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848
01851 1851화
도성민과 정민수가 위스키를 채운 스트레이트 잔을 테이블에 길게 깔아 놓고 있었다.
“후후. 너 따위가 도전이라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뭔 말이 이렇게 많아? 시작하자고.”
그 말과 동시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진하게 응시하며 한 잔씩 똑같이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태수가 옆에 있던 김혁권에게 물었다.
“쟤들 왜 저럽니까?”
“누가 더 술이 센지 내기한다던데요.”
“왜요?”
“의사들끼리 주량의 2인자를 가려 보겠다나 뭐라나.”
“지들끼리 저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태수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자 김혁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나도 못 이기면서 끼리끼리 놀고 있습니다.”
“저러다가 알아서 뻗겠죠.”
태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가볍게 술을 마셨다.
그렇게 술자리가 이어지던 중이었다.
딸랑.
술집 문이 열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기지장에게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던 제임스와 NGO 의료팀이었다.
들어오던 그들이 태수와 일행들을 발견하고 원성을 쏟아 냈다.
“우리도 안 왔는데 벌써 시작한 거야?”
“시작이 아니라 아주 들이붓고 있는데.”
그들이 미소 띤 얼굴로 투덜거리며 들어오자 태수를 포함한 모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쪽입니다.”
“간다고, 가.”
“여기 술 왕창 주세요!”
“휘우!”
낮게 휘파람까지 불며 NGO 의료팀이 얼른 자리를 잡았다.
물론 제임스에게는 모든 의료진을 둘러볼 수 있는 좋은 자리를 양보했다.
곧 테이블에 새로운 술병이 도착했다.
맥주도 틈틈이 보였지만 대부분 위스키였다.
모두 술을 채운 잔을 들고 제임스를 바라봤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제임스가 있기에 이 자리가 마련되고, 또 빛날 수 있었다.
그런 시선을 본 제임스가 덤덤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쉬는 날인 만큼 양껏 마셔도 좋아.”
“오오!”
“다들 건강한 모습이라 내 기분이 무척 좋아. 자, 그럼 즐겨 보자고.”
“반갑습니다!”
쨍!
술잔을 부딪치며 환호한 모두가 동시에 술을 입으로 가져갔다.
파티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다들 오랜만에 술을 마시는지 엄청나게 마시고 또 마셨다.
장시간 긴장 속에서 살아온 그들에게 긴장이 풀리는 유일한 시간인 탓이다.
그동안 마시지 못한 술까지 마시겠다는 듯이 빈 위스키 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쉬는 건 하루뿐이었다.
다음 날 오후.
기지 내 회의장에 태수와 제임스가 좌우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기준으로 태수 쪽으로는 한국 의료진이, 제임스 옆에는 NGO 의료팀이 길게 자리했다.
오전까지 숙취에 시달리던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차분한 표정들이었다.
회의장 가운데에는 작전참모가 서 있었다.
그는 제임스의 앞이라서 그런지 전과 달리 약간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가 제임스를 행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제 도착하셨는데 며칠 더 쉬지 그러십니까?”
“회포는 어제 모두 풀었습니다. 즐거움은 한때고, 고통받는 분들은 많으니 해야 할 일이 우선이지요.”
“음, 역시.”
제임스의 말에 감탄한 작전참모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그 시선을 느낀 작전참모가 짧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흠흠! 그럼 우선 닥터 최와 의료진들의 일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한국으로 회항하는 수송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틀 후 기상이 너무 악화되지만 않으면 출발할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태수가 대표로 인사했다.
태수와 의료진은 감회가 새로운 얼굴들이었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단 소식이 반갑기도 하지만, 아직은 아쉬움이 조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울 순 없는 입장이었다.
태수와 대화를 끝낸 작전참모가 제임스에게 말했다.
“제임스 박사님과 NGO 의료팀은 내일 오전에 기지에서 출발할 겁니다. 목적지는 여기.”
탁.
