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26
00127 127화
태수는 그 마음을 알기에 얼른 말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다음에, 다음에 또 같이 마시게 된다면. 그땐 이번에 못 마신 것까지 더하도록 하자고.”
닥터 제임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빛은 점점 가라앉았다.
태수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인 후에야 몸을 움직였다.
숙소로 향하는 태수의 표정이 그리 좋진 않았다.
주머니 속에 반지케이스를 만지작거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이어갔다.
한편.
닥터 제임스는 캠핑의자에 깊게 몸을 기댄 상태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태수가 가지고 있는 그 반지.
세계의사협회에서 특별히 제작한 반지다.
그리고 그걸 카프레네가 전달 받을 때 닥터 제임스도 그 자리에 있었다.
어떤 반지인지를 그만큼 잘 알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닥터 제임스는 그 후 언젠가 카프레네와 술 한잔하며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만약 이 반지가 다른 의사 손에 있다면 모르는 척하진 말아 주게.
그때 그 말.
술김에 한 말이 아니라는 건 닥터 제임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반지를 가진 의사가 카프레네의 마지막을 지켜준 사람이다.
카프레네 부인이 전달해 줬다면 카프레네의 뜻이다.
잔에 넘실거리는 술을 단숨에 털어 넣은 닥터 제임스의 눈빛이 더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하루가 지났다.
태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NGO에 있는 닥터 제임스에게 향했다.
다행히 수술이 없었는지 바로 만날 수 있었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정말 죄송합니다만, 제가 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 어제.”
태수는 차분한 얼굴로 계속 물었다.
“제가 어제 보여드린 반지가 잘못 된 겁니까?”
“그건 아니야. 뭐랄까, 갑자기 기분이 너무 안 좋아졌다고 할까. 먼저 간 평생의 친구를 떠올리니까 기분이 가라앉더군.”
“그러셨습니까?”
“미안하다고 해야겠지? 나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잔 모양인데.”
닥터 제임스가 까칠한 태수 얼굴을 바라보며 씁쓸한 사과를 건넸다.
태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좀 설치긴 했지만 괜찮습니다.”
“오늘 일어나고 보니까 어제 일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어. 먼저 부를까 했는데 마침 찾아온 거고.”
“잘 찾아온 거죠?”
“그럼.”
태수의 넉살 가득한 물음에 닥터 제임스도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휙!
방문을 대신한 커튼이 급격히 열리며 의료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박사님. 응급입니다!”
그 소리에 닥터 제임스의 푸근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벌떡.
자리를 바로 털고 일어났다.
지금 태수와 이야기 중이라는 것도 잊은 얼굴이다.
“가지.”
닥터 제임스는 그 말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태수는 잠시 고민했다.
갈까, 말까.
하지만 답을 내리기도 전에 태수도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였다.
응급이다.
그 하나만으로도 태수가 움직일 이유는 충분했다.
어느새 태수가 닥터 제임스의 옆에 바짝 따라붙어 걸었다.
힐끔 태수를 쳐다본 닥터 제임스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수술실 앞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수술에 참여할 의료진들이 대기중이었다.
의아한 건 그들이 보고 있는 모니터였다.
분명 CT와 MRI 영상이다.
어떻게?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닥터 제임스가 눈치를 채는지 가볍게 이야기했다.
“NGO 건물에 임시로 영상의학과를 만들었어. 한정적인 환자에게 사용하지만 말이야.”
“그렇군요.”
“다른 텐트에서도 이용하는데 전혀 몰랐나?”
“네. 며칠 뒤에 바로 이잠바크로 넘어가서 몰랐습니다.”
태수의 대답에 닥터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 자, 이야기는 그만하고 좀 볼까?”
환자가 응급이라는 말을 떠올렸는지 닥터 제임스는 시선을 돌려 각종 검사 영상에 집중했다.
태수도 옆에서 같이 검사 결과를 살폈다.
오랜만에 보는 CT와 MRI 사진이 낯설기까지 했다.
카프레네의 경험에 의해 환자의 병명을 찾아가는 편과 과정 자체가 달랐다.
