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uble engraving RAW novel - Chapter 21
Epilogue
볼이 통통한 아기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아직 실감은 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들의 아기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아기가 태어난다 해도 실감나지 않는 건 마찬가지일 것 같지만. 그래도 이긴은 아기를 유심히 살폈다.
엄마 품에 안겨 상점에 온 아기는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더니 지금은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딱 봐도 곧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라 아기의 부모는 허둥지둥 달랠 준비를 했다. 둥개둥개 어르고 관심을 돌리기 위해 작은 인형을 흔들고. 부모의 노력에 눈이 동그래져선 까르르 웃던 것도 잠시.
으아앙!
아기는 결국 울음보를 터뜨렸다. 있는 힘껏 울어대는 아기의 울음소리는 흡사 사이렌을 닮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당황한 아기 부모는 결국 쏜살같이 짐을 챙겨 나가버렸다. 창문 너머 언제 울었냐는 듯 눈물을 멈추고 두리번거리는 아기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해가 비치니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흐음.
이긴은 가만히 턱을 쓸었다.
꽤 변덕스럽네.
도우가 들으면 아기의 울음은 어른의 언어와 같다고, 변덕스러운 게 아니라 표현을 못해서 그런 거라고 열변을 토하겠지만 솔직한 감상이 그랬다. 그래도 마냥 시끄럽게 들리진 않았다. 이긴에게 아기 울음소리는 소음에 불과했다. 그것도 매우 거슬리는 소음. 그런데 지금은 우는 아기가 귀엽게도 보이니 신기할 따름이다.
“고객님, 포장 모두 마쳤습니다.”
이긴이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점원이 헐레벌떡 쇼핑백 꾸러미를 내밀었다. 베이비핑크색 토끼 인형을 비롯한 아기 장난감이었다. 환한 얼굴로 그것들을 받아들고 집으로 향했다. 운전하는 동안 차창 밖으로 유난히 어린 아이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갑자기 아이들의 수가 늘어나진 않았을 테고.
‘이건 뭐.’
거의 개안한 수준 아닌가. 하긴 새롭게 보이는 게 아기뿐이겠느냐마는. 단적인 예가 도우였다. 그녀를 만나기 전, 오메가들은 그에게 평생 몰라도 됐을 것들이었다. 있는 줄은 알았으되 저와 상관없는 것들. 지금은 도우를 모르고 어떻게 살았을까 싶지만.
태어날 아기도 그렇겠지.
한동안 정신없이 휩쓸리다가 뒤돌아보면 어느 순간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을 거라고. 분명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지만 또한 설레는 일이라, 기대감에 들떠 가속 페달을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
‘왜 그랬을까.’
아직은 이렇다 할 변화가 없는 배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도우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얼굴도 한 번 못 봤어도 벌써부터 이렇게나 애틋한데, 어째서…… 그녀의 부모는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골수까지 빨아 먹으려 들었을까.
처음부터, 이안을 만난 것부터가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세뇌 당했다지만 거절 못하고 끌려 다니고, 이안에게 손을 벌리고, 그래서 누울 자리를 마련해준 그녀 때문인지도. 그렇다한들 엄마도, 아빠도, 하나같이 너무 했다는 느낌을 지우진 못했다. 욕심 부리지 않고 만족했더라면 분명 오순도순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그녀의 약점이 되어 이안이 뒤흔들 빌미가 되지도 않았을 텐데. 어째서 그리도 그악스레 굴었는지.
정말이지 아무리 궁리해 봐도 알 수 없었다.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납득은커녕 화만 치밀었다. 세뇌 때문에 그간 꾹꾹 억눌러 놓았다가 뒤늦게 폭발적으로 찾아온 감정의 소용돌이에 도우는 여지없이 휘말렸다. 이안은 세상에 없고 부모와는 아예 인연을 끊었기에 퍼부을 곳 없는 분노는 갈무리 되지 못하고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탈진할 정도로 우는 건 임신으로 널뛰는 호르몬을 감안하더라도 정도가 심했다. 보다 못해 이긴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꽃을 만지고 있으면 그저 행복해하는 도우에게 적합한 해결책이었다. 정후가 집으로 개인레슨을 오게 된 이유였다.
