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43
00144 144화
“그럼 어디 마땅한 장소가 있습니까?”
“촌장님이 자리를 봐 주신다고 했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는 좀 쉬시는 게…….”
카르카가 조심스럽게 제안했지만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환영해 주실 때 열심히 해야죠. 일단 밖에서 진료하겠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자리만 넓게 펼쳐주세요.”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도 오래가지 않았다.
태수가 카르카의 임시 거처에서 나온 순간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우르르.
몰려드는 사람들.
우는 소리와 더불어 아우성치는 목소리까지.
그들의 얼굴에 깃든 절실함.
그들이 지금 태수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굳이 통역해 주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태수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인지했다.
카르카가 일부러 자기 가족들부터 봐 달라고 했던 것도 이런 사태를 직감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가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을 비난할 순 없었다.
태수는 어느새 펼쳐진 널찍한 자리에 올라 카르카에게 빠르게 말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부터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카르카는 태수의 말을 그대로 마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자신이 아프기에, 또 자신의 가족이 아프기에 먼저 봐 주길 원하는 상황이다.
태수는 이잠바크에서 겪었던 기억이 있기에 그들의 행동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추측이 가능했다.
그러나 태수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다시 카르카에게 말했다.
“각자 자기 생각만 한다면 정작 중요한 환자를 놓치게 된다고 말해 주세요.”
카르카가 태수의 말을 소리쳐 전했다.
들것에, 또는 아무런 도구도 없이 순수하게 인력에 들려 환자들이 도착했다.
어느새 널찍한 자리를 모두 환자들이 메웠다.
“으으으.”
눌리고 찢기고, 부러진 환자들.
환자들이 내는 신음소리가 마을을 울리는 거 같았다. 주변에 가득한 보호자들의 표정도 걱정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태수는 달랐다.
전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을 상황이지만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그렇다고 방치하는 건 아니다.
태수는 눈으로 신속하게 누워 있는 환자들을 훑었다.
우선 누가 더 위험한 환자인가.
또 조금 시간을 두고 치료해도 괜찮은 환자는 누구인가.
마지막으로 가망이 없는 환자는 누구인가.
눈으로 모든 걸 확인할 수는 없다.
오진을 내릴 가능성 또한 많다.
그렇다고 무작정 달려들 수는 없었다.
치료해야 할 환자는 수십 명, 태수는 혼자뿐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게 태수는 그저 서 있는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갑갑해진 카르카가 다가와 태수를 재촉했다.
“닥터. 이렇게 지켜만 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제 됐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카르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다.
태수는 그가 지금 행동을 이해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설명할 생각도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할 시간이 없다.
태수는 배낭에서 약상자를 꺼냈다.
“그럼 지금부터 제 옆에서 통역해 주시는 겁니다.”
“아, 네.”
“가시죠.”
태수는 언제 멍하니 서 있었냐는 듯이 빠르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위중하다고 판단된 환자에게 다가갔다.
“으으으.”
환자는 미약한 신음소리만 가득 흘린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주변에는 보호자가 손을 잡아주는 모습이다. 이미 의식 레벨이 현저히 떨어진 환자에게 질문은 무의미 했다.
태수는 바로 카르카를 통해 보호자에게 물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상태입니까?”
“건물 잔해에 깔렸답니다. 허리 밑으로는 꼼짝도 못했고요.”
“피를 흘리거나 토한 적은요?”
“조금 전에 한 번 토했답니다.”
카르카의 통역이 계속 되는 사이 태수는 환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우선 조그마한 플래시로 눈을 비췄다.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릴 뿐, 플래시를 전혀 따라오지 못했다.
뒤를 이어 피를 토했다는 입을 살폈다.
피를 씻어 내린 듯 깨끗했다. 혀를 깨물었거나 입안이 터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쿨럭!”
입이 벌어진 환자가 갑작스럽게 기침을 했다.
그런데 그 기침에서 피가 섞여 태수에게로 직격했다. 태수는 피하지도 못한 채 온통 피를 뒤집어썼다.
