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27
00128 128화
마취과 의사란 단순하게 환자를 잠재우는 역할이 아니었다.
심박, 호흡, 혈압, 혈액보존량, 수혈량까지.
환자가 숨을 쉬고 혈액이 돌아가는 모든 걸 관리하는 의사였다.
태수는 솔직히 마취과 의사라는 존재에 대해서 잠시 망각했다.
이잠바크에서 5개월 동안 혼자 수술을 해야 했다.
마취부터 집도, 봉합까지.
말 그대로 수술의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혼자 모든 걸 판단하고 결정했다.
허나 여긴 달랐다.
수많은 의료진이 한 명의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 각자 맡은 일에 책임을 다했다.
닥터 제임스 또한 전신 관리를 맡은 닥터 이작손을 믿고 꼼꼼하게 수술 준비를 진행했다.
서두른 태수만 어색해진 상황이다.
그때 뒤를 돌아본 닥터 이작손이 가늘게 뜬 눈으로 태수를 바라봤다.
서로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라 첫 눈에 알아보기 힘든 모양이다.
익숙한 눈매가 아니라 조금은 경계하는 눈빛이다.
“누구십니까?”
“태수 최입니다. 닥터 이작손.”
“오! 닥터 최. 이잠바크에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닥터 이작손의 물음에 태수는 바로 대답했다.
“닥터 오즈마가 조금 늦어진다고 해서 들어오게 됐습니다.”
“그럼 Lung(폐) 담당으로?”
“네.”
“오. 기대해도 되나요?”
닥터 이작손이 부드러운 눈매로 묻자 태수도 같이 미소 지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고 싶을 때 말씀하세요.”
자신만만한 닥터 이작손의 말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태수는 의료진이 준비해둔 네 곳의 집도의 위치 중 Lung 쪽에 섰다.
그때 백인 간호사가 의료카트를 끌고 태수에게 다가왔다.
“준비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태수는 닥터 이작손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한다는 의미다.
닥터 이작손의 눈매가 더욱 부드러워졌다.
“얼마든지.”
그의 대답을 들은 후에야 태수는 환부를 내려다봤다.
솔직히 눈을 감고 싶은 마음이었다.
상체가 완전히 드러난 남자 환자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검사 영상으로 대충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끔찍했다.
가슴과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고, 머리도 오른쪽 두개골이 반쯤 함몰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대량 출혈이 없다는 건 닥터 제임스 말대로 천운이다.
일생의 모든 행운을 가져다 썼다는 농담이 실감될 정도였다.
언제나 태수는 생각한다.
어떤 치명적인 상처라도 살아서 도착했으면, 살려서 내보내야 한다.
태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간호사에게 말했다.
“메스 10호.”
간호사가 바로 10호 날을 끼운 메스를 내밀었다. 태수가 메스로 환자의 오른쪽 아랫부분에 생긴 상처를 갈랐다.
지혈제로 멈춰가던 출혈이 다시 번져 갔다.
태수가 행한 하나의 행동으로 주변이 분주해졌다.
“혈액 좀 더 추가하고, 마취 강도 올립니다.”
“네.”
닥터 이작손의 말에 따라 옆에서 보조하던 간호사 손길이 분주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어느새 태수의 손 옆에 보비와 썩션이 도착했다.
치직. 쿠러럭!
출혈점을 막고, 피를 빨아들이는 일이 순차적이면서 신속하게 진행됐다.
그때 태수가 멈칫했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 사람은 어시스던트가 아니라 간호사였다.
간호사는 옆에서 어시스던트와 같이 태수를 보조했다.
빠르게 출혈을 잡은 간호사가 환부까지 넓게 벌려 고정시킨 후에 태수에게 물었다.
“뭘 드릴까요?”
“플레인 포셉과 메이요. 부탁드립니다.”
“여기요.”
말과 거의 동시에 태수 앞에 두 가지 수술 도구가 도착했다.
너무도 빠른 움직임이 태수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다.
태수에게는 상대가 의사인지, 간호사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건 수술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냐는 거뿐이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놀라울 정도였다.
이런 환경에서 수술.
솔직히 그동안 마음속으로 수없이 바라고 바랐다.
하지만 여러 여건상 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이번 한 번의 경험이 태수에게는 또 다른 성장의 기회로 다가올 게 분명했다.
온전히 수술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일까?
