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42
00143 143화
겨우 빼냈으나 용을 쓴 탓인지 힘이 쭉 빠졌다. 고립된 태수에게는 그조차도 두려움으로 다가섰다.
어떻게 해야 하나.
스스로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한 가지뿐.
“누구 없어요?”
태수는 목소리가 찢어져라 외쳤다.
몇 번 더 외쳤지만 여전히 돌아오는 건 메아리뿐이다.
조금씩 저체온증이 중증으로 진행되어 갔다.
출발하기 전에 수술한 환자가 저체온증으로 고생한 환자였기에 그 증상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대로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감각이 서서히 무뎌지고 있는 발끝부터 동상을 입을 게 뻔했다.
지진에 이은 또 하나의 자연현상.
폭설.
거기에 태수의 굳은 의지조차도 서서히 꺾여가려 했다.
“젠장. 무리였나?”
뒤늦은 후회였다.
점점 의식이 가물거렸다.
그때였다.
사박사박.
태수의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눈을 헤치며 다가오는 소리다.
태수는 그게 무엇이든 관계없었다.
그저 소리칠 뿐이었다.
“헤이! 이봐요! 여기 사람 있어요!”
태수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울렸다.
그러나 상대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건 단지 발자국 소리뿐이다.
기뻐하던 태수의 눈빛에 다시 두려움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야생동물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아찔했다.
마른 침까지 간신히 넘어갈 정도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발자국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두고 손으로는 등산 스틱을 강하게 쥐었다.
그리 단단하진 않지만 지금 믿을 건 이거뿐이다.
두근두근.
점점 심박수가 올라가며 태수의 긴장감이 극도로 올라갔다.
그때 짙은 안개를 뚫고 커다란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흐윽!”
태수가 질겁한 얼굴로 바로 등산 스틱을 거칠게 휘저었다.
그러나 아무런 감각도, 반응도 없었다.
태수가 슬그머니 눈을 떠 앞을 확인하다 멈칫했다.
안개를 뚫고 나타난 커다란 머리의 정체는 바로 야크의 머리였다. 히말라야 주민들이 많이 방목해서 키우는 가축 중에 하나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태수의 얼굴이 싸늘할 정도로 굳어졌다.
“착, 착하지?”
태수가 억지로 비소를 보이는 순간이다.
푸우!
야크의 코에서 기다란 콧김이 한 번 더 뿜어져 나왔다.
공격적인 모습에 태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그때였다.
네팔어가 들려오자 야크가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야크를 지나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툼한 솜옷을 입고 있고 턱밑에는 덥수룩한 수염이 난 남자였다.
의아한 얼굴로 다가온 그가 태수를 보고는 멈칫했다. 뭐라고 이야기하는 거 같은데 태수는 네팔어라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저 사람과 함께 가면 최소한 눈을 피할 곳은 있지 않을까?
태수는 그 생각에 반사적으로 배낭에서 얼른 흰 가운과 청진기를 꺼내 들어보였다.
그때였다.
“의사십니까?”
네팔 남자에게서 영어가 들려오자 태수가 반색했다.
“네. 의사 맞습니다. 저 의사에요.”
태수는 영어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자 자신도 모르게 기운이 빠지는 걸 느꼈다.
풀썩.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은 태수 얼굴이 꺼멓게 질려 있자 네팔 남자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뭐 하십니까?”
“마을로 향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폭설을 만나서요.”
“마을은 왜 가시는 겁니까?”
“환자가 있다고 해서 갑니다. 여기 의약품도 챙겨왔고요.”
순간 네팔 남자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태수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 치료하러 오신 겁니까?”
“지금은 조난자지만요.”
“일단 타세요. 아니, 얼른 타세요.”
남자가 얼른 태수의 배낭을 빼앗듯 가져가고 야크에 떠밀 듯 올렸다.
“아니, 이게.”
얼떨결에 탄 태수가 놀람을 금치 못했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고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네팔 남자는 이 정도 눈은 우습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걸었다.
오히려 태수가 미안할 정도였다.
“여기 같이 타고 가면 안 됩니까?”
“괜찮습니다. 닥터께서 편하게 가셔야죠.”
“그런데 어디 가시는 길 아니었습니까?”
태수가 이어서 묻자 네팔 남자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실은 포카라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가족도, 마을 사람들도 많이 다쳤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더군요.”
