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812
01815 1815화
김혁권이 있으면 식염수로 복부 속의 지저분한 찌꺼기부터 걷어 내 줬을 터다. 그러면 태수는 깨끗해진 장을 꿰매기만 하면 된다.
지금은 그 모든 걸 혼자 해내야 한다.
그건 솔직히 조금 무리였다.
조셉 쪽을 힐끔거려 봤지만 태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할 것 같았다. 수술 장면은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있는 힘껏 디버만 당기고 있었다.
디버라도 당겨 주는 게 고맙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어떻게 시간을 단축한다?
시간 단축도 문제지만 위생과 감염에 관련된 일이라 태수의 생각이 깊어져 갔다.
그때였다.
스윽.
태수의 이마를 훔쳐 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맙……. 어?”
무심코 대답하며 돌아보던 태수가 상대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사이먼 기자인 탓이다.
“집중력 끝내주는데? 들어와서 촬영하는 것도 모르던데.”
“언제 왔는데?”
“10분 정도. 그보다 얼굴이 허연데.”
사이먼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겨우 이 정도에?”
“우리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 잠도 제대로 못 잤고.”
“…….”
“그런데 그렇게 집중했으니 안색이 질릴 만하지.”
사이먼 기자는 날카롭게 현실을 지적했다.
하지만 태수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빨리 돌아가서 욕부터 먹으려고. 지금은 밥보다 그게 먼저 먹고 싶어.”
“그거 좋은 생각이네. 그런데 잘되어 가나?”
“이제 잘되어 가려고.”
“뭔 소리야?”
사이먼 기자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태수가 말했다.
“나 좀 도와줘야겠는데.”
“어?”
“그 험한 전쟁터를 누비며 끔찍한 장면도 많이 봤을 종군기자에게 수술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
태수가 자극하자 사이먼 기자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째 잘못 들어온 거 같은데.”
“아니야. 적시에 딱 들어왔어. 그런 의미에서 수술 장갑 껴.”
“…….”
“우리 여기서 살 거 아니잖아.”
태수가 자극하자 사이먼 기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게 아닌데.”
“이게 맞아. 지체하면 또 해 떨어져.”
“아직 오전이거든.”
사이먼 기자가 소심한 저항을 했지만 태수는 시작부터 뭉개고 들어갔다.
“금방 오후 되고 저녁 돼.”
“……젠장. 기다려.”
사이먼 기자는 태수의 막무가내 이론에 졌는지 수술에 참여할 준비를 시작했다.
태수가 자그맣게 미소 짓는 사이였다.
“용병술이 생각보다 뛰어난데.”
부사령관의 목소리에 태수가 그를 힐끔 쳐다봤다.
“필요하면 당신 손이라도 빌려야지.”
“그건 좀 잔인하지 않나?”
“그 입에서 ‘잔인’이란 단어가 나오니까 참 생소한데.”
태수의 한 방에 부사령관이 침묵했다.
“…….”
“가급적이면 수술 끝날 때까지 그렇게 조용히 있어 줘.”
태수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사이먼 기자를 대할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호불호가 분명한 태수의 성격이 그렇게 조금 더 확실하게 드러났다.
곧 사이먼 기자가 하얀 수술 장갑을 낀 채 옆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saline(식염수)라고 적힌 투명한 액체들 보이지?”
“그런데?”
“그거 뜯어서 배 속에 부어.”
“그걸 어떻게 다 빼내려고? 아니다. 내가 물어봐야 뭘 알겠어.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거지.”
사이먼 기자는 포기가 빠른지 바로 움직였다.
콸콸.
벌어진 환부 사이로 투명한 식염수가 쏟아져 들어갔다.
그 식염수에 섞여 복부 속 음식물 찌꺼기들이 요동쳤다.
“그만.”
사이먼 기자를 멈추게 한 태수는 재빨리 거즈로 식염수와 음식물 찌꺼기를 동시에 걷어 내기 시작했다.
일차적으로 걷어 낸 후에는 거즈를 수술 도구로 잡고 배 속을 속속들이 훑어냈다.
하지만 그건 한계가 있었다.
환부는 작고 복부는 넓었기에 수술 도구로는 닿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환부를 더 넓힐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멈추고 봉합에 들어가?
그렇게 되면 당장은 문제가 없다고 해도 결국 복막염이 발생한다.
지금도 복막염 직전이었다.
