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088
01091 1091화
그래도 태수에게 몇 마디가 들려왔다.
처음 보자마자 믿는다?
웃기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태수의 표정이 변한 건 아니다. 가끔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정도였다.
그 미소에 시선을 마주한 의료진들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백인 의사 한 명이 태수에게 다가왔다.
당당한 발걸음, 쫙 펴진 어깨.
가운을 입은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걸 보니 레지던트 고년차 같았다.
곧 태수 앞에 다가온 그가 대수롭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병원에 정식으로 소속된 의사가 아니라 조금은 경계하는 눈초리도 보였다.
그런 그가 먼저 태수에게 말을 건넸다.
“실례합니다만, 처음 뵙는 분 같은데요.”
“최태수입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아, 외과에서…….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태수가 손을 내밀자 그는 살짝 어색한 얼굴로 일단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와일러고, 응급의학과 레지던트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호출 의사 리스트에 올라갔던데요.”
“외과, 흉부외과 질환을 다룰 수 있습니다.”
“네?”
와일러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외과면 외과고, 흉부외과면 흉부외과라고 할 터였다. 그 두가지 의과를 같이 이야기하는 경우를 처음 경험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태수가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출 리스트에 대략 적혀 있지 않습니까?”
“오타인 줄 알았는데요. 가끔 그런 실수가 있으니까요.”
“이번에는 실수가 아닐 겁니다.”
“호출 레벨이 상당히 높던데, 실력도 그만큼…….”
아무리 직설적인 질문을 건네는 게 익숙하더라도 조금 조심스러운 부분인 것 같았다.
그러나 태수는 개의치 않았다.
“최선을 다할 뿐이죠.”
“아, 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별로 할 게 없으실 텐데요. 호출을 할 정도로 응급한 환자도 없고요.”
“앞으로 계속 오갈 곳이라 둘러보러 왔습니다. 이렇게 인사도 드리고요.”
“네, 뭐, 그렇죠.”
와일러가 어색한 얼굴로 대답할 때였다.
벌컥, 벌컥.
응급실 문이 벌컥 열리며 응급 환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여기 환자 좀 봐 주세요!”
“다리에 못이 박혔습니다!”
여느 응급실과 같이 금세 소란스럽게 변했다.
와일러를 찾는 소리도 들렸다.
“와일러, 저쪽으로 가!”
“갑니다! 그럼.”
와일러는 양해를 구하며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태수는 바로 달려가지 않았다.
여기도 한국 의료 시스템과 비슷한 점이 많은 탓이다.
레지던트가 1차로 환자를 확인하고, 자신의 역량에서 벗어나는 환자는 전문의를 긴급 호출한다.
그런 시스템이 굳혀진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비용 때문이었다.
전문의가 환자를 보게 된다면 가뜩이나 엄청난 응급실 비용이 천정부지로 솟구칠 터였다.
그리고 태수가 당장 나서야 할 정도로 응급한 환자도 보이지 않았다.
부산해진 응급실을 바라보던 태수는 자리를 옮겼다.
간호사실 옆에 있는 준비실에 도착한 그는 구비된 약과 처치 도구들을 살폈다.
“상당히 잘 갖춰져 있네.”
역시 미국에서 순위권 내에 들어가는 병원다웠다.
게다가 외국으로 수출이 금지된 신약들도 다수 보이자 솔직히 부러움도 컸다.
의사인 이상 좋은 약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게 이상했다.
태수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천천히 살펴볼 때였다.
타다닥.
그때, 태수의 옆으로 백인 간호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닥터 최, 이쪽 좀 봐 주세요!”
다급한 표정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간호사들도 태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터였다.
그들은 그런 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호출 레벨을 따져 봤을 때 적합한 의사라면 이유를 불문하고 호출했다. 그건 자신들이 책임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태수가 본 그녀의 눈빛은 전혀 달랐다. 그저 도움을 요청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부드럽던 태수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갑시다.”
바로 돌아선 간호사가 앞서자 태수가 그 뒤를 쫓았다.
안내된 방향 끝에는 커튼으로 가려 놓은 병상이 보였다. 조금 전에는 보지 못한 모습이다.
