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55
00156 156화
카르카는 옆에서 보고 있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부모의 입장이다.
왜 라케쉬 어머니가 저리 나오는 지 모르지않았다.
자신이라면?
비슷하게 행동할 듯 했다.
태수가 다시 한 번 라케쉬 어머니의 간절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이다.
꽉.
태수는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라케쉬 어머니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대로 힘없이 무너져 내린 라케쉬 어머니에게서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스윽.
태수는 천천히 혹시 몰라 품에 몰래 숨겨온 빈 수혈팩을 꺼내 들었다.
손에 수혈팩을 든 태수는 자신을 향해 한마디 했다.
‘태수야. 너 이제 의사하지 마라.’
환자를 위해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의사.
그건 의사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차라리 의사가 아니고 싶었다.
꽈악!
빈 수혈팩을 강하게 쥔 태수가 천천히 돌아섰다.
“진짜 마지막입니다.”
카르카가 그 말을 전했는지 넋을 놓고 있던 라케쉬 어머니의 얼굴에 서서히 화색이 감돌았다.
끄덕, 끄덕, 끄덕!
몇 번이고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 그 모습과 더불어 떠오른 미소가 태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다.
모정.
그 뜨거운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
태수가 말하기도 전에 라케쉬 어머니는 얼른 자리를 잡고 누워 팔을 걷었다.
먼저 헌혈했던 주사 자국이 아물지도 않았다.
반대쪽 팔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아프다.
자식이 뭔지.
태수가 순간적으로 한국에 있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래도 뭐가 그리 좋은지 라케쉬 어머니는 손짓으로 재촉했다.
가슴이 저린 건 어쩌면 당연했으나 이내 냉정을 되찾은 태수도 이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무줄로 혈관을 두드러지게 하고 바늘을 꽂으려는 순간이었다.
투두두두!
하늘에서 난데없이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미약한 소리다.
하지만 너무도 조용한 방안이었기에 그 소리마저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순간 태수와 라케쉬 어머니의 시선이 마주쳤다.
‘들었습니까?’
‘들었어요?’
눈빛으로 오가는 물음.
서로 또다시 눈빛으로 대답하기 전이었다.
투두두두.
점점 커지는 헬기 소리.
그 뒤를 이어 카르카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타다닥!
재빨리 창문을 열어젖힌 카르카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헬…… 헬기, 헬기다! 헬기라고!”
카르카가 크게 소리치자 태수도 재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그리고 그 창공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헬기 한 대.
전에 마을에 커다란 선물 보따리를 내려다 주고 간 바로 그 헬기다.
태수는 더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헬기는 어느새 마을 입구에 있는 공터에 내려서고 있었다.
주변은 프로펠러가 만들어낸 거센 바람에 먼지가 가득 날리는 모습이다.
거센 바람이지만 태수는 개의치 않고 몸을 낮춰 뚫고 다가갔다.
벌컥!
헬기 출입문이 거칠게 열리고 수혈팩을 가득 안고 있는 낯선 남자가 보였다.
첫눈에 봐도 라케쉬와 비슷한 인상이다.
상처가 가득한 얼굴.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가득한 표정.
게다가 한쪽 팔에는 부목까지.
그래도 태수는 혹시나 싶은 얼굴로 소리쳤다.
“라케쉬 아버지!”
끄덕.
낯선 남자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태수는 그의 손을 잡아채고 그대로 헬기에서 끌어내렸다.
지체할 시간?
아예 없다.
지금은 통성명도 중요하지 않았고, 그가 어떻게 왔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가 안고 있는 수혈팩, 그리고 그의 몸이다.
태수는 거침없이 그를 이끌고 임시 병원으로 내달렸다.
아니, 그가 더 빨랐다.
오히려 태수를 앞질러 잡아끄는 형국이다.
그 또한 다급함에 얼굴색이 잿빛이다.
태수와 라케쉬 아버지는 서로 마음이 바쁜지 동시에 임시로 만든 병실에 들어섰다. 침대 위에는 입 주변에 검붉은 피가 흘러내린 라케쉬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어린 나이.
그 어린아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아무리 제삼자라 하더라도 차마 보기 힘들었다. 더구나 아버지 입장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라케쉬!”
라케쉬 아버지가 안색이 급변한 채 거의 부르짖다시피 소리를 높이며 침대 옆으로 달려갔다.
