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852
01855 1855화
잠시 후.
태수는 학교 마당에 차를 세웠다. 곧장 운전석에서 내리자 조수석에서 내린 사이먼 기자가 차를 빙 돌아 다가왔다.
도착과 동시에 사이먼 기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상당히 특이한 지형인데?”
“그러게. 우리가 온 쪽으로는 초원이고, 좌측에는 멀리 산이 있고, 우측 저쪽에는 호수인 거 같고.”
“아니, 그게 아니라 이 학교만 벽돌로 만들어진 모양이야. 저기, 저 끝에 보이는 게 가장 가까운 부족 같은데, 거긴 나무로 대충 얼기설기 지어져 있잖아.”
사이먼 기자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서로 보는 관점이 달랐다.
태수는 환경적인 요인을 먼저 확인했고, 사이먼 기자는 생활수준을 살피는 걸 우선으로 했다.
해야 할 일이 다르기에 관점이 다른 건 당연했다.
그때였다.
우르르.
뒤에 의료진들이 도착했는지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태수가 돌아보자 역시 모두 눈빛이 좋았다.
“마음 급한 건 아는데, 일단 여기 주인 허락부터 받아야 합니다.”
“알아.”
서영우가 대표로 대답하고, 다른 의료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학교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검은 얼굴과 대비되는 커다란 눈이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깔끔하고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그가 이 학교의 유일한 선생이란 건 옷차림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놀란 이유도 예상이 되었다.
여긴 통신 시설이 없었다.
그래서 정부도 반군도 여기에 누군가 온다는 통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대가 긴장하고 있는 걸 알기에 태수는 오히려 먼저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한국에서 온 의료팀입니다. 그리고 전 이들을 이끌고 있는 최태수라고 합니다.”
“잠시만요……. 지금 의, 의료팀이라고…….”
“맞습니다.”
태수의 말에 흑인 남자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정말입니까?”
“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기에 자리를 잡아도 되겠습니까?”
“아…….”
흔들리는 그의 눈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너무도 갑작스럽지만 또 간절히 바라던 일이 현실이 되자 가슴이 벅찬 모양이었다.
태수가 가만히 기다리자 그가 얼른 눈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애써 미소 지었다.
“반갑습니다. 제가 이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는 지제이입니다.”
“네. 저도 반갑습니다.”
“그런데 진짜 여기 의료봉사 오신 거 맞습니까? 죄송하지만, 의심해서 정말 죄송하지만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십시오.”
지제이는 자신의 두 귀로 똑똑히 다시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려울 것 없기에 태수는 바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여기에 의료봉사를 하러 왔습니다,”
“오, 신이시여.”
“…….”
“정말 감사합니다. 아시겠지만 몇 년 전에 NGO가 철수한 이후 아무도 오지 않아 정말 안타까운 일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지제이의 짧지만 의미 깊은 설명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러셨을 겁니다. 그런데 자세한 얘기는 조금 미루고, 저희가 일단 진료 천막하고 쉴 공간을 좀 마련해야 하는데요.”
“그럼요. 그러셔야죠. 마음껏 쓰십시오. 얼마든지, 뭐든지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땅만 좀 빌려 주시면 됩니다. 평평한 땅이 이 근처에는 여기밖에 없어서요.”
“쓰십시오. 혹시 숙소가 필요하시면 교실을 쓰셔도 됩니다.”
지제이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가득했다.
그는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사실 낯선 동양인들이 대거 등장했는데 이렇게 환영하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태수는 옅게 미소 지었다.
자신이 지제이라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리적 위치상 이곳에 오려면 반군 진영을 통과해야 하는데, 무사통과가 쉬울 리가 없었다.
내전과 관련 없이 지내는 그들이었지만, 어쩌면 이미 내전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태수는 그런 복잡한 생각은 뒤로했다.
자세한 건 지제이와 따로 대화를 해야 했다.
바로 뒤돌아선 태수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이제 짐 풀죠.”
“알았어.”
“그리고 발전기는 도끼하고 병태가 다룰 줄 안다고?”
태수가 묻자 도성민과 유병태가 진하게 미소 지었다.
“웬만한 건 이제 다 만질 줄 알아.”
“그럼 발전기 설치하고 가동해 줘. 수술 텐트에 조명 달아 주고.”
“걱정 마시라니까. 일단 텐트부터 설치합시다. 발전기는 내리는 것보다 트럭에 놓고 가동시키는 게 더 나으니까.”
도성민의 말에 태수가 좀 더 세세하게 지시했다.
“혁권 씨, 우선 남자들 죄다 데리고 텐트하고 천막부터 설치해 주세요. 그리고 이 간호사님하고 최 간호사는 의료품 정리해 주시고요.”