약품을 확인하는 사이 환자가 도착한 것 같았다.
그 병상을 본 순간 심상치 않은 느낌이 엄습했다.
태수의 눈빛이 더욱 굳어졌다.
하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확인이 우선이었다.
차륵!
커튼을 펄럭이며 안으로 들어간 순간이었다.
입에서 흐른 피가 시트를 적시고 있었고, 호흡이 무척이나 거칠었다.
“커억, 컥!”
숨소리에 맞춰 울컥거리는 선홍색 피.
hemoptysis(객혈)이다.
앞서 도착한 흑인 레지던트가 손을 쓰고 있지만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태수가 빠르게 환자를 훑는 사이 간호사가 상황을 이야기했다.
“교통사고…….”
“그건 나중에.”
그녀를 저지한 태수는 곧장 청진기를 귀에 꽂았다.
“비켜!”
“앗, 네.”
흑인 레지던트가 얼른 옆으로 벗어났다.
그 빈자리를 채운 태수는 청진판으로 환자의 폐와 심장 소리에 집중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갈비뼈의 손상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태수는 우선순위를 확실하게 했다.
지금 이 순간 갈비뼈보다 중요한 건 폐와 심장이다.
청진기로 소리를 듣는 데에 더 집중했다.
조심스럽게 청진판을 옮기던 태수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바로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했다.
“응급처치 키트, 드레인, glucose(포도당), hemostatic(지혈제), codeine(코데인), 혈액…….”
태수가 빠르게 필요한 걸 부르자 모두 머릿속에 담기에 바빴다.
그 후로도 몇 가지를 더 이야기한 태수가 진중하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그리고 준비된 것부터 부탁드립니다. 이자벨 간호사.”
“아, 네.”
태수가 명찰에 적힌 이름을 보고 부르자 주근깨 가득한 이자벨 간호사가 얼른 몸을 움직였다.
준비될 때까지 잠깐이라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태수는 쉴 시간이 없었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흑인 레지던트의 이름부터 확인했다.
“코엘?”
“네, 제가 코엘입니다.”
그는 다급한 상황이라 자신이 어떻게 대답하는지도 확실히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건 관계없었고 해야 할 일이 우선이었다.
“코엘, 허리띠 풀고 신발부터 벗겨요.”
“네!”
코엘이 손을 움직이자 태수도 환자의 셔츠를 풀기 시작했다. 환자의 몸을 최대한 이완시켜 혈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손을 움직이는 사이 이자벨 간호사가 들어왔다.
“우선 glucose(포도당)하고 hemostatic(지혈제), codeine(코데인)이요.”
“IV 먼저 연결합니다.”
그 말을 하며 태수는 환자의 왼팔로 시선을 돌렸다. 반팔을 입고 있어 따로 소매를 걷진 않아도 되었다.
간호사가 그사이 소독약 묻힌 거즈를 건넸다.
태수는 거즈로 소독과 동시에 IV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객혈이 멈추지 않아 환자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을 터였다. 근육 속에 혈관이 숨어들어 갔을 가능성도 높다.
옆으로 한 발자국 물러난 닥터 코엘이 태수를 의아하게 바라…… 볼 틈도 없었다.
“연결 완료.”
“벌써……?”
“hemostatic(지혈제)!”
태수가 옆으로 손을 내밀자 닥터 코엘과 마찬가지로 놀란 이자벨 간호사가 허둥거리며 주사기를 내밀었다.
태수는 바로 지혈제와 코데인을 연이어 주사했다.
하지만 코데인의 약효가 돌기 전이라 환자의 객혈은 계속되었다.
“쿨럭, 커윽!”
목에서 울컥울컥 피가 넘어왔지만 태수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많이 경험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후속 조치들이 빨리 진행될수록 좋았다.
태수는 바로 이자벨 간호사에게 물었다.
“부탁한 식염수하고 썩션은요?”
“바로 올 거예요.”
“언제 올지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
태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자벨 간호사는 재빨리 뒤로 뛰어갔다.
그사이 태수는 닥터 코엘에게 말했다.
“ECG(심전도 모니터), foley catheter(폴리카테터, 도뇨관으로도 사용).”
