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3
00013 13화
태수는 이내 다른 생각을 하려 애썼다. 이대로 카프레네만 기억하면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인턴생활도 보름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이젠 레지던트 과정에 지원할 과를 심도 깊게 생각해야 했다.
수많은 의과가 존재하고 평생 업으로 삼아야 하기에 결정이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흉부외과에 지원한 건 복잡함을 털어버리고자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정말 2개월 남짓 바쁘게 움직였고, 생각에 쏟을 심력도 부족했다.
그것도 이젠 과거의 일이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태수는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 카프레네의 기억이 자신에게 전이 됐다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굳이 다른 의과를 지원할 이유가 없다.
세계적인 명의의 지식이 있는데 왜 다른 과를 지원해서 고생해야할까?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그리고 미래에 이름 있는 써전이 된다면 돈을 버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지만 태수는 여전히 하루에 20시간 가까이 임택진 환자와 보냈다.
차라리 태수는 좋았다.
임택진 환자를 통해 여러 가지 케어 방법을 시행해볼 수 있던 탓이다.
그리고 그 방법이 기존의 방법과 달랐지만 환자에게는 부담을 적게 해준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확신했다.
‘진짜 기억이 옮겨온 거야?’
현실적이고 냉정해야 할 의사지만 지금은 그런 경계가 조금은 모호한 느낌이었다.
그때 박은정 간호사가 슬쩍 다가와 음료수와 빵을 내밀었다.
“이거 빨리 드세요.”
“김 선생님 또 어디 나가셨습니까?”
“그러네요. 아마 밖에서 담배 피우다가 오겠죠. 그보다 김 선생님이 좀 밉죠?”
박은정 간호사가 찡그리며 물었지만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아무리 치프가 SICU 벌 근무 서게 했다고 해도 너무 해요.”
“흉부외과는 특히나 힘드니까요.”
“그래도 다른 사람한테 화풀이 하는 건 아니죠. 좀 힘들겠지만 잘 견디세요.”
박은정 간호사가 할 말을 마쳤는지 이내 멀어져갔다.
태수는 그제야 그녀가 남기고 간 빵과 음료수를 내려다봤다.
얼핏 다른 간호사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태수 또래 남동생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더 인턴들에게 신경써주는 모양이었다.
각박하기만 할 줄 알았던 SICU 생활에 조금은 활기가 도는 건 박은정 간호사 때문이기도 했다.
“동기보다 낫네.”
인턴 동기들이야 각자 바빴기에 SICU에 얼굴도 비추지 못했다.
또 다시 며칠이 흘렀다.
태수가 임택진 환자를 지켜본 것도 10일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 임택진 환자는 산소포화도 수치가 정상을 되찾았고 소변이나 다른 수치들도 많은 안정을 찾았다.
태수는 임택진 환자를 대려다 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수치적으로 보면 곧 인공호흡기 떼실 수 있을 거 같아요.”
“…….”
눈을 감고 잠든 임택진 환자였다. 게다가 인공호흡기까지 착용중이라 대답은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일일지 몰라도 태수는 또 한 번 임택진 환자에게 말했다.
“자가 호흡을 하게 된다면 스트레칭을 조금씩 자력으로 하셔야 회복에 좋습니다. 심장이라는 놈은 괴롭혀줘야 자기 일을 열심히 하니까요.”
또다시 혼잣말처럼 훌훌 날아버린 말이었지만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임택진 환자를 집중 케어한 10여 일 동안 계속 말을 건넸다.
돌아온 대답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질리지도 않고 계속 말을 건 이유는 단 하나다.
의식 중이던 무의식중이던 반응을 보이게 하기에 좋은 치료 방법이다.
형식적인 보살핌이 아닌 환자가 관심을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게 중요했다.
이것 또한 새로운 지식의 일부다. 효과가 있는지는 아직까지 검증되지 않았지만 태수는 주저하지 않았다.
말할 일도 없는데 환자에게라도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자신도 위안을 얻은 탓이다.
한가한 태수와 달리 SICU 내에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했다.
회진시간이 가까운 탓이다.
회진은 흉부외과 과장부터 레지던트 1년차까지 모두 참가하는 행사 중 하나였다.
물론 과장이야 가볍게 보고 들으며 한 바퀴 돌아보는 게 전부지만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언제나 시간이 촉박했다.
타다닥, 타닥!
평소 조용하던 SICU에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김석동을 포함한 레지던트들이 밀린 차트를 모두 기입하고 있던 탓이다.
임택진 환자만 집중 케어하는 태수는 그 전혀 그럴 일이 없었다.
차트 정리가 아슬아슬 하게 끝날 무렵 SICU문이 열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줄지어 들왔다.
흉부외과 과장부터 부교수와 조교수, 치프와 기타 레지던트까지.
그 인원이 10명을 훌쩍 넘어섰다.
SICU 첫 번째 환자부터 회진을 돌기 시작하더니 이내 임택진 환자에게 까지 도착했다.
흉부외과 과장이 도착하자 태수는 서둘러 침대에서 멀어지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 최 선생이라고 했지? SICU 생활은 어떤가?”
그 질문에 태수가 흉부외과 과장 얼굴을 바라봤다.
40대 후반으로 푸근한 인상과 말투로 원내에서 인기가 제법 좋았다.
이추명으로 한국 흉부외과 권위자로 세계에서도 제법 이름 높은 써전(surgeon, 외과의)이었다.
인턴이지만 매일 얼굴을 보니 이름은 기억해주는 모양이다.
과장급 인사가 직접 질문하는 경우는 너무도 드물었다. 그렇다고 태수가 감격할 일도 아니었기에 덤덤하게 대답했다.
“정신없지만 배우는 게 많습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들이 계신 병원은 대한민국에 여기 밖에 없으니까 많이 배우도록 해.”
“감사합니다.”
가볍게 인사를 마친 후에야 이추명 과장 시선이 환자에게로 향했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김석동이 태수에게 건네받은 차트를 읊기 시작했다.
“임택진 43세, 성별 남. myocardial infarction으로 입원한 환자…….”
과장급이나 되는 의사는 모든 환자를 일일이 기억하지 못했다.
때문에 처음 내원한 순간부터 최근 상황까지 간략하게 보고한 후 이어서 어제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했다.
김석동의 보고가 끝나자 이추명 과장이 물었다.
“respirator는 언제 제거할 예정인가?”
그 질문에는 집도의인 강현필이 나섰다.
“현재까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오늘 중으로 제거해도 될 거 같습니다. 가끔이지만 수면상태에서 깨어나 눈빛으로 의사 표현을 하는 중이고요.”
“spontaneous respiration(자가호흡) 가능성은?”
“폐에 별다른 문제가 없으니 90퍼센트 이상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강현필의 대답을 들은 이추명 과장의 시선이 환자에게로 향했다.
마침 임택진 환자가 깨어있는 상태였다.
멍한 눈빛이었지만 눈동자가 돌아가는 게 주변 상황을 어느 정도 인지하는 모양이었다.
이추명 과장이 잠시 바라보더니 임택진 환자에게 물었다.
“임택진 환자분?”
스르륵.
임택진의 눈동자가 돌아가 이추명 과장과 시선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