안색이 하얗다 못해 백지장처럼 창백한 아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은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모를 일이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반면 태수의 눈에는 다급함이 스쳤다.
일 초 일 초가 급한 라케쉬 상태였기에 더 이상 부자 상봉의 감격을 느끼게 할 여유가 없었다.
태수는 뒤에 대기하고 있던 카르카에게 바로 소리쳤다.
“어서 수술실로.”
“빨리 갑시다.”
카르카도 두말하지 않고 재빠르게 나섰다.
그도 또래의 아이가 있는 아버지다.
그동안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또한 가슴이 미어지고 있었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줬다.
라케쉬 어머니가 태수의 하얀 가운을 잡았다.
지치고 힘든 기색이 느껴졌지만 강한 바람도 함께였다.
“제발!”
태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미다.
***
잠시 후 태수는 수술대 위에 오른 라케쉬에게 일단 가져온 수혈팩부터 달았다. 조금 양이 과하다 싶을 정도였지만 태수는 개의치 않았다.
차라리 수혈할 피가 넘치는 게 좋다. 라케쉬 아버지가 가져온 수혈팩이 충분했기에 냉정하게 안전함을 택했다.
바로 수술 준비를 마친 태수가 카르카에게 말했다.
“두 사람 모두 감정이 격해져 있을 겁니다. 절대, 들여보내서는 안 됩니다.”
“밖은 신경 쓰지 마시고…….”
“압니다. 어떤 목숨인데요. 절대 이대로 보내진 않을 겁니다.”
태수의 단호한 목소리에 카르카가 고개를 다부지게 끄덕였다.
“어려운 치료 같은데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수술 말씀이십니까?”
“네.”
“한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태수가 결연하게 외쳤다.
카르카가 나간 직후 태수가 입술을 악물었다.
사비.
그 기억이 아직 뇌리에 생생하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다.
어쩌면 또 다른 시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할 수 있다면?’
중얼거리는 태수 눈에 섬광이 번뜩일 정도였다.
이내 마음을 다잡은 태수가 본격적으로 수술에 들어갔다.
혼자 하는 수술이지만 두렵진 않았다.
우선 카르카의 마취 강도부터 높이고 깊은 최면에 빠지길 기다렸다.
그 시간은 불과 5초 내외.
하지만 태수에게는 그 시간마저도 초조했다.
“삼…… 사……. 지금!”
숫자까지 일일이 센 태수는 다섯이 되는 순간 마취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메스로 라케쉬의 배를 갈랐다.
고정형 리트렉터로 벌리니 환부가 태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땅땅하게 부풀어 오른 위장.
벌써 위장의 위쪽 일부가 괴사한 상태였다.
다행히 동맥에 손상이 간 상태는 아니다.
다만 정맥의 일부에서 피가 새어나오는 상태였다. 그 외에도 괴사한 조직 부근에 있는 미세혈관들도 터져 출혈을 더욱 가중시켰다.
“네놈들이었단 말이지?”
태수는 은은한 분노까지 내보였다.
이윽고 이어지는 손길 또한 거침없이, 그리고 냉정하게 움직였다.
차분하면서도 일정한 리듬으로 수술했던 그전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다.
전보다 조금은 투박하고 거친 손길까지.
감정이 손기술을 잡아먹었는지 살짝 퇴보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대량 출혈로 인해 큰 문제가 발생하기 직전이다. 그렇기에 태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빠르고 신속하게 필요한 부분만 조치했다.
그런 이유가 수술 속도를 올리게 만들었고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투박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재깍재깍.
초침이 그저 흘렀다.
태수는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수술의 성공 여부는 차후 문제다.
지금 태수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온 정성을 다해 꺼져 가는 어린 생명에게 다시 빛을 주려 노력할 뿐이다.
혼자 하는 수술이 쉬울 리 없다.
이럴 땐 하다못해 김혁권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하는 심정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힘들다?
그런 느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
장장 4시간의 수술이 드디어 끝을 보였다.
“휴.”
태수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나왔다.
처음에는 투박하면서도 거칠었던 수술이지만 깔끔한 마무리를 거치자 볼썽사나웠던 부위는 어느새 매끈하게 변했다.
지혈을 우선으로 조치한 후 다시 원래 페이스대로 한 번 더 환부를 살펴본 덕분이었다.
마지막으로 피부 봉합까지 마친 태수가 봉합사를 끊었다.