과연, 플라워레슨을 생각하자 조금 전까지 그녀를 사로잡았던 부정적인 감정은 저 멀리 사라지고 잔잔한 즐거움이 차올랐다.
‘이것만 마저 끝내야지.’
정후가 오기 전까지 테라리움 하나를 완성시킬 작정이었다. 이파리를 쳐내고 줄기를 인위적으로 비틀고, 끝내는 시들고 마는 절화보다는 생명력을 지닌 자연 그 자체의 식물이 좋아서, 요즘 푹 빠진 작업이었다. 투명하고 예쁜 유리병 안, 물기를 머금은 생생한 초록 잎을 보고 있자면 이긴의 페로몬에 섞여 있는 상록수 숲이 떠올라 흐뭇했다.
막 핀셋으로 이끼를 집어 매화 분재의 뿌리에 조심스레 얹었을 때, 벨 소리가 울렸다. 현관으로 마중 나가자 너른 마당을 가로질러 오며 정후가 감탄했다.
“와, 집 좋네요.”
“그렇죠?”
이사 오고서는 첫 수업이었다. 그런 만큼 집 구경은 필수였다. 집들이 선물로 앙증맞은 아기별꽃 화분을 내민 정후가 연신 두리번거리며 놀라워했다.
“이사하느라 힘들었겠어요. 홑몸도 아닌데.”
“아…….”
정후의 우려와 달리, 도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물론 도우도 처음에는 정후와 마찬가지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학생 시절, 이골이 날 정도로 이사를 많이 다녀서 더욱 그랬다.
이사 날 앞뒤로는 며칠씩 날밤을 샜었다. 일곱 식구 짐 옮기고 정리하는 것만 한참이었다. 찢어지는 집구석, 없는 살림에 무어 그리 바리바리 싸놓을 게 많은지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욕심 많은 그녀의 부모가 자질구레한 것 하나까지 놓지 않고 챙긴 결과였다. 오죽하면 쓰레기통 속 쓰레기까지 고스란히 이사 다녔을까.
그러니 속이 탈 밖에. 이긴의 서재에 있는 책들만 해도 한 트럭이었다. 나머지 살림도 마찬가지로 사람은 달랑 둘이지만 규모부터가 달라서 걱정이었는데 이긴은 그저 평온했다. 도우가 운이라도 뗄라치면 신경 쓸 것 없다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신경을 어떻게 안 쓰지.
도우는 갸웃했다.
포장이사, 뭐 그런 건가?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남이 다 옮겨준다 해도 귀중품도 챙겨야 하고, 고가의 가구는 험하게 다루지 않도록 잘 지켜봐야 하는데. 또 뒷정리도 다시 한 번 해야 하고. 한데 이삿날 아침까지도 이긴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느긋하게 그녀에게 토스트를 구워주고 본인은 커피를 내려 천천히 마시며 이메일을 확인했다. 기다리다 못한 도우가 재촉했다.“이사, 언제가요?”
“지금 갈까?”싱긋 웃은 이긴이 차키를 집어 들었다. 얼떨떨한 채 따라나섰더니 예쁜 정원과 수영장까지 갖춘 단독주택이 그들을 맞았다. 내부에는 이미 살림살이가 싹 갖춰져 있었다. 도우는 말 그대로 몸만 왔다. 꼭 홀린 것 같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좋아?”
“요술 방망이 같아요…….”금 나와라 뚝딱! 하면 금이 나오고, 은 나와라 뚝딱! 하면 은이 나오는 도깨비의 요술 방망이. 집 나와라 뚝딱! 한 것 같다는 도우의 말에 이긴이 능글맞게 웃었다.“더 좋은 방망이가 있는데.”슬쩍 비벼오는 엉덩이에 단단한 것이 느껴졌더랬다.
‘앗.’