태수의 손놀림이 조금씩 경쾌해지기 시작했다.
태수가 수술을 이어가던 중 수술실로 닥터 제임스와 닥터 막시밀리언이 차례로 들어왔다.
태수의 반대편에 닥터 제임스가 섰고, 닥터 막시밀리언은 머리 쪽으로 향했다.
제자리에 선 두 의사 중 닥터 제임스의 눈길이 태수의 손으로 향했다.
태수는 수술을 이어갈 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미 수술에 완전히 집중한 상태였기에 누가 들어왔는지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이잠바크에서 수없이 경험했듯이 손상된 조직을 떼어내는 손길이 능숙했다.
‘제법이야.’
닥터 제임스가 태수는 보는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아니, 지금 이 수술실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태수의 손길을 보고 레지던트라고 생각할 의사는 없었다.
이미 태수의 움직임은 전보다 많이 발전한 상태였다.
그때 마취를 담당하던 닥터 이작손이 닥터 제임스에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환자를 보냈을 때는 좀 어설픈 감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정확하면서도 빨라진 거 같습니다.”
“음.”
“역시 실전에서 익힌 기술이 제 몫을 하는 거 같습니다.”
“기술은 손재주야.”
닥터 제임스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도 수술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 말이 옳다.
환자를 살리는 데 있어 유연한 손놀림은 그저 재주일 뿐이다.
일면식이 없는 환자라도 얼마나 성심성의껏 치료하는지가 좋은 의사의 척도다.
태수의 손놀림에서는 그 진심이 느껴졌다.
망가진 폐 조직 하나를 떼어내더라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힐끔힐끔 태수를 쳐다보는 닥터 제임스의 눈빛이 조금씩 부드러워져갔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수술실로 닥터 오즈마가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가 자기 자리를 찾아가려다 의아한 눈빛으로 태수를 바라봤다.
“어?”
“닥터 최, 교대해.”
닥터 제임스의 말이 떨어졌다.
순간 태수가 멈칫했다.
상한 조직을 상당 부분 떼어낸 상황이다.
물론 태수가 이 이상 수술을 진행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머릿속에 카프레네의 지식이 가득하더라도 그걸 따라갈 실력이 아직도 부족했다.
그래도 욕심은 있었다.
그 욕심이 좌절되니 입이 씁쓸했다.
버티는 방법과 물러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태수는 과감하게 버티기를 포기했다.
환자를 위해 역량이 안 되는 자신이 계속 자리를 지키는 게 현명하지 않은 탓이다.
태수가 간을 집도하던 자리에서 물러나며 닥터 오즈마에게 양보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인데. 설마.”
“네. 접니다.”
“닥터 최가 왜 여기에.”
마스크에 가려진 닥터 오즈마 눈이 커졌다.
그때였다.
“수술 중이야.”
닥터 제임스의 한 마디가 묵직하게 수술실에 울렸다.
동시에 닥터 오즈마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어떻게 진행됐는지 확인하던 닥터 오즈마의 놀란 목소리가 수술실을 울렸다.
“뭐야? 닥터 최. 이렇게 깔끔하게 제거했어?”
태수가 얼른 그 말을 정정했다.
“아직 아랫부분이 조금 덜 됐습니다.”
“아니요. 그래도 30분만에 이렇게 손상된 조직을 떼어냈다니. 언제 이렇게 실력이 좋아진 거야?”
닥터 오즈마의 놀라움에 닥터 제임스는 한 번 더 낮게 말했다.
“닥터 오즈마. 수술부터.”
“아, 네. 죄송합니다.”
닥터 오즈마는 빠르게 태수가 진행한 처치를 이어갔다.
다시 수술실은 차분한 분위기를 되찾고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닥터 제임스의 한 마디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 중에 자신이 낄 자리가 없다.
이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참관뿐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다음 수술을 위해, 또 언젠가 비슷한 증상의 환자를 수술하기에 많은 도움이 됐다.
태수는 피로 가득한 장갑을 벗고 본격적으로 참관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닥터 최. 잠깐 이쪽으로.”
닥터 제임스의 말에 태수가 의아한 얼굴로 다가갔다.
“찾으셨습니까?”
“Rake Retractors(갈고리 같은 모양의 수술 도구)로 이쪽을 좀 벌려줄 수 있나?”
“네.”