“닥터!”
카르카가 깜짝 놀라 바라봤다.
그러나 태수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환자의 입속을 여전히 주시했다.
방금 피가 토해진 장면이 똑똑하게 머릿속에 기억됐다.
식도를 통해 피가 토해졌다.
그 말은 곧 위나 간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과 같다.
태수는 시진에서 촉진으로 진단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얼굴에 튄 피는 닦을 생각조차도 없었다.
태수가 청진기를 귀에 꽂으려하자 카르카가 얼른 말했다.
“피는 좀 닦아야…….”
“그럴 시간 없습니다.”
태수는 핏물이 떨어지는 얼굴로 눈빛하나 변하지 않은 채 청진판을 두툼한 환자의 옷 사이로 넣었다.
두근두근.
심장 고동은 정상인보다 조금 약했지만 리듬감은 나쁘지 않았다.
이어서 위를 향해 이동한 태수가 청진판에서 들려온 소리에 귀를 의심했다.
청진판에 확대된 소리라지만 폭포 같은 소리였다.
‘설마?’
얼른 환자의 옷을 연 태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환자의 배는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부풀어 오른 상태다.
이 속에 피가 가득하다는 이야기였고, 다른 말로는 생명이 위험하다는 뜻이다.
“응급수술을…….”
태수가 말하는 도중이다.
“쿨럭쿨럭!”
환자가 거친 기침을 쉬지 않고 이어갔다.
그럴 때마다 입에서는 피가 역류했다.
“으으으.”
피를 닦을 생각도 못한 채 신음만 토하는 환자였다. 태수는 그 환자를 내려다보다 눈빛이 살짝 떨려왔다.
안 좋은 상황이 아니라, 이미 늦은 상태다.
하지만 태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무능력한 자신을 또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태수는 바로 카르카에게 소리치듯 물었다.
“여기서 가장 깨끗한 곳이 어딥니까?”
“찾아봐야 하는데.”
“빨리 찾아보세요!”
태수의 박력 있는 외침에 카르카가 얼른 몸을 움직였다.
태수는 그 사이 빠르게 배낭 안에 손을 넣었다.
주사기와 주사제를 꺼내든 태수의 눈빛이 단단히 굳어져 있었다.
모르핀.
가장 효과적인 통증 억제제다.
피를 토하는 건 막을 수 없더라도, 최소한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해줄 수는 있다.
조금만 버티면 수술실이 마련된다.
기본적인 수술 도구는 가져왔다. 가져온 것만으로 가능한 수술인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하지만 딱 하나.
할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모르핀을 주사하자 환자의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됐다.
물론 눈으로 보이는 모습만 그랬다.
속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건 태수도 알았다.
태수의 얼굴에 조급함이 점점 깃들었다.
그렇게 1분이나 지났을까?
카르카가 다급하게 다가오더니 태수에게 소리쳤다.
“깨끗한 장소를 찾아냈습니다. 지금 한 번 더 청소중이고요.”
“빨리 옮기세요!”
태수는 배낭을 급히 챙겨 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카르카가 얼른 말했는지 마을 사람들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환자의 가족들도 그 뒤를 따랐다.
카르카가 알아본 방은 태수의 예상과 달랐다.
방이 아니라 일종의 마을 회관 같은 장소였다. 누군가 여기서 머물고 있었다는 건 태수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촌장이 배려해 줬는지 서둘러 모두 짐을 챙겨 떠난 모습이다.
그 빈 공간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태수는 그들을 뒤로하고 빠르게 카르카에게 말했다.
“수술할만한 곳은요?”
“저쪽입니다. 가시죠!”
카르카가 빠르게 태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5평 남짓한 공간이 펼쳐져 있고, 딱딱한 테이블도 놓여 있었다.
수술대가 없기에 대신하기 위함이다.
태수는 배낭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 테이블 위에 넓게 펼치며 카르카에게 말했다.
