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61
00162 162화
오히려 김혁권이 쓴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건 아는데, 그래도 아쉽기는 하네.”
“저도 그러네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렇게 뻔뻔하게 말하면 좋습니까? 됐고, 뉴델리에 오면 전화해요. 내가 밥은 한 끼 대접할 테니까.”
“혁권 씨.”
“내가 갑자기 해고 통보 받아서 기분이 더러우니까 지금은 더 이야기하지 맙시다. 먼저 갑니다.”
김혁권은 휙휙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그 뒷모습이 왠지 쓸쓸했다.
태수 또한 즐겁지만은 않았다.
무려 2년하고도 반 가까이 함께 지냈던 사이다.
“흠.”
태수의 입에서 작은 침음성이 흘러나오자 옆에 있던 정민수가 한마디 했다.
“뉴델리 가면 겁나게 퍼마셔야겠는데?”
“그러게 말이다.”
“그리고 나도 생각해 봤는데. 혹시 동성의료원에 자리 있으면 말 좀 해 줘. 나도 전문의 준비하려면 들어가긴 해야 하니까.”
“1년차부터 다시 할 수도 있어.”
“뭐 어쩌겠냐. 다 내가 자초한 일인데.”
정민수는 의외로 호탕하게 나왔다.
예전에 가지고 있던 나약함과 소심함을 이젠 정말 찾아볼 수 없었다.
“이야기는 해 볼게. 그전에 일단 가서 좀 쉬자.”
태수는 정민수의 어깨를 가볍게 두르고 숙소로 향했다.
멀어져 가는 김혁권의 뒷모습이 조금은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녁 식사 후 정민수가 씻으러 간 사이 숙소의 딱딱한 침대에 걸터앉은 태수는 휴대폰을 들었다.
서울에 있는 석재봉 과장과 전화하기 위함이었다.
그간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면 한 번씩 전화를 했다.
한 번도 돌아오란 재촉을 하지 않았고 월급 또한 어기지 않고 통장으로 넣어줬다.
고맙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뚜루루.
통화 연결음 소리가 몇 번 들린 후 석재봉 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최 선생.”
“안녕하셨습니까?”
“벌써 석 달이 지났나? 시간 참 빨라.”
“전 매번 전화할 때마다 살아있다는 데 감사하고 있습니다.”
태수가 넉살을 부리자 석재봉 과장도 수더분하게 통화를 이어갔다.
“그런 감사함도 이젠 이번이 마지막이지?”
“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번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야. 그 혹독한 환경이 최 선생을 얼마나 단련시켜줬을지 솔직히 기대도 되고.”
“감사합니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태수의 목소리가 짐짓 내려앉자 석재봉 과장 목소리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혹시 다른 곳으로 간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닙니다.”
“그럼 좀 안심하고 들어도 되겠군. 그래. 뭔가?”
석재봉 과장의 목소리가 한결 편안해졌다.
태수가 어떻게 튕겨 나갈지 예측할 수 없기에 더더욱 긴장한 모양이었다.
태수는 작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하게 물었다.
“여기서 같이 의료 활동하고 있는 동기가 있다고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기억하십니까?”
“정…… 민수 선생이었지?”
“네. 그 친구가 동성의료원에서 같이 일하고 싶다고 합니다. 계속 이런 염치없는 부탁만 드려서 죄송합니다.”
태수는 사과부터 건넸다.
그런데 의외로 석재봉 과장은 호쾌하게 대답을 줬다.
“그 친구 1년차는 마치고 연성대학병원 그만뒀다지? 그럼 2년차부터 시작할 수 있게 해야겠군.”
“가능하겠습니까?”
“뭐 어려울 거 있나.”
“감사합니다.”
태수가 정중하게 인사하자 석재봉 과장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건 들어와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일단 정 선생은 같이 오는 걸로 알고 있지.”
“그럼 그때 찾아뵙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통화를 종료한 태수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석재봉 과장이 선뜻 정민수를 받아주겠다는 뜻을 모르지 않았다.
첫째는 자신을 향한 신뢰감이다.
지금까지 월급 한 번 밀리지 않고 통장으로 지급해 준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정민수의 실력 때문이다.
야전에서 2년 넘게 의료 활동을 했다면 그만큼 실력이 갖춰졌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물론 정민수의 실력은 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카프레네의 지식을 대부분 습득한 태수와는 조금 달랐지만 정민수 나름대로는 커다란 발전을 이룬 게 사실이다.