이쯤에서 정후를 의식한 도우는 회상을 멈췄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아기 방이었다. 분홍색 벽지, 분홍색 커튼이 달린 아기 침대, 분홍색 아기 옷, 분홍색 곰 인형, 분홍색 목마, 분홍색 장난감, 분홍색 딸랑이……, 온통 분홍색으로 가득한 방에 정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이구나. 축하해요.”
“아니, 아니에요.”
도우는 얼른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직, 성별은 몰라요.”
“어……분홍색이 예쁘긴 하죠.”
다시 한 번 안을 확인한 정후가 뭐라 더 말하지 못하고 멋쩍게 웃었다. 도우도 따라 미소 지으려 했지만, 어찌된 게 민망한 기색만 두드러졌다. 노련한 정후가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를 틀었다.
“이제 수업하러 갈까요?”
“좋아요.”
냉큼 대답하곤 거실로 정후를 안내하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열린 방문마저 연한 분홍색이었다. 집안의 다른 문들은 모두 흰색이건만.
아기 방에 관한 건 도우로서도 난처한 일이었다. 정확히 얘기하면 아기의 성별이겠지만.
입버릇처럼 그녀를 닮은 딸이면 더 바랄 게 없다는 이긴에게 도우는 얼마 전 찬물을 끼얹었다.“저 닮은 건 싫어요.”
“나 닮는 것보단 나을걸.”
“아니요.”도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보였다.“오메가인 건 저 하나로도 충분해요.”
“왜.”몰라서 묻나?“그야 무시도 당할,”
“어떤 개씨발새끼가.”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긴이 이를 갈았다. 아기가 들을라. 눈을 흘기며 마치 귀를 가리듯 두 손을 오목하게 모아 배의 양옆을 가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가 픽 웃었지만, 도우는 시종 엄숙한 태도로 앞날을 알렸다.“그리고……, 남자아이일 거예요.”정신을 잃었던 동안 꾸었던 꿈속 아이가 자신을 엄마라고 불렀다는 얘기까지 마쳤을 때, 이긴의 입술은 모양 좋게 휘어져있었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도우가 다 서운하게 느껴질 정도의 반응이었다. 설령 아들이라 하더라도 싫을 건 뭔가. 사실 도우는 딸이어도 아들이어도 상관없이 좋았다. 다만 정신을 잃고 헤맸을 때 제게 찾아와준 아이가 사내아이여서 응당 그러려니 하고 있던 차였는데…….“그러니까…….”
“싫어.”단호한 부정에 도우는 적잖이 충격받았다.“왜, 왜요?”
“너 닮은 딸이 좋으니까.”저를 닮은 아들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말에도 이긴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꿈은 꿈일 뿐이라며 그녀의 예견을 부인하듯 아기용품을 사들였다. 분명 도우를 닮은 딸이 나와서 분홍 솜사탕 냄새가 날 거라며 온통 핑크빛으로 꾸미는 중이었다.
이긴의 말처럼 정말 솜사탕 단내가 나는 듯도 해, 도우는 완전히 분홍색에 질려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정후가 가져온 파란 수국이 매우 반가웠다. 설탕물에 절여졌던 눈을 시원하게 씻는 기분이랄까.
“정말 예뻐요. 어쩜 이렇게 탐스러울까요?”
싱그러운 수국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도우를 보며 정후가 마주 웃은 순간, 양손에 아기 용품을 한가득 든 이긴이 들어섰다. 이미 아기 용품으로 발들일 곳이 없는데 뭘 또 저렇게 사왔는지 궁금해 하기도 전에 정후를 발견한 이긴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안녕하세요, 강습 요일이 바뀌었어요.”
“그렇습니까. 수고하십시오.”
찬바람이 쌩하니 일어, 보고 있는 도우가 다 무안할 지경이었다. 막상 플라워 강습을 다시 시작하도록 부추긴 건 이긴이지만, 정후에게 받겠다고 하자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던 걸 안다. 그렇다 해도 이제 끝난 얘기를 뭘 저렇게까지 구나 싶어 속이 상했다. 정후가 오죽 불편할까 싶어 사과하자 뜻밖에 부드러운 미소가 돌아왔다.
“부러운데요.”