허나 태수는 어색하면서도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환자의 속이 어떤 상태인지 고민하고 유추하는 것보다야 직접 이렇게 보는 게 너무도 좋았다.
세삼 현대 의학기술과 편의성에 감탄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건 잠깐 뿐이다.
위급한 환자라고 했으니 어떤 상황인지부터 제대로 살펴야 했다.
수술을 집도할 것도, 그렇다고 수술실에 들어갈 수 있는 지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직업병이라도 해도 좋을 만큼 태수는 환자부터 살피는 게 익숙해져 있었다.
검사 결과를 차분히 살펴보던 태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만큼 환자 상태는 심각했다.
그때 닥터 제임스에게 환자 상태를 보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 네 군데 총상을 입었습니다. 그로 인해…….”
이어지는 의학 용어에 태수는 귀를 기울였다.
Enthlasis(머리뼈함요분쇄골절 혹은 두개골함요분쇄골절).
Left rupture of lung(왼쪽폐파열).
Enterorrhexis(장파열).
듣기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다.
그때 이어지는 보고에 태수의 귀가 쫑긋거렸다.
“……천운으로 주요 혈관 손상이 없습니다.”
“그럼 blood loss가 거의 없다고?”
“그건 아닙니다만, 파견 병원에서 1차 응급 조치, 헬기로 이동까지 합쳐 3시간 가까이 지났지만 혈액보존량이나 심장 박동도 양호합니다.”
의료진의 보고에 닥터 제임스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이런 상처를 입었는데도 수술해도 될 정도라면 이 환자, 평생의 운을 여기다가 다 쓴 거 같은데?”
“그렇겠죠?”
“상태 보니까 나 혼자는 무리겠는데, 집도할 의사들 호출은?”
닥터 제임스가 묻자 의료진이 빠르게 대답했다.
“머리를 담당할 Orthopedist(정형외과 의사)로 닥터 막스밀리언, 폐를 담당할 써전으로 닥터 오즈마가 30분 내로 도착한다고 했습니다.”
“30분?”
“외부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먼저 시작하시면 늦지 않게 도착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내가 장을 맡아야겠군.”
닥터 제임스의 말에 보고하던 의료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수술을 하신 터라 부탁드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런 수술을 해 주실 써전은 박사님밖에 없어서 부득이하게 연락드렸습니다.”
“생명이라네. 피곤한 건 나중에 쉬면되지. 일단 먼저 들어가지. 다들 도착하는 대로 바로 들어오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수술 준비는 끝났으니까 바로 시작하셔도 됩니다.”
의료진의 말을 들으며 닥터 제임스는 다시 한 번 자신이 담당할 환부를 확인했다.
그 사이 태수도 똑같이 검사 화면에 집중했다.
폐를 담당할 닥터 오즈마가 늦는다고 한다.
폐의 손상 정도를 보니 온전히 집도하기에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닥터 오즈마가 도착할 때까지 몇 가지 조치는 할 수 있었다.
생각하던 태수가 멈칫했다.
자신이 여기에 왜 서 있을까?
왜 닥터 제임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때 같이 왔는가.
두 가지 이유다.
환자, 그리고 기회.
위급한 환자라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움직였다.
거기에 자신의 욕심도 더해졌다.
닥터 제임스.
세계적인 야전의사다.
그의 눈에 든다면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거라 확신했다.
그 좋은 일은 태수로 하여금 많은 경험을 하게 할 것이고, 죽어가는 환자들을 살릴 기회도 많아질 게 분명했다.
태수가 생각하는 사이였다.
닥터 제임스가 막 수술실로 향하려하자 태수가 나지막이 불렀다.
“닥터 제임스.”
“음?”
“저도 참가해도 되겠습니까?”
태수의 물음에 닥터 제임스 입가에 순간 의미심장한 미소가 스쳤다.
태수를 보는 눈빛까지 살짝 번뜩였다.
기대한 정도?
아니, 그 이상이라는 눈빛이다.
하지만 너무 빠르게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온 닥터 제임스가 일부러 망설였다.