“이 양반도 대단해.”
순식간에 그런 생각을 정리하고 결정을 내렸다는 것만 봐도 석재봉 과장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다시 깨닫게 됐다.
고개를 저었다.
태수는 일단 허락 받았다는 것만 생각했다.
한국에 들어간 후에 어떤 이야기가 진행될지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 시원하다. 역시 여기 샤워실이 가장 인간적이라니까.”
정민수가 머리를 털며 들어오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민수야. 한국 가자.”
“어. 어? 그럼.”
끄덕.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정민수가 머리를 털던 수건을 천장으로 던지며 환호성 쳤다.
“야호!”
“애냐?”
“으하하하! 그래도 기분 좋다!”
정민수는 그저 한국에서 받아주는 병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모양이다. 길이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얼굴이다.
“자식.”
태수가 빙그레 웃었다.
태수는 굿모닝어스 직원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돌아간다는 이야기에 기분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특히나 태수 덕분에 PKO 베이스캠프에서 입지가 올라간 굿모닝어스였기에 더더욱 아쉬워했다.
그래도 결정을 내린 사항이었기에 태수는 번복하지 않았다. 돌아간다는 통보를 마친 후 삼십 분도 지나기 전에 직원이 다녀갔다.
종이에 출력한 비행기 예약 사항을 건네주기 위함이었다.
직원이 돌아간 후 태수와 정민수는 바로 프린트 된 종이부터 확인했다.
5일 후 뉴델리 공항에서 출발하는 스케줄이다.
최소한 그때까지는 자유시간이다.
정민수가 태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래?”
“어떻게 할까?”
“내가 먼저 물었잖아.”
정민수가 양보 없이 대답을 원하자 태수는 잠시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마음 편하게 쉬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인턴 때부터였던 걸로 기억 됐다.
그렇다면 약 4년 동안 휴식 없이 달려왔다는 말과 같다.
그런 생각이 태수로 하여금 입맛을 쓰게 했다.
자신을 위한 시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 번은 꼭 그 시간을 갖고 싶은 마음이다.
“놀자.”
“정말?”
“응.”
태수가 간결하게 대답하자 정민수가 눈을 키우며 물었다.
“여기는?”
“우리 없으면 안 돌아가?”
“그건 아니지만. 갑자기 왜?”
“나도 나한테 선물 하나는 주고 싶어서.”
“크. 그 말 확 와 닿네. 좋아! 놀자, 아주 쌔빠지게 한번 놀아보자!”
정민수가 바로 태수의 의견에 동조했다.
자유.
그건 생각만 해도 들뜨게 하는 단어였다.
열심히 일했던 두 사람이기에 더더욱 해 보고 싶은 일탈이기도 했다.
그 뒤로 일정에 대해 상의한 태수와 정민수는 다음 날 아침에 뉴델리로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내일 출발하려면 오늘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모두 해야 했다.
저녁 식사를 한 후라 밤으로 접어드는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모두에게 인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미 안면이 있는 의사들 모두 태수가 곧 떠날지도 모른다는 건 알고 있다.
태수가 파견지와 베이스캠프를 오가며 조금씩 그런 뉘앙스를 흘렸던 탓이다.
불쑥 떠나는 것보다는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정겨운 인사는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다.
“가자.”
“고고!”
정민수도 얼른 태수와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숙소를 나선 두 사람은 그동안 인연이 닿았던 NGO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인사했다.
닥터 오즈마와 닥터 이작손.
그 외에도 닥터 조나단이나 캐서린, 루미에 간호사 등, 카슈미르에서 또 네팔로 파견 나갔을 때 함께 환자를 돌봤던 의료인을 우선적으로 찾아갔다.
그 후에는 베이스캠프에서 가끔씩 머무르며 안면을 익히고 도움을 구했던 의사들에게도 인사했다.
외과뿐이 아니라 내과나 안과 등.
태수와 정민수가 그동안 신세진 의사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들 모두와 인사를 하니 어느새 깊은 밤이었다.
태수와 정민수는 마지막으로 닥터 제임스의 텐트로 향했다.
이미 알아본 스케줄 상 수술이 잡혀 있지 않았다.
오늘은 신나게 마시며 그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닥터 제임스의 텐트 안으로 기별을 넣었다.
“닥터 제임스. 닥터 제임스?”