탁!
그리고 난 직후였다.
털썩.
태수는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극심한 피로감에 그대로 수술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징하다.”
수술하기까지 길고 긴 여정에 대한 푸념이었다.
한마디로 살이 바짝바짝 마르는 경험이었다.
“어머니라…….”
태수가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한 번 더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 그 순간 태수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만약 라케쉬 어머니에게서 세 번째 헌혈을 해야 할 순간.
그때와 같은 상황이 또 온다면 어떻게 할까?
태수는 순간 피식 미소를 흘렸다.
“의사 때려치우지 뭐.”
그때의 그 간절한 눈빛만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그 눈빛 앞에서는 아무리 냉정하려고 해도 냉정해질 수가 없었다.
이젠 부모에게 이 기쁜 소식만 전하면 됐다.
이 맛이다.
메스를 든 의사란 직업이 더없이 행복해지는 순간이다.
***
그 후 몇 시간이 지났다.
다행히 라케쉬는 회복이 더디지 않았다.
너무 늦은 수술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단지 기우에 불과했다.
사람의 생명력, 특히 어린아이는 상상외로 회복 속도가 빨랐다.
태수가 라케쉬의 차도를 확인하는 사이 뒤에는 두 사람이 자리해 있었다.
서로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두 사람, 라케쉬의 부모였다.
그제야 태수는 라케쉬 아버지에 대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라케쉬의 아버지는 처음 지진 여파에 휘말려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 포카라로 돌아왔을 때 내려간 마을 사람들을 만나 라케쉬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그 길로 터키 의료진의 텐트로 마구잡이로 들어가 무릎 꿇고 빌었다고 한다.
뒤를 이어 도착한 마을 사람이 태수가 적어준 종이를 건넸고 터키 의료진은 기꺼이 헬기까지 불렀다고 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모든 해당 혈액과 RH-B, 그리고 RH-O형들을 수배해 품에 안겨 줬다고 했다.
태수는 그런 뒷이야기를 듣자 새삼 가슴이 뭉클했다.
마지막 수술이란 점을 제외해도 꽤 오래 기억에 남을 일이기도 했다.
이젠 안심해도 될 상태란 점이 태수를 평온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때 눈치를 보던 카르카가 슬쩍 물었다.
“그런데 다음 마을로 가실 시간이 너무 늦어진 거 아닙니까?”
“아무렴 어떻습니까. 이제 다 해결됐으니까 천천히 가면 되죠.”
“그쪽에도 아픈 사람이…….”
“저보다 발 빠른 분들도 계시니까요.”
“아! 그러네요.”
카르카도 그제야 ABC에서부터 역으로 내려오는 의료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것 같았다.
태수가 카르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딱 하루만 더 있다가 출발하죠.”
“저야 뭐 얼마든지요.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라케쉬 어머니가 저녁에 밥 한 끼 차려 주신다네요.”
“그래 봐야 전투식량 아닙니까?”
“누가 주느냐에 따라서 맛이 달라지는 게 음식 아니겠습니까? 하하.”
태수가 밝은 웃음을 터뜨리자 카르카도 똑같이 크게 웃었다.
날씨도 좋고, 기온도 적당하고.
“웃기 참 좋은 날이죠?”
이튿날.
두 번째 마을을 지난 태수는 세 번째 마을에 도착했다.
그런데 태수와 카르카는 둘 다 도보로 마을에 들어섰다. 크로키가 야크를 타고 마을로 돌아간 탓이었다.
마을 전경을 바라보니 어느새 도착한 의료진이 머물고 있는 의료텐트가 따로 떨어져 설치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위생상의 문제 때문인 것 같았다.
태수가 마을을 둘러보는 사이 카르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텐트로 가실 거죠?”
“그래야죠.”
“그럼 먼저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 있으십니까?”
태수의 물음에 카르카가 바로 대답했다.
“이 마을에 잘 알고 지내는 셰르파가 있습니다. 그 친구와 가족이 어떻게 됐는지 걱정이 되네요.”
“그럼 가 보셔야죠. 통역은 더 안 해 주셔도 될 거 같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실례하죠.”
카르카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태수에게서 멀어져 갔다.
어차피 태수가 곧바로 포카라로 돌아갈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헤어짐의 인사는 하지 않았다.
카르카가 마을로 향하자 태수는 반대로 의료텐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