짧게 말한 그가 지휘봉으로 크게 걸린 르완다 전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태수와 의료진이 다녀온 카나마 지역에서 좀 더 북쪽에 위치한 장소였다.
커다란 호수의 끝과 맞닿은 도시이기도 했다.
그곳을 본 제임스가 작전참모에게 말했다.
“그 지역의 히스토리를 간단하게 듣고 싶습니다.”
“최근까지 내전으로 전투가 끊이지 않았던 지역입니다. 며칠 전 정부군이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해 전선을 카나마까지 내리게 됐습니다.”
“최근에 수복한 지역이란 뜻인가요?”
“맞습니다. 그런 이유로 민간인의 피해가 상당할 거라 추측됩니다. 정부군 소식에 따르면…….”
작전참모가 말을 이어 가려던 찰나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군인 한 명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는 작전참모에게 빠르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 소리에 눈을 굴리던 작전참모가 모두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금방 올 겁니다.”
“그러시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잠깐 대화 나누고 계시기 바랍니다.”
작전참모는 빠르게 말을 마치고 군인을 따라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중요한 일인지 발걸음도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우자 태수가 제임스에게 물었다.
“꼭 내일 출발하셔야겠습니까? 하루라도 더 쉬시죠.”
“쉬긴. 죽으면 얼마든지 쉬어.”
“몸 관리 하셔야죠.”
“나이가 중요한가, 아니면 열정이 중요한가?”
제임스의 질문에 태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사과했다.
“제임스의 열정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나도 그런 뜻으로 받아들이진 않아. 다만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건 닥터 최나 나나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그래도 이젠 건강을 좀 더 신경 쓰셔야 할 땝니다.”
태수가 쉽게 물러서지 않자 제임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괜찮아.”
“잊으신 모양인데 제가 제임스의 수술을 집도했습니다. 이건 수술 후 경과 관찰로 내린 소견이니까 따라 주셔야 합니다.”
“감히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저니까 합니다.”
태수가 지지 않고 대답하자 제임스가 옅게 미소 지었다.
“많이 컸어.”
“더 클 겁니다.”
“말대답도 곧잘 하고.”
“제임스, 자꾸 말 돌리지 마시고요. 안색만 봐도 혈압이 좀 있으신 거 같습니다.”
“이 나이면 혈압이 높아지기 마련이지.”
제임스 또한 태수에게 져 주지 않았다.
한 걸음 물러서는 건 쉽지만 다시 한 발자국 나가기는 너무도 힘들단 걸 알고 있는 탓이다.
제임스가 아직 정정하다며 현역 생활을 이어 가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태수도 물론 알고 있지만, 이젠 쉬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단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제임스가 움직이겠다니 태수가 적극적으로 만류하기가 애매했다.
대신 에둘러 말했다.
“알겠습니다. 더 말씀드리지 않겠지만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뭐지?”
“아침에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닥터 오즈마나 닥터 브레드에게 꼭 바이탈 체크를 받겠단 약속입니다.”
“음.”
“일시적으로 바이탈이 낮아질 수 있단 걸 아시잖습니까. 그때만이라도 조심하시란 겁니다.”
태수의 말이 이어질수록 제임스의 표정은 조금씩 굳어져 갔다.
그럴수록 NGO 의사들의 얼굴은 몇 배나 빠르게 긴장되었다.
여기 어느 누구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다만 제임스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의사가 없을 뿐이었다.
제임스의 성정이 날카롭기 때문에 일부러 피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태수가 정면으로 항의하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여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잠시 날카롭게 바라보다 거짓말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몸 상태가 안 좋으면 오후부터 움직이도록 하지.”
“…….”
그 소리에 NGO 의료팀이 상당히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세상에서 제임스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딱 둘뿐이었다.
스미스와 미세스 카프레네.
그 두 사람 외에 제임스가 걱정하는 소리를 경청하는 모습은 그들도 본 적이 없었다.
제임스에게 태수가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그걸 섭섭해하는 의료 팀원들은 없었다.
제임스가 태수를 얼마나 아끼는지 그들이 더 잘 알고 있던 탓이다.