“지금 연결하겠습니다.”
닥터 코엘은 태수의 노련한 모습에 대답과 동시에 부리나케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닥터 코엘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태수가 그렇고 그런 파견의라고 생각했는데, 환자나 의료진 다루는 실력이 결코 범상치 않은 탓이다.
순차적으로 요청한 도구들이 도착했다.
그사이 코데인의 약효가 발휘되는지 객혈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태수는 닥터 코엘과 함께 기도 유지를 위해 입 속을 세척하고 intubation(삽관)했다. 그리고 응급처치 키트로 환자의 좌우 폐에 구멍을 내 드레인부터 설치했다.
폐가 찢어진 환자라 드레인을 타고 피가 뚝뚝 떨어졌다.
혈액을 보충해 놓고 뒷마무리까지 한 후에야 태수는 손을 놓았다.
같이 응급처치를 하던 닥터 코엘과 이자벨 간호사는 멍한 표정으로 변했다.
불과 10분 남짓에 일어난 일이다. 얼핏 처치한 내용들을 다시 떠올려 봐도 절대 그 시간에 해낼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런데도 태수는 헤매지 않고 차근차근, 그것도 빠르게 모든 걸 진행했다.
태수에 대한 소문은 헛소문이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들의 생각을 모른 채 태수는 입을 열었다.
“일단 여기까지. 닥터 코엘, 지금부터 10분 단위로 바이탈 확인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1시간 동안 여기서 경과를 본 후에 보호자 사인 받아서 SICU(흉부외과 중환자실)에 입원시키고…….”
태수는 이후 처치할 오더까지 내렸다.
객혈을 일으킬 정도로 폐가 손상된 환자였다. 그러나 태수는 무턱대고 수술을 선택하진 않았다.
소리를 들어 보고 만져 봤지만 갈비뼈가 부러지진 않았다. 금이 간 골절은 입었을지라도 갈비뼈가 폐와 심장을 찌르진 않았단 뜻이다.
그리고 처치하는 사이 출혈이 줄어들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아침까지 경과를 지켜보고 CT와 MRI 등의 검사를 해서 내부 상황을 파악한 후에 수술하는 게 옳았다.
무조건적인 수술은 없었다.
정말 수술을 필요로 하는 환자인지를 구분하는 게 중요했다.
할 일을 마친 태수는 돌아섰다.
닥터 코엘은 남아서 태수의 오더를 그대로 이행해야 했다.
환자가 SICU(흉부외과 중환자실)에 올라갈 때까지 태수는 응급실에 있을 예정이었다.
한결 한가로워진 태수의 모습을 지켜보는 간호사들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무성했던 소문이 모두 진실이 아니라는 걸 한 번의 응급처치로 확실하게 알게 된 모양이었다.
반면, 태수는 그들의 시선과 생각을 알지 못했다.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풀어내느라 바빴다.
확실히 외과 수술과는 느낌이 달랐다.
응급처치.
그걸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환자의 생사가 오간다. 그렇기에 응급 환자를 앞에 둔 그 순간은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태수가 응급실을 선호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다.
생사가 오가는 짧은 순간.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경험을 녹여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지금 또 하나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 스친 순간이었다.
찌르르.
가슴이 울렸다.
바로 이 느낌은 태수를 몇 번이고 기운 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가슴 벅찬 얼굴로 휴게실로 향하는 길에 태수의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후우! 선생님, 숨이…… 잘, 헉헉.”
얼굴이 벌게진 환자가 거친 숨을 내쉬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를 진단하고 있는 의사는 조금 전에 인사한 닥터 와일러였다.
닥터 와일러는 잠깐 생각하더니 바로 간호사에게 말했다.
“항생 주사 중에서 좀 강한 걸로.”
“여기요.”
“환자분, 좀 아픕니다.”
와일러는 나름 친절한 얼굴로 환자에게 주사했다.
태수는 잠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닥터 와일러의 실력 여부를 떠나 환자 얼굴의 홍조가 뭔가 이상한 점만 봤다. 단순 감기나 염증 반응으로는 저렇게까지 붉어질 수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며 생각하는 사이였다. 항생 주사를 맞은 환자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