“네?”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전 좋은데요. 도우씨 많이 아끼는 거 보여서. 안심된다고나 할까요.”
“아…….”
“도우씨 좋아보여서 다행이에요. 솔직히 그전엔…….”
꺼내놓고 아차 싶었는지 정후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도우는 그러지 않았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확인받고 싶은 말도 있는 법이니까.
“그전엔 어땠는데요?”
“위태로워 보였어요. 어디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부평초처럼.”
“…….”
도우는 침묵함으로써 정후의 말을 긍정했다. 따지고 보면 플라워 강습을 등록하게 된 계기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안정적인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지만, 아슬아슬한 제 처지가 못내 불안해서.
“지금은 저 나무 같아요.”
정후가 마당의 나무를 가리켰다. 뿌리가 잘 내린 묘목이었다.
“고마워요.”
정후의 말이 맞았다.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곧게 선 나무처럼 도우 역시 난생처음 진정한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정서적 지지, 깊은 교감, 부족함 없는 생활……. 모두 이긴 덕분이라는 걸 떠올리자 어쩐지 목이 메어 간신히 대답했다. 이후로는 별 대화 없이 작업에 몰두했다.
섬세하게 꽃을 다루는 도우를 보며 정후는 이긴을 떠올렸다. 개인 레슨을 부탁하기 위해 도우가 연락한 직후에 이긴이 먼저 그를 찾아왔었다. 그동안은 도우와 함께 있는 모습만 봐서 잘 몰랐는데, 둘만 있게 되자 피부에 와 닿는 위압감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정후에게 이긴이 대뜸 물었다.“손톱이 자주 부러지던데.”뭐라고 대답했더라.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지만, 저도 모르게 스스로를 열심히 변호하려고 했던 마음만은 생생하다.“아무튼 주의하라고.”
“네?”
“숟가락 드는 것도 조마조마하니까.”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그가 가고 나서야 겨우 앞뒤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숟가락 드는 것도 조마조마하다는 남자니 질투심이 남다른 것도 당연하다.
‘얘기해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수국을 메인 소재로 만든 꽃다발 하나가 완성됐다.
“다음에도 파란 꽃 하고 싶어요.”
“음, 그럼 수레국화 어때요?”
“좋아요.”
손뼉까지 치며 기뻐하는 그녀를 향해 정후도 마주 활짝 웃어주었다. 한때 짝사랑했던 여자, 도우는 표정이 풍부한 편이었다. 그래서 무얼 감추려는지 헐렁한 옷차림과 구부정한 어깨, 얼굴을 가리는 덥수룩한 앞머리와 두꺼운 안경에도 자꾸만 그녀에게 눈길이 갔다.
지금, 허리를 곧게 펴고 눈을 반짝이며 수줍게 미소 짓는 도우는 설탕을 녹여 빚어놓은 인형처럼 눈이 부셨다. 따지고 보면 페로몬의 작용이란 서로 다른 극의 자석을 끌어당기는 것과 같아서, 같은 극인 오메가끼리는 끌릴 확률이 희박한데도 정후는 그녀에게 속절없이 끌렸다. 이긴이 질투하는 이유도 쉽게 납득이 갔다. 같은 오메가가 봐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오죽할까 싶어서. 그래서 불쑥 말해버렸다.
“제가 싫은 게 아니라, 질투하는 거예요. 도우 씨 아껴서.”
“네?”
눈만 깜박이던 도우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그런…….”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모르겠으면 거울을 보라고 말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더 사담을 나누었다간 뒤통수가 뚫어질 것 같았으니까. 2층 난간에서 저를 노려보고 있는 이긴이 거실 창으로 훤히 비쳤다. 노골적인 눈빛에는 강습 끝났으면 어서 꺼지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결국 없는 핑계까지 댔다.
“전 이만 다음 강습하러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얼른 가보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도우가 가는 길에 요기할 것들을 챙겨주면서 순진하게 등을 떠밀었다.***부리나케 튀어 들어왔더니 플라워 강습이 있는 날인 줄은 몰랐다. 이긴은 살기를 담아 정후를 꼬나봤다. 감히 제게 비벼볼 상대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하찮을수록 성가신 법이니까.