그리고 질투를 하기에는 그들도 태수를 너무 좋아했다.
다들 은밀한 긴장감에서 벗어나 가볍게 숨을 내쉬었지만, 태수는 빙글빙글 미소 짓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하.”
태수가 원하는 걸 이뤄 기분 좋게 웃을 때였다.
똑똑.
회의실 문에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수가 웃음을 지우며 바라보자 다들 고개 돌려 문 쪽을 쳐다봤다.
곧 문이 열리더니 작전참모가 들어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온 사람은 검은 피부에 40대 정도로 보이고, 특이하게도 양복을 입고 있었다.
이곳에 온 후로 양복을 입은 사람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예정에 없을 뿐만 아니라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에 모두가 의아한 시선으로 변했다.
그사이 다시 회의실 가운데에 선 작전참모가 같이 온 상대를 소개했다.
“복지부 소속 알레그로 씨입니다.”
“NGO 여러분, 그리고 한국에서 와 주신 감사한 의사분들에게 인사드립니다. 알레그로입니다.”
그가 정중한 태도로 인사말을 건넸다.
알레그로는 아마 영어식 이름일 터였다.
이곳 주민들의 특징은 원래 이름이 있지만 영어식 이름을 따로 만드는 것이다.
특히 루헹게리는 큰 도시에 속했기에 영어를 많이 사용했다.
그의 이름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궁금한 건 군인이 아닌 정부 쪽 관료가 이곳에 온 이유였다.
우선 다들 궁금함을 뒤로하고 앉은 채로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알레그로가 말했다.
“제가 이곳에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고 한 가지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말씀하시죠.”
제임스의 말에 알레그로가 그쪽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르완다의 남서쪽에 부가라마란 지역이 있습니다. 아, 지도로 설명드리면 이곳입니다.”
탁.
알레그로가 지휘봉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다들 그 지도로 시선이 향했다.
넓은 초원 지대였다.
그런데 지리적인 위치에 다들 눈빛이 굳어졌다.
콩고와 부룬디의 국경 지역이었다.
거기에 또 하나 특징이 있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반군이 점령한 지역을 통과해야 했다.
정부 쪽 사람이 반군 지역을 넘어 장소를 지목한 이유가 더더욱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을 눈치챘는지 알레그로가 이어서 말했다.
“여기는 보시다시피 반군의 영역을 지나야 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조금 독특할 겁니다.”
“어떤 점이 독특하단 겁니까?”
모든 의료진들의 대표인 제임스가 진중한 목소리로 묻자 알레그로가 바로 대답했다.
“여긴 부족 중심의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지역입니다.”
“부족 중심이라.”
“정부에도 반군에도 속하지 않은, 말 그대로 자신들의 문화를 지켜 가는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입니다.”
알레그로의 말에 태수가 가만히 듣다 아차 했다.
여긴 아프리카였다.
원래 부족 중심의 사회였다.
도시나 마을만 돌아다니다 보니 그걸 잠깐 깜빡했다.
그리고 사실 태수도 부족 중심의 문화를 경험해 본 적은 없었다.
카슈미르에서도 여러 민족들이 마을이란 단위로 묶여 어울려 살아갔던 탓이다.
태수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 알레그로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문명을 거부했다고 원시적인 삶만 고집하는 건 아닙니다. NGO 측에서도 아시겠지만 몇 년 전에는 의료봉사도 했던 지역이고요.”
“음.”
“더 정확하게 설명드리면 문화의 과도기를 겪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거 같습니다.”
제임스가 적당히 말을 끊자 알레그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 지역 일대는 정부나 반군의 영역이 아니란 겁니다.”
“그렇군요.”
“더 정확하게는 여기 부족들이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정부 입장에선 방치할 수만은 없는 국민들이고요.”
알레그로의 말에 제임스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인정합니다.”
“그건 반군 쪽에서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도 국경 내에 있는 국민들이니까요.”
알레그로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태수는 슬슬 답답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