“그러셨군요.”
“닥터를 못 데려오더라도 뭐라도 가져 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닥터를 만난 거고요.”
네팔 남자의 유창한 영어에 태수가 조금 의아하게 물었다.
“실례지만 말씀을 잘하시네요.”
“아, 셰르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셰르파는 히말라야 전문 등산 가이드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순간 태수 또한 얼굴이 밝아졌다.
“아, 진짜 다행입니다. 정말 죽는 줄 알았거든요.”
“제가 많은 등산객을 ABC까지 안내했지만 닥터 같이 무모하신 분은 처음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무모했죠. 그보다 제 소개부터 해야죠. NGO에 임시로 소속된 태수 최입니다.”
“카르카입니다. 그런데 임시라니요?”
카르카라고 소개한 그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자 태수가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카슈미르에 봉사하러 갔다가 이쪽 소식을 듣고 부탁해서 임시로 합류하게 됐습니다.”
“오! 그럼 실력은……. 알겠습니다. 좀 더 속도를 올리죠.”
그 말과 동시에 카르카의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덩달아 야크의 속도도 올라가자 태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힘드실 텐데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닥터.”
“말씀하시죠.”
“안내해 준 대가라고 해도 좋고, 뭐라고 하셔도 좋습니다만, 제 가족들부터 먼저 봐 주십시오.”
카르카의 말에 태수는 고민보다는 바로 맞받아쳤다.
“급한 환자 먼저입니다.”
“……그건 저도 압니다만.”
“우선 가서 이야기하시죠.”
“알겠습니다.”
카르카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빠르게 걸어갔다.
그래도 이동하는 시간이 조금 있었기에 가벼운 대화가 오가긴 했다.
태수를 바로 외국인이라고 알아보지 못한 건 옷차림 때문이었다고 했다.
트레킹이나 등산을 위해온 사람들은 대부분 등산복을 입고 오는데, 태수는 솜털 옷이라 네팔어부터 말했다고 한다.
게다가 짙은 갈색으로 탄 얼굴이 네팔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그렇다고도 했다.
태수도 갑자기 떠나게 된 길이라 준비하지 못한 머쓱함을 느낄 정도였다.
카르카는 셰르파답게 능숙하게 길을 안내했다.
언제 갰는지 모를 정도로 하늘은 다시 화창했다.
보고 있는 태수가 환장할 정도였다. 언제 죽을뻔한 위기를 줬는지 시치미만 떼는 하늘이다. 다행인 건 덕분에 태수는 야크의 등에서 편안하게 마을에 들어설 수 있었다.
마을은 경사면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지은 구조였다.
마을 입구부터 반대편까지 병풍처럼 둘러진 건물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온전할 때 이야기다.
마을은 지진의 피해를 직간접적으로 받았는지 건물 곳곳이 무너진 상태였다.
게다가 쌓인 눈이 여기저기 쌓인 상태였다. 힘 좋은 마을 청년들이 재건작업을 하고 있지만 얼굴에 생기가 없었다.
그 외에 아이들도 뛰어놀지 않고 사람들의 모습도 힘이 빠진 상태였다.
마치 폐허로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태수는 생각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카르카는 태수를 태운 야크를 몰고 잰걸음으로 이동했다.
주변에 다친 마을 사람들이 태수의 눈에도 보였다.
솔직히 오랜 산행에 고립되었던 시간까지 더해졌기에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다.
하지만 환자를 보니 자신도 모르게 기운이 올라왔다.
아니, 억지로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태수가 단단히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카르카의 행동이 조금은 이상했다.
태수 아니, 의사가 왔다고 소리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움직였다.
이상한 느낌에 태수가 카르카에게 물었다.
“왜 알리지 않으십니까?”
“잠시만요. 아주 잠시면 됩니다.”
카르카는 그렇게 말한 후 계속 잰걸음으로 이동했다.
그러던 카르카는 마을 중턱에 멈춰 섰다.
공터같이 개방된 장소였고 천막이나 나뭇가지들로 얼기설기 세운 임시거처들도 보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사람이 자리한 모습이다.
“으으윽.”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도 보였지만 웃음소리는커녕 미소조차 보지 못했다. 그런 사람들을 지나 카르카는 하나의 천막에 도착했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카르카는 야크 위에 오른 태수를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야크에서 내린 태수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카르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가 제 가족들이 머무는 곳인데, 먼저 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순간 태수는 카르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보다 식구를 먼저 챙기는 마음.