“왼손으로 Rake Retractors를 잡고 오른손은 캘리 클램프로 여기를 잡아주고.”
닥터 제임스는 계속 태수에게 수술을 도와줄 걸 요구했다.
마치 어시스던트로 끌어당기는 느낌이다.
태수는 이 수술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손을 얼른 움직였다.
태수가 환부를 좀 더 벌리자 환부가 더욱 넓게 드러났다.
그런데 그때 태수는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이미 리트렉터로 벌어진 환부를 굳이 더 벌릴 이유가 없었다.
그걸 모를 닥터 제임스가 아니었다. 그런데 제임스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좀 더 속도를 올렸다.
수술을 이어가는 걸 지켜보는 사이 태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닥터 제임스가 일부러 자신 쪽으로 환부를 보이며 수술을 이어가는 느낌이었다.
허나 닥터 제임스의 드러난 눈매에는 어떤 감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환부에만 집중한 채 수술을 이어갈 뿐이었다.
‘착각인가?’
태수가 그런 생각이 들 때였다.
“Rake Retractors를 좀 더 왼쪽으로. 포셉으로 조직을 거둬 주고.”
닥터 제임스의 이어지는 지시로 태수가 빠르게 포셉을 쥐고 조직을 집기 위해 좀 더 환부로 가까이 다가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닥터 제임스가 손을 움직였다.
태수는 그제야 추측을 확신했다.
뭔가 알려 주고 싶어 한다.
후배 의사에게 배려해 주는 선배의 모습이다.
이 수술에 계속 참가시키겠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가슴이 뭉클했다.
‘감사합니다.’
태수가 마음으로 소리쳤다.
기회가 찾아온 건 사실이다.
태수는 곧 혼란스러움을 털어내고 닥터 제임스의 손놀림을 주시했다.
조금이라도 더 배우려면 눈으로라도 우선 익혀두는 게 옳았다.
8시간 후.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세 군데 커다란 상처를 입었지만 커다란 문제는 없었다.
닥터 아직손의 마취 관리가 그만큼 빛을 본 수술이었고, 집도한 의사들의 실력도 쟁쟁한 탓이다.
그 후 환자는 회복실로 옮겨졌고 태수는 닥터 제임스의 방으로 또다시 초대되어 왔다.
닥터 제임스와 마주앉은 태수가 수술 직후라 열량 높은 간식으로 허기를 달랠 때였다.
상석에 앉은 닥터 제임스가 간식을 계속 입으로 가져가는 태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또 하나의 간식을 입으로 가져가던 태수가 멈칫하더니 슬그머니 내려놓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식탐이 있어서요.”
“아니, 다 먹어도 좋아.”
“그런데.”
태수가 슬그머니 묻자 닥터 제임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어제와 너무 달랐나?”
“…….”
태수는 침묵했다.
그러나 대답보다 더 확실한 표현이기도 했다.
닥터 제임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늙은이 변덕이라고 생각해 주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그보다 어떻게 된 거지? 이잠바크에서 처음 보낸 환자 말이야. 혈관 우회술에 봉합이 좀 어설펐거든. 그런데 이번에 폐 조직을 떼어낼 때는 전혀 달라졌단 말이지.”
닥터 제임스가 말하자 태수는 바로 대답했다.
“이잠바크에서 여러 케이스를 다루다보니 그런 거 같습니다.”
“습득 속도가 빠른 편인가?”
“그건 상대적인 거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군. 그럼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되나?”
닥터 제임스의 물음에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한국에는 언제 들어가지?”
“예정은 없습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카슈미르에 머무르면서 지낼 생각입니다.”
태수의 대답을 들은 닥터 제임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들어가 보지 않아도 되나?”
“허락 받았습니다. 저는 여기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태수의 말에 닥터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병원의 주인이 누군지 몰라도 사람 볼 줄 아는군.”
“아닙니다.”
“아니야. 내가 볼 때도 자네는 케케묵은 한국 의료사회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어. 이 카슈미르가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최적의 장소지.”
“저도 그건 동감입니다.”
태수가 대답하자 닥터 제임스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빨리 돌아가지 않는다니까 더 좋군. 그럼 당분간 이쪽에서 일하는 건 어떤가?”
“NGO에서요?”
“어차피 별다른 소속도 없을 테고, 다른 지역으로 파견을 가려고 해도 조금 시간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그 제안에 잠시 고민하던 태수가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