‘뭐가 문제지.’
이긴은 들끓는 속을 재우기 위해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일단.’
좆이 달린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것으로 게임 끝이었다. 그러니 대강 하고 꺼지라는 무언의 사인을 보낼 수밖에. 그래도 도우가 웃는 것 하나는 보기 좋았다. 무어 대단한 인물이라고 도우가 놈을 현관까지 배웅하는 걸 참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거 봐요, 선생님이 선물로 주셨어요. 아기별꽃, 예쁘죠?”
물이 통통하게 오른 꽃봉오리가 올망졸망 모여 있었다. 전에는 활짝 핀 꽃이 좋았는데 요즘은 봉오리가 더 좋다며, 아기를 닮아서 그런 것 같다는 설명에 슬쩍 입꼬리가 들렸다.
뭐 그런 귀여운 이유가 다 있나.
굳어 있던 이긴의 표정이 풀리자 도우는 조금 더 대담해지기로 했다. 그의 질투가 심하다는 정후의 말에 긴가민가했던 까닭이 있었다. 아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여주는 것과 별개로, 요즘의 그는 조금 쌀쌀맞았다. 그게 저만의 착각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기 선물 사온 거, 같이 봐요.”
그의 널찍한 가슴에 기댄 도우가 이마를 비비적댔다. 앞머리가 가볍게 살랑이며 그의 빗장뼈를 간질였다. 이긴이 그녀의 머리카락 감촉을 좋아하는 데서 착안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긴은 그녀를 부드럽게 밀어내고 냉장고로 향했다.
“마실 것 줄까?”
“……아니요.”
도우는 힘없이 대답했다. 언제인가부터 이긴은 그녀를 안고 자지 않았다. 때때로 다른 방에서 잘 때도 있었다. 혹시 제 잠버릇이 문제인가 싶어 물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아니’였다.
‘그럼 대체 뭔데.’
도우는 울고 싶어졌다. 변화가 있다면 계기 또한 있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 달라진 게 무엇인지 알아내려 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간 이런 경우는 없었기에 적잖이 당황한 것도 사실이다. 목적이 뭐였든 언제나 적극적으로 들이대던 쪽은 그였으니까. 의기소침해 있다가 그래도 노력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다가가보자고.
‘좋아……! 그런데 어떻게?’
유혹할 마음을 먹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어떻게 구애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긴은 페로몬을 이용해 그녀를 쉽게도 홀렸건만. 막상 홀리는 입장이 되자 막막해졌다. 임신 중이라 발정기가 올 리도 없고.
‘그래도.’
해본 적은 없지만 저도 페로몬을 의식적으로 풀어보기로 했다. 긴장하며 도우는 살며시 이긴의 옆에 앉았다. 눈을 맞추고 생긋이 웃으면서 속으로는 호흡마저 참아가며 단전에 온 신경을 집중해보았다. 무언가 따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되려나.
그럴 리가. 기대감도 잠시, 참았던 숨을 터뜨리자 언제 따스한 기운이 있었냐는 듯 긴장이 탁 풀어져버렸다. 어디에 신경을 집중해도 마찬가지였다. 안되는 게 당연했다. 알파 중에서도 우성만이 페로몬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그런 걸 일개 오메가인 제가 할 수 있을 리가. 하긴, 그게 그렇게 멋대로 제어할 수 있는 거였음 페로몬의 노예가 되는 일도 없었겠지.
저조한 기분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굳은 표정으로 일어나 욕실로 향한 이긴 때문에 더욱 가라앉았다. 말과 행동은 다정하게 꾸밀 수 있어도 생리적인 반응은 솔직한 법이다. 이제 확실히 알겠다. 그가 저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어떡하지.’
막막한 기분에 사로잡힌 도우의 눈길이 이긴이 지나간 자리를 씁쓸하게 더듬었다.‘미친 새끼.’