이대로 방치해 복막염이 발생한다면 단순히 소염제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부사령관이 언제 다시 의사를 만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태수는 고민하다 부사령관을 쳐다봤다.
태수의 말대로 조용히 있던 부사령관이 의아한 눈빛으로 변할 때였다. 태수가 먼저 그에게 물었다.
“배에 구멍 하나 더 만들어도 될까요?”
“문제가 있나?”
“심각한.”
“음, 어쩔 수 없지.”
그의 대답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이먼 기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식염수 부어.”
“또?”
“이번에는 왕창.”
“생고생하며 빼내더니……. 일단 알았어.”
사이먼 기자는 의아한 얼굴이었지만 더 따지지 않고 수긍했다.
그런 그가 식염수를 환부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점점 차오른 식염수는 곧 환부에서 넘쳐흘렀다.
그때 메스를 들고 있던 태수의 손이 움직였다. 정확하게 복부 상처의 반대쪽인 후복부 방향이었다.
아래쪽에서 약간 대각선 방향으로 태수의 메스가 움직였다.
그렇게 갈라진 틈으로 먼저 흘러내리는 건 피였고, 그 피가 점점 묽어지더니 식염수와 찌꺼기가 같이 쏟아져 내렸다.
의료 시설이 조금만 더 갖춰졌다면 절대로 시도하지 않을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갖춰지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태수의 행동을 지켜보며 식염수를 붓던 사이먼 기자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야, 무슨 사람 몸이 욕조야? 물을 가득 채우고 밑에 구멍 내서 빼 버리게.”
“이런 상황에 적절하진 않지만 확실한 비유긴 하네.”
“그런데 이래도 되나?”
“기껏 수술해 놓고 복막염 때문에 문제가 되면 죽어라 수술 하나 마나야.”
태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물론 즉흥적이고 과감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이 열악한 수술 환경에서 이보다 더 효과적인 세척 방법도 없었다.
그 증거로 식염수가 쏟아져 나올수록 찌꺼기의 양이 점점 줄어들었다.
덕분에 식염수에 시트가 젖고, 그것도 모자라 침대 아래까지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흙바닥이라서 금세 흡수되어 크게 티가 나진 않았다.
식염수를 무려 10팩 넘게 들이붓고야 배 속에서 찌꺼기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대략 10리터에 가까운 물을 부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많은 양을 부어야 했던 건 역시 썩션이 없어서였다. 만약 썩션이 있었다면 식염수 사용량이 반 이하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낭비가 심한 처치 방법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태수가 조명에 배 속을 비춰 보니 찌꺼기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장과 장 사이에 교묘하게 남은 찌꺼기는 있었다. 그건 태수가 거즈로 훔쳐 내 걷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복부 세척을 마무리 지은 태수는 이어서 봉합에 들어갔다.
소장의 세 곳이 찢어졌고, 상행결장의 일부도 총알에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거기에 3일 동안 방치되어 썩은 부위는 원래 상처보다 더 넓었다.
태수의 손은 과감했다.
서걱서걱.
메젠바움으로 썩은 부분을 거침없이 도려냈다.
다른 손으로는 보조하고, 또 자른 후에는 다른 병변을 찾는 걸 쉬지 않았다.
어느새 다시 태수의 독무대였다.
하지만 그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태수만이 유일한 의사였기에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모든 걸 해내야 했다.
썩은 조직을 잘라 낸 후에는 바로 봉합에 들어갔다.
그 또한 태수 홀로 해야 할 일이었다.
뒤로 밀린 사이먼 기자는 태수의 현란한 손짓에 넋을 놓고 바라보다 아차 했다.
자신은 이 순간에도 기자였다.
피 묻은 수술 장갑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른 내려놓은 카메라를 들었다.
이 모습을 촬영해야 한다.
이게 태수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모습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손길이 아름다웠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홀로 춤을 추는 느낌이었다.
또한 태수의 수술 장면이 이상하게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카메라의 화면을 지켜보는 사이먼 기자는 중간중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복부 수술에 이어 허벅지도 수술했다.
허벅지는 다행히 바깥쪽으로 총알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고 쉬운 수술은 아니었다.
복부와는 반대로 가까이에서 쏜 총에 맞아 살점이 한 움큼이나 떨어져 나갔다.
