오면 들어가서 찾아보자 정도로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와보니 약선문의 문파 규모는 장난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손님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이고, 야밤에 담을 넘는다면 경비 서는 제자들과 일대 격전을 각오해야 할 것이었다.
기수는 혹시 약선문의 제자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상춘관에서 배운 기본 지식이 있으니까 약 만드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으로 슬쩍 약방으로 들어가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계획은 포기해야 했다.
약재상 안에 청회색 도복을 입고 두건을 쓴 소년들이 가득했다.
옷의 색깔이 다른 걸 보니 정식 제자가 아니고, 장차 정식 제자로 받아준다는 미명하에 미성년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현장이 분명했다.
‘쟤네들은 시급을 얼마나 받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어쨌거나 제자로 들어가는 방법은 경쟁도 너무 심하고 시간도 너무 많이 걸려서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노동력 착취당하는 건 상춘관 시절로 충분했다.
근처 객잔에 자리를 잡은 기수는 고민에 빠졌다.
지도의 나머지 4분의 3이 이곳에 있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어디에 어떻게 숨겨져 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상황.
하지만 포기하기엔 유혹이 너무 컸다.
자기를 이곳에 데려온 존재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정의를 위한답시고 무림맹 편에 서서 싸우거나, 혹은 그 반대로 무림을 통일하겠다고 마교 편에 서서 싸우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대한독립이라면 또 모를까 중원의 평화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비단옷, 맛있는 음식, 예쁜 시녀들이라면 강한 욕구가 생겼다.
그게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때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라든지, 무림맹 편이 될까 마교 편이 될까 고민하며 동전을 던졌을 때 세운 것이라든지, 자기를 여기 데려온 존재는 목숨을 잃게 되었거나 뭔가 아주 중요한 선택을 할 때는 개입을 하니까 보물찾기가 잘못된 일이라면 분명 뭔가 제지를 할 것이었다.
기수는 시험 삼아 동전을 하나 꺼냈다.
‘만약 내가 벼락부자 되는 걸 원치 않는다면 앞면, 되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면 뒷면, 그리고 꼭 찾아야 한다면 동전의 세워주시오.’
살짝 반말로 생각하면서 엄지를 튕겼다.
탁자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동전을 보며 기수는 속으로 빌었다.
‘뒷면 나와라! 뒷면!’
그러나 놀랍게도 동전은 다시 선 채로 멈추었다.
기수는 어이가 없었다.
기수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려보았다.
동전은 힘없이 쓰러졌다. 무슨 끈끈한 데 달라붙었거나 틈에 낀 게 아니었다.
“아 놔…. 신까지 내가 벼락부자가 되기를 바라네.”
원한다면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기수는 일단 밤이 깊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약선문 담 밖의 나무들 사이를 점프하면서 장원을 빙 둘러 한 바퀴 돌아보았다.
워낙 커서 무슨 마을 같았다.
대략적인 구조를 보니까 정중앙에 자리잡은 본채에서 고수의 기운이 느껴졌다.
‘의외군. 저 정도면 꽤 센 건데?’
독과 약뿐만 아니라 무공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담 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잔으로 돌아온 기수는 일단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 점소이를 불러 물었다.
“약선문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을까?”
점소이는 기수의 차림새와 허리에 찬 칼을 보고 대답했다.
“무사를 모집하는 것 같던데 한 번 지원해보십시오. 실력만 있다면 아주 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무사를 모집한다고?”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렇습니다. 장원 서쪽 문으로 들어가면 담당하는 제자가 있을 겁니다.”
“아! 장차 무림맹과 마교가 격돌할 것에 대비하는 것이로군. 약선문은 어느 쪽 편을 들기로 했지?”
그러자 점소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약선문은 다치는 사람 편이죠. 무림맹에서 여러 번 초청을 했지만 응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
어느 편도 들지 않을 거라면서 무사는 왜 모은단 말인가?
어쨌거나 점소이와의 대화 한 번으로 잠입할 방법을 찾아냈으니 다행스런 일이었다.
기수는 그 점소이에게 후한 팁을 주었다.
그리고 곧 짐을 정리해서 장원의 서쪽으로 돌아갔다.
무사 선발이라면 현재의 기수 입장에선 얼마까지 약한 척을 해야 하느냐의 문제일 뿐 걱정될 건 하나도 없었다.
문으로 가자 봉을 든 제자들이 길을 막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무사를 모집한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10분 정도 지나자 안에서 덩치 큰 남자가 나왔다.
그는 키가 거의 190cm는 될 것 같은 거구인데다 인상도 험상궂었다.
기수를 위아래로 훑어본 그가 기수를 안으로 안내했다.
청석판이 깔린 마당에 들어서자 그가 물었다.
“어느 문파 출신이지?”
“그러니까, 그게…. 대파산 상춘관이라고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아니, 못들어봤는데.”
“거기 출신입니다.”
“좋아. 뭐 싸움은 이름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칼을 쓰나?”
“그렇습니다.”
“그럼 딱 10초식 펼칠 기회를 줄 테니까 나를 베어 봐.”
기수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씨발아. 단 1초면 넌 몸과 목이 분리될 거다.’
얼만큼 실력을 노출해야 될지 몰라서 일단 칼을 뽑아 기수식으로 예를 취한 후 아무렇게나 서너번 휘둘러주었다.
“하하하!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거구의 사내는 의외로 몸놀림이 민첩했다. 중상급 고수는 되어 보였다.
그래서 기수도 좀 더 스피드를 올렸다.
사내는 살짝 당황하는 빛을 보였다. 기수는 다시 속도를 줄여야 했다.
“10초! 여기까지!”
사내가 황급히 물러서며 외쳤다.
기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칼을 거두었다.
거한이 씩 웃으며 말했다.
“합격!”
기수는 기뻤다.
‘역시 실력이 있으면 어디에서건 대접을 받는군.’
간단히 약선문의 일원이 되는데 성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