여지없이 일어선 페니스에 이긴은 스스로를 향해 욕설을 짓씹었다. 시작은 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 것 같다는 도우의 말 때문이었다. 워낙 마른 몸이라 그의 눈에 별반 다를 건 없었지만 그 안에서 꼬물거리고 있을 아기를 생각하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도우와 아기를 지켜내고 싶다는 의지가 솟구쳤다. 때문에 임신 초기에는 관계를 조심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이긴은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가뜩이나 가냘픈 몸인데 이안의 차에서 굴러 떨어지기까지 했으니, 조금이라도 그녀의 몸에 무리가 갈만한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눈치 없이 구는 제 분신이었다.
지금도 봐라.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우가 가쁜 숨을 터트리자마자 벌떡 일어서지 않았는가. 어디고 펄떡펄떡 뛰는가 싶더니 뻐근할 정도로 대가리를 세우고 있는 하초에 한숨이 나왔다. 그동안 발정 난 짐승이라고 오메가를 멸시했는데 정작 발정난 개새끼가 저였다.
“후으…….”
쉽사리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아, 하는 수없이 이긴은 제 남성을 달래주기로 했다. 밤마다 곤란하게 서버려선 동침도 막아버리는 분신이니, 짜증스런 마음에 손길은 자연스레 무성의해졌다. 뿔처럼 곧게 선 살기둥이 여전히 고고한 건 당연했다.
“으음.”
수월한 사정을 위해 이긴은 도우를 떠올렸다. 요즈음의 도우는 물오른 복숭아처럼 탐스러웠다. 앞으로 더더욱 무르익겠지. 만삭에 이르러 한껏 부푼 배를 하고 뒤뚱거리는 귀여운 모습을 상상하자 참을 수 없이 사정감이 치밀었다.
탁탁탁탁!
“큿……!”
외설적인 마찰음과 함께 한차례 정액이 쏘아졌을 때, 마땅히 들어야할 쾌감의 여운대신 싸늘한 한기가 그의 등줄기를 스쳤다. 분명 문단속을 했던 것 같은데 욕실 문이 열려있다. 아니, 보지는 못했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었다. 이긴은 천천히 뒤돌아 제 감이 맞는지 확인했다. 그러다 빼꼼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도우였다.
“뭐……하는 거예요?”
서러운 눈으로 흘깃거리고 있는 그녀를 본 순간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왜 울고 있는데.
여전히 기립해있는 분신은 의식도 못하고 성큼성큼 도우에게 다가갔다. 몇 걸음 사이에 그녀가 울고 있는 이유를 나름 짐작해보려 애썼다. 다쳤거나, 또 금수만도 못한 부모를 떠올렸거나, 혹은 배 속의 아기가…….
마지막 가정은 끝내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물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자각은 조금도 없었다. 때문에 도우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기 위해 자세를 낮춰 물었을 때,
“무슨 일이야.”
“왜, 안 안아줘요?”
“…….”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러다 애정을 갈구하는 눈물 젖은 낯에 등골이 저릿하게 울렸다.
“왜긴 왜야.”
배 속을 긁어 올리는 것 같은 게 도무지 제 목소리 같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이긴이 낮게 협박했다.
“조심하라는 주치의 말도 못 들었어?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데.”
“아…….”
무슨 오해를 하고 있던 건지 탄식과 함께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발긋한 눈가를 하고 도우가 속삭였다.
“살살하면 괜찮대요.”
이게 또 사람을 홀리지.
혀를 차며 이긴이 부러 무뚝뚝하게 잘라냈다. 안 그러면 제어할 자신이 없어서.
“살살이 어떻게 하면 살살인데.”
“…….”
“그딴 거 몰라.”
음? 흉악하게 채근하며 달려들었다. 밥공기를 엎어놓은 것처럼 둥그런 가슴을 탐욕스럽게 베어 물었다. 몇 주간의 금욕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후회는 없었다. 손가락 사이사이 뿌듯하게 들어차는 살집이 환장하게 좋았다. 치미는 자극감에 도우가 다리를 비비 꼬았다.
“아, 흐……!”
“여기, 더 달아졌네.”
“무슨…….”
똑같은 살갗인데 뭐가 더 달아졌다는 건지. 알 수 없어 도리질 치면서도 게걸스럽게 탐하는 그가 몹시도 반가웠다.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찔끔 맺힐 정도로.