썩은 근육과 조직을 긁어내고 새살이 돋을 수 있게 약을 듬뿍 바르는 걸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태수는 일부러 수술 부위를 붕대로 감지 않고 덧대고 덧댄 두툼한 거즈로 덮어 놓았다.
그리고 조셉에게 설명했다.
“허벅지는 살이 계속 차올라야 하니까 하루에 다섯 번 정도 소독하고, 약을 아낌없이 발라 줘야 합니다.”
“네.”
“복부는 마취가 풀리면 당기고 쓰릴 겁니다. 모르핀은 중독될 수 있으니까 알려 드린 진통제를 투여하세요.”
태수의 지시에 조셉은 아무런 반발도 보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식사는 3일 정도 금식시켜야 합니다. 이거랑 이걸로 위액 분비를 최소한으로 줄여 주시고요.”
태수는 몇 가지 설명을 자세하게 덧붙였다.
조셉은 진지한 얼굴로 들으며 노트에 적고 처치 방법을 꼼꼼하게 숙지했다.
다시 태수의 시선이 부사령관에게로 향했다.
수술도 끝났는데 괜히 감정 가질 필요는 없었다.
태수는 부사령관이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일단 존대했다.
“마취는 3시간 정도 후에 풀릴 겁니다.”
“아프지 않은 지금을 즐겨야 하나?”
부사령관의 질문에 태수가 감정을 접고 의사로서 소견을 밝혔다.
“그게 정신 건강에 좋으실 겁니다. 그리고 마취가 풀리면 몸이 좀 쑤실 겁니다. 그때 허리 조심하시는 게 좋습니다.”
“음.”
“그래도 갑갑하면 일어나셔도 됩니다. 단, 우기 때 허리가 저려서 고생하고 싶으시다면요.”
태수가 단서를 달자 부사령관이 움찔했다.
“그런가?”
“전 주의 사항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보다 수술은 잘된 거겠지?”
“직접 눈으로 보시지 않았습니까.”
태수의 말에 부사령관이 침묵했다.
“…….”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할 거 같습니다. 한숨 주무시는 게 아마 조금은 도움이 될 겁니다.”
태수는 말을 마친 후 돌아섰다.
그 주변은 간단하게 정리했지만 여전히 수술 도구들이 늘어져 있었다.
태수는 그걸 치울 생각까진 하지 않았다.
의약품이 담긴 상자를 건너는 사이 뒤에서 부사령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가나?”
“가야죠. 욕 좀 먹겠지만.”
“여기서는 닥터를 욕할 사람이 없는데. 이건 협박이 아니라 권유라고 해야겠지.”
부사령관의 말에 태수가 슬쩍 돌아보며 어이없는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협박을 하시죠.”
“그럼 남아 있을 건가?”
“어떨까요?”
태수가 대답을 넘기자 부사령관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가겠지.”
“그럼 가는 게 맞는 거겠죠.”
“다음에…… 다음에는 전쟁터가 아닌 다른 곳에서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
태수가 침묵한 채 바라보자 부사령관이 말을 이었다.
“술 한잔 정도는 괜찮잖아.”
“그거 아십니까?”
“어떤?”
“이곳이 아니었다면 만날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럼.”
태수는 끝까지 차갑게 말하고 텐트를 나갔다.
그 뒤를 따라 사이먼 기자가 나선 후였다. 텐트에 남은 부사령관이 입구 쪽을 바라보며 눈빛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러던 그가 손을 움직이더니 베개 밑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
잠시 권총을 바라보던 그는 다시 베개 밑으로 집어넣었다.
한편, 텐트를 나선 태수의 옆으로 사이먼 기자가 바짝 다가왔다.
“괜찮아?”
“뭐가?”
“상당히 지친 거 같은데.”
그의 말에 태수가 옅게 미소 지었다.
“돌아가면 쓰러져 자려고.”
“자게 놔둘까?”
“카메라로 찍었다며. 보여 주면 설명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겠지.”
“그건 그러네.”
사이먼 기자가 살짝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나 그의 걱정대로 태수는 지친 상태였다.
오전이 지나 벌써 오후였다.
수술 시간도 길었고, 갖춰진 게 없어 더욱 신경을 많이 썼다.
하지만 태수의 표정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환자가 누구인지를 떠나 수술 성공의 기쁨은 같았다.
그렇게 잔잔하게 미소 짓는 사이에 드레코의 텐트가 저 멀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