“환자부터 빨리 들여보내주시고. 그 후에는 나가 계세요. 모두 같이요.”
“알겠습니다.”
카르카는 군말하지 않고 태수의 말에 따랐다.
가족들을 먼저 치료해 줬기에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는 눈치다.
태수의 머릿속에는 지워진 지 오래였다.
지금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환자부터 치료해야 했다.
태수가 수술 도구를 세팅하는 사이 환자가 들것에 실려 들어왔다. 그리고 수술대에 옮긴 후 카르카가 들것으로 환자를 싣고 온 마을 청년들과 같이 멀어져 갔다.
그들도 태수를 도와주는 분위기다.
유일한 의사였고, 그만큼 목마른 의사다.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일단 모두를 위해 돕길 바라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하지만 나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환자의 보호자들이었다. 그들은 계속 걱정하다 못해 무너질 듯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태수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냉정하게 대처했다.
“카르카 씨! 빨리 다 모시고 나가세요.”
“아, 죄송합니다.”
“괜찮으니까 빨리 좀 부탁드립니다.”
태수가 다급하게 말하자 카르카도 얼른 보호자들의 등을 떠밀었다.
가지 않으려 했다.
그 모습이 태수의 눈에도 생생하게 사로잡혔다.
하지만 수술 장면을 보여줄 수 없었다.
의료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건 오히려 너무도 커다란 마음의 상처로 남을 일이었다.
곧 카르카의 등살에 보호자들이 수술실을 나갔다.
그제야 태수 혼자 남았다.
태수는 환자를 내려다봤다.
남산 만하게 부풀어 오른 배가 이젠 터질 거 같았다. 죽을 거 같은 고통을 느껴야 정상이지만 모르핀의 효과로 고통은 크게 느끼지 않았다.
이때 한시라도 빨리 수술해야 했다.
태수는 미리 꺼내놓은 수액을 IV에 연결했다.
분명 피가 부족한 상황이 올 터였다.
하지만 그것부터 걱정할 때는 아니었다. 우선 조금이라도 환자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게 옳았다.
태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IV에 전신마취제를 투여했다.
환자가 서서히 잠에 빠져들어 갔다. 완전히 마취에 들어 갈 건 꼬집거나 환부를 찌르는 걸로 확인했다.
다행히도 마취는 성공적인지 환자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제야 태수는 메스를 들었다.
혼자 수술해야 할 상황이었기에 수술 도구를 주변에 늘어놓았다.
집기 편하도록 한 일이다.
“후우.”
짧은 숨으로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힌 태수가 서서히 환부를 가르기 시작했다.
푸아악!
태수의 예상대로 갈라진 환부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 피는 태수의 얼굴은 물론 입고 있던 하얀 가운도 흠뻑 적셨다.
하지만 태수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바로 환부에 거즈를 가득 쑤셔 넣었다.
피로 물든 거즈를 꺼낸 순간 태수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이건.”
순간 태수의 얼굴에 절망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 환자의 내부가 진탕이 되어 있었다.
주요 혈관도 모두 끊어졌고, 장과 간이 뒤섞여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건 태수가 가진 수술 도구와 의약품으로는 절대 회복시킬 수 없는 상처였다.
그래도 방법이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태수는 다시 손을 움직이려 했다.
우선 장과 간부터 분리시키고 대망(Greater omentum, 위아래 붙은 그물 같은 지방)으로 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끊어진 주요 혈관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살필 때였다.
환자의 상태가 변했다.
심전도 모니터도 없고, 인공호흡기도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태수는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걸 직감했다.
그 증거로 계속 이어지던 출혈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주요 혈관이 터진 상황에서 피가 줄어드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태수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서서히 고개를 들어 환자 얼굴을 바라봤다.
천정을 보고 누워 있던 얼굴이 어느새 옆으로 젖혀진 모습이다.
사망.
태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환자 상태였다.
“아니야, 아직.”
태수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얼른 가슴을 힘껏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