태수가 그 마음을 바로 알아챘다.
태수는 그런 카르카에게 조용히 말했다.
“물론 봐 드리겠습니다. 대신 제가 식구분들을 진료하는 사이에 꼭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다쳤으면 무조건 오라고 하세요. 무조건.”
태수의 단호한 말에 카르카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카가 가족들에게 이야기하고 난 후에야 태수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느껴지는 건 불쾌함이었다.
산 중턱이라 기온이 많이 내려간 상태다. 게다가 예측 못 할 기후로 눈까지 내려 천막 안은 습기가 가득했다.
발열 기구도 없고 두툼한 옷들만 가득 둘러싼 모습들이다.
태수는 어색한 네팔식 인사를 건네며 안으로 들어갔다.
카르카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기에 가족들은 태수 앞에 모여 앉았다. 태수는 바로 카르카의 가족들 얼굴부터 살폈다.
카르카가 없기에 통역해 줄 사람은 없다. 하지만 눈으로도 판단할 수 있는 상처나 병이 있기 마련이다.
그때 카르카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나이가 많은 노인이 태수 시야에 잡혔다.
혈색도 나쁘지 않았고, 눈빛도 좋았다.
그런데 그의 손은 천으로 감겨 있고 핏물이 베어 나온 모습이다.
태수는 더 망설이지 않고 카르카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우선 치료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
분명히 대화를 유도한 물음이지만 침묵만이 돌아왔다.
대화가 아예 통하지 않는다는 걸 파악한 태수는 바로 배낭에서 드레싱 도구를 꺼내 펼쳐보이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노인은 자신보다 옆에 있는 또래의 여인을 지목했다.
“아내, 아프다.”
익숙하지 않은 영어였지만 태수가 알아듣기에는 너무도 충분했다.
태수가 여인에게 바로 몸을 돌렸다.
안색이 약간 창백했다.
아픔을 억지로 숨긴다는 게 바로 눈으로도 읽혔다.
태수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태수가 손짓으로 몸을 여기저기 가리키며 바디랭귀지를 시도했다.
그러자 여인이 슬쩍 옷을 들췄다.
두툼한 옷 사이로 들어난 배에 상처가 있었다.
옆구리에 피딱지가 앉았고, 곪아가는 모습도 눈에 보였다.
태수는 빠르게 누우라는 제스처를 하고는 굳은 얼굴로 드레싱 도구를 손에 들었다.
여인이 머뭇거리며 누운 후였다.
태수는 지체하지 않고 그녀의 옷을 걷은 채 바로 처치에 들어갔다.
상처를 긁어낸 후 지혈제를 뿌리는 등.
태수는 익숙한 손길이었지만 여인은 정말 말 그대로 이를 악물고 참았다.
“으읍! 윽!”
그래도 간간히 새어나오는 비명은 어쩔 수 없었다.
태수는 최대한 마취제를 이용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앞으로 어떤 환자가 기다릴지 모르기에 의약품 사용을 최대한 자제했다.
그래도 처치는 곧 끝이 났다.
붕대로 배를 감싸준 후 태수는 커다란 통에 든 항생제와 진통제를 일주일 먹을 량을 계산해 내밀었다.
“밥, 약. 밥, 약.”
태수가 먹는 시늉과 약을 먹는 시늉을 번갈아 하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의 간단한 치료였지만 태수는 살짝 지쳤다.
‘이래서 통역이 꼭 있어야 돼.’
그 통역해 줄 사람이 카르카인데, 그가 없으니 당장 눈앞에 있는 환자도 치료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약속대로 카르카의 가족들부터 진료를 이어갔다.
카르카의 아버지와 아들들, 그리고 부인까지.
가족들은 커다란 상처는 없었지만 방치한 시간이 길어 조금씩 곪아갔다. 다행히 가져온 약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진료를 마친 태수가 가방을 정리할 때였다.
웅성웅성.
밖이 소란스러웠다.
그때 카르카가 빠르게 안으로 들어오더니 태수에게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죄다 이쪽으로 몰려왔는데요.”
“일단 움직이지 못하시는 분들부터 들어오라고 하세요.”
“여기가 저희가 임시로 머무는 집이라서.”
카르카가 난색을 표하자 태수도 그제야 아차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