“또 왜 울어. 네가 홀려놓고.”
“그게…….”
제게 질려버린 줄 알았다는 도우의 말에 이긴은 코웃음 쳤다. 그녀의 가슴을 뿌듯하게 쥐어짜며 보란 듯 흔들었다. 야들야들한 가슴이 탄력 있게 찰랑대는 모습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쏘아보던 그가 욕설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이런데 어떻게 질려.”
어느덧 바짝 기립한 기둥의 끄트머리가 도우의 윗배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순순히 벌어지는 그녀의 양다리를 모은 이긴이 허벅지 사이로 쑥 진입했다. 예민한 정점을 스치는 느낌에 도우는 헉, 숨을 들이켰다.
“이거야 원.”
곤란하다면서도 전혀 곤란하지 않은 얼굴로 이긴이 짓궂게 놀려댔다. 희롱하기 딱 좋을 정도로 풀어낸 페로몬은 덤이었다.
“이젠 넣어 주지 않아도 가네.”
“으응, 아……, 앙!”
길쭉하게 음순에 끼워진 굵다란 기둥이 앞뒤로 오가며 묵직하게 문지르는 기분이 색달랐다. 언젠가 이긴의 앞에서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위하던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페로몬에 자극받은 안쪽에서 울컥울컥 점성 있는 애액을 쏘아 보냈다. 이긴의 움직임도 점차 빨라졌다.
“앙, 아아앙, 흣, 으응!”
귀두가 정점을 툭 치고 지나가면 이어 묵직한 살덩이가 자극으로 부풀어 오른 살점을 끊임없이 짓뭉갰다. 꽉 오므린 그녀의 다리 사이를 힘차게 들고 나는 선단의 끝도 어느 덧 미끌미끌한 점액으로 덮여있었다. 자꾸만 힘이 풀리는 허벅지에 힘을 주자 야릇한 느낌이 골반 전체로 퍼져나갔다. 믿을 수 없게도 그대로 절정이었다.
“아, 아아……!”
따스하고 말간 액이 허벅지에 퍼졌다. 동시에 어린아이 주먹만 한 귀두의 끝이 움칠 튀는 걸 발견한 도우가 자세를 바꾸어 앉았다. 그러곤 이긴이 말릴 새도 없이 우윳빛 정액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끄트머리를 입에 담았다.
“지금, 크흣…….”
혀끝을 발름거리는 구멍에 대고 힘주어 누르자 뜨뜻미지근한 정액이 왈칵왈칵 쏟아져 들어왔다. 아랫배에서 긁어 올린 듯한 신음이 그의 앙다문 입술을 비집고 길게도 흘러나왔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쪽, 소리 내어 빨아들이자 이긴은 진심으로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잘도…….”
요망하게 굴지.
생략된 책망은 눈치껏 알아들었다. 이긴은 임신부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다며 후회했지만 정작 도우는 아무렇지 않았다. 함께 느껴서 좋기만 했다. 한편으론 혼자 참아왔던 그에게 무척 고마웠다.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애태웠던 시간은 좀 아쉽지만.
다시는 홀로 잠자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도우가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보드라운 잔머리가 쇄골을 간질이자 아까와 달리 이긴이 부드럽게 웃었다. 머리카락이 스치기만 해도 발기하는 미친놈이라고 자조하며. 그런 그에게 안도하면서도 궁금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왜 좋아요?”
“이유가 어디 있어. 네가 사내 새끼인 줄 알았을 때도 눈깔이 돌았는데.”
아아.
난생 처음 맛보는 충만함에 휩싸여 도우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나…….’
온전히 사랑받고 있구나.
깨달음과 동시에 그의 사랑이 가슴속 깊이 아로새겨졌다. 너른 품에 안겨 안온하게 잠들었다. 뜨거운 입맞춤이 낙인처럼 떨어졌다. 가슴이 탁 트이는 설원에 달콤한 바람이 불었다. 겨울 숲, 작은 꽃 한 송이 봉오리를 틔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