“자리가 마땅하지 않을 거 같은데.”
“폐를 집도해 줄 닥터 오즈마가 올 때까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음.”
닥터 제임스는 침음성을 흘리며 태수와 눈빛을 마주했다.
태수의 눈은 이글거릴 정도로 열정으로 가득했다.
닥터 제임스는 뭔가 만족한 표정이었다.또 한 번 빠르게 감정을 숨긴 닥터 제임스를 다시 검사 영상으로 시선을 돌려 폐의 손상 정도를 확인했다.
“총상인가? Other injuries of lung(폐의 기타 손상)이 심해. 이 정도 Lung damage(폐손상)라면 오래 버티기는 힘들 거 같은데.”
“말씀하신대로 Right lung(오른쪽 폐)이 30퍼센트 이상 손실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Enteric damage(장손상)도 심해 동시에 수술하시기는…….”
브리핑하는 의료진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닥터 제임스가 아무리 세계적인 써전이라고 해도 두 군데 수술을 동시에 진행할 순 없기 때문이다.
배꼽 주변을 정통으로 관통해 장의 손상이 더욱 심했다.
때문에 폐을 담당해 줄 써전이 도착할 때까지는 다른 수술에 집중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때 닥터 제임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태수에게 물었다.
“할 수 있겠나?”
“시간을 끌 정도는 얼마든지요.”
“확신하나?”
“네.”
태수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닥터 제임스 표정이 조금 묘하게 변했다.
“역량인가. 아니면 자만인가?”
“환자에게 부담을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의사의 빠른 결정이라고 그분께 배웠습니다.”
태수의 말에 닥터 제임스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그 친구에게서 또 뭘 배웠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 보지.”
“영광입니다.”
태수는 닥터 제임스의 도발에 바로 응수했다.
치료를 위해, 또 환자를 위한 도발은 얼마든지 받아줄 마음이다.
태수의 얼굴을 본 닥터 제임스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는 의료진에게 말했다.
“닥터 최에게도 수술 준비를.”
“알겠습니다.”
“준비 되는대로 시작한다.”
통보하는 닥터 제임스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서서히 걷혀갔다.
수술을 준비하는 모습이 전쟁 중인 인도와 파키스탄의 군인들보다 더욱 비장했다.
태수는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수술 준비를 마쳤다.
이잠바크와 별다른 차이점은 없었다.
소독을 하지 않고 손만 닦는 점은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수술복 세트를 제대로 갖춰 입는다는 점이다.
태수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준비하는 시간이 조금은 길어진 탓이다.
옆에서 특히나 천천히 준비를 이어가는 닥터 제임스, 그리고 뒤를 이어 뇌를 수술해 줄 닥터 막스밀리언이 도착했다.
집도의들은 손끝까지 꼼꼼하게 솔로 문지르고, 수술복을 입을 때도 가벼운 사담이 오갔다.
태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각종 검사 결과를 봐도 대번에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한가한 써전들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써전의 사정은 뒤로 하고 태수는 자기 준비부터 서둘렀다.
가장 먼저 준비를 끝낸 태수가 말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곧 들어가지.”
“실례합니다.”
양해를 구한 태수는 서둘러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얼굴에는 약간 실망감도 떠올랐다.
환자를 위해 누구보다 서두를 줄 알았던 닥터 제임스였기에 그 실망감이 더 했다.
그러나.
태수는 수술실을 들어간 순간 써전들의 여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수술실 안에는 먼저 도착한 의사가 한 명 존재했다.
마취과 의사였다.
얼굴도 익숙했다.
닥터 이작손.
태수가 이잠바크에서 명함을 받았던 NGO 마취과 전문의다.
그는 환자와 연결된 각종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 계속 간호사들에게 오더를 내리는 중이었다.
“칼륨 추가.”
“네.”
간호사가 바로 오더대로 주사하자 미묘하게 달라진 모니터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모니터의 수치를 통해 환자를 전신 관리하는 중이다.
얼마나 예리한지 약간의 오차도 유심히 관찰하고 그에 적절한 오더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