태수가 조심스럽게 부르자 안에서 닥터 제임스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예의를 보이며 안으로 들어간 태수와 정민수가 멈칫했다.
닥터 제임스의 짐이 대부분 정리가 되어 있던 탓이다. 먼저 정신을 차린 태수가 빠르게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아프리카에 좀 다녀올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보다 오늘 돌아왔나?”
“아, 네. 잘 다녀왔습니다.”
아차 싶은 태수와 정민수가 동시에 인사했다.
가벼운 눈인사가 아니라 깊숙이 허리를 굽혀 정중한 예의를 보였다.
그게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한 두 사람이었고, 닥터 제임스도 이제는 그런 인사를 받는 데 익숙해진 모습이다.
“수고했어. 여기저기서 다 들었으니까 더 추가로 들을 이야기는 없는 거 같고. 왜 이 시간까지 돌아다니고 있나? 지금쯤이면 일찌감치 뻗을 시간인데 말이야.”
“그것도 그겁니다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돌아간다고 했다지?”
닥터 제임스가 먼저 말을 꺼내자 정민수가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태수는 당황하기보다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네. 이젠 돌아가야 할 거 같습니다.”
“오래 있긴 했지. 처음 예정이 두 달이었다는데 2년 반을 넘게 있었으니 말이야.”
“그만큼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민수가 얼른 뒤따라 인사했지만 닥터 제임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자네들이 열심히 한 결과니까. 그럼 언제 출발하나?”
“내일 아침에 뉴델리로 떠날 예정입니다. 오늘부터 5일 후로 비행기가 예약되어 있어서 좀 쉬기도 하려고요.”
“2년 만에 받는 휴가가 4일이라. 너무 짠 거 아닌가?”
“한국에 돌아가도 바로 일하는 건 아니니까 좀 더 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태수의 말에 닥터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이 되지. 그럼 어차피 나도 내일 뉴델리로 출발할 예정이었으니까 같이 가지. 비행시간까지는 하루 정도밖에 여유가 없기는 하지만, 전에 술 한잔 제대로 하자고 했으니까 이번에 그 자리를 갖자고.”
“저야 감사합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가 아직 자네 같은 애송이에게 걱정 받을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닥터 제임스의 눈빛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농담이라는 걸 안 태수도 얼른 받아쳤다.
“오랜만에 술 많이 드시면 비행에 지장이 있을까 봐 그럽니다. 전 젊어서 괜찮지만요.”
“하하. 그건 가서 술 한잔 마셔보면 알겠지.”
“그럼 기대하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친 태수와 정민수는 다시 인사하고 닥터 제임스의 텐트를 벗어났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사이 태수가 정민수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
“넌?”
“저기.”
태수가 가리킨 건물 앞에는 PKO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정민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기다리고 잔다.”
“치사한 놈.”
“원래 잠은 능력껏 자는 거야. 그럼 먼저 간다.”
툭.
정민수는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고는 멀어져 갔다.
태수도 바로 방향을 돌려 PKO 건물로 향했다.
PKO 건물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건 카슈미르 각지에 퍼져나간 의료진들의 응급후송 요청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 일조한 게 바로 태수 본인이었다.
2년 반 사이 태수가 PKO의 헬기를 호출한 건 손가락, 발가락을 다 합쳐도 턱없이 모자랐다.
분쟁 지역에 방치된 환자들 중 큰 수술을 받아야 할 환자들이 그만큼 많았던 탓이다.
게다가 다른 지역도 간간이 응급 후송 요청을 하니 PKO 군에서는 아예 24시간 대기조를 만들어 응급상황에 대처했다.
태수는 PKO 건물로 들어가 클라크 대령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집무실 겸 숙소로 같이 사용 되는 방이다. 안은 소파와 책상, 그리고 한쪽에 커튼으로 가려진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고위 장교지만 군인답게 화려함보다는 실속만 가득한 방이기도 했다.
클라크 대령과 악수를 한 태수가 먼저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온 거 아닙니까?”
“무슨 말씀을요. 닥터 최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번 이렇게 환영받으니까 진짜 부담스럽네요.”
“무슨 말씀을. 당연한 거죠. 일단 앉으실까요?”
클라크 대령은 태수를 마치 상관처럼 극진하게 대했다.
여러 분쟁 지역에 의료진이 지속적으로 파견될 수 있게 길을 열은 태수였기에 그만큼 존경의 의미도 있었다.
태수는 그게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한결같은 클라크 대령의 우직함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