“알았어요!”
“거기까지 끝나면 물품 정리하고 개인 정비 하세요. 전 여기 선생하고 이야기 좀 하고 올 테니까요.”
“농땡이 적당히 치고 얼른 돌아옵시다.”
김혁권이 밉지 않게 삐죽거리며 텐트가 실린 트럭 쪽으로 향했다.
그 뒤를 모든 의료진들이 따라갔다.
태수가 없을 땐 김혁권이 이끌었고, 그걸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했다.
다들 분주해진 사이 태수가 지제이에게 말했다.
“좀 더 듣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어서 들어오세요. 아니,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지제이가 앞서 걸어가자 태수도 바로 몸을 움직였다.
학교 구조는 단출했다.
1층에 자리한 교실과 숙직실이 전부였다.
대신 천장이 높아 바람이 잘 통해 바깥보다는 확실히 기온이 낮았다.
우기지만 꿉꿉함도 덜했다.
태수는 교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커다란 칠판이 앞에 걸려 있고, 교과서가 뒤쪽에 쌓여 있는 게 특징이었다.
붉은 벽은 르완다 국토의 특징 때문이었다.
붉은빛의 흙으로 빚은 벽돌이라 붉은색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자극적인 붉은색은 아니라서 신경을 자극하진 않았다.
책상과 의자도 있었지만 학생 수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커다란 창문으로 한창 천막과 텐트를 설치하는 모습이 보였다.
태수가 둘러보는 사이 지제이가 다가왔다.
그가 낡고 자잘한 상처들이 표면에 가득한 컵을 우물쭈물하며 내밀었다.
“여긴 이런 거밖에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건……?”
“이 지역에서 나는 차입니다. 약간 쓴맛이 강한데 진정 효과가 좀 있습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태수는 지제이가 주는 차를 바로 한 모금 마셨다.
그의 말대로 씁쓸했다.
하지만 강한 맛에 비해 향은 은은했고, 그의 말대로 좀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태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제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떠십니까?”
“좋네요. 그보다 학교가 참 좋습니다. 그리고 학교가 있단 말은 들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좀 더 놀랍고요.”
“제가 원래 이 근처에 있는 부족 출신입니다. 도시로 나가 영어로 말하고 쓰는 법을 배우던 중에 봉사 단체를 알게 돼서 같이 돌아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지금도 영어를 사용하는 부족민은 저 혼자입니다. 애들이 요즘 몇 마디씩 어설프게 흉내 내고 있고요.”
“그렇군요.”
“그렇다고 원시적으로 살아가는 건 아닙니다. 예전에 몇 번 봉사 단체에서 옷과 생필품을 주고 갔거든요.”
지제이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주변이 어떤지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우선 크고 작은 부족들이 넓게 퍼져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수렵과 채집으로만 살아가는 부족도 있고요.”
“음.”
“하지만 대부분의 부족들은 부족민들이 함께 농사를 짓고, 또 가축도 기릅니다. 공동 소유 개념이죠.”
지제이의 설명을 듣던 태수가 궁금한 걸 강조해 물었다.
“그럼 그 부족민들의 인구가 어떻게 됩니까?”
“정확하게 집계된 건 없습니다. 집계를 하더라도 몇 달만 지나면 오차가 많이 일어나니까요.”
“태어나는 아기도 많고, 죽는 사람도 많단 뜻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예상하시는 게 맞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와 주신 게 너무도 감사하고요.”
진심인지 지제이의 눈빛이 처연해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태수가 물었다.
“그런데 왜 돌아오신 겁니까?”
“세상은 변하고 있으니까요. 다들 그 변화에 수긍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게 잘못된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키기 위해서 알아야 한다라.”
“우리 입장을 전달이라도 해야 하니까요. 이 주변 부족들은 대부분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타 지역 부족과는 의사소통이 안 됩니다.”
지제이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습니다.”
“그런 데다 이젠 문명인이 되어 버린 도시 사람들이 온다고 말이 통하겠습니까? 영어 한마디 못하는 부족민들밖에 없는데요.”
“음.”
“그래서 저라도 배웠습니다. 그리고 저라도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의사소통 방법과 숫자를 알려 주고, 계산법을 가르치는 겁니다.”
“그게 쉽진 않으실 건데요.”
태수의 말에 지제이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배움이라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여기 오는 아이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 또 얘기가 달라지죠.”
“네. 가르치는 게 보람되고 좋습니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여기에 오는 건 아닙니다. 배우기 싫어하는 아이들까지 강요하진 않으니까요.”
“다들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니까요. 그보다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태수가 조심스럽게 묻자 지제이가 바로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내일부터 진료를 시작할 건데, 통역을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아니, 제가 영어를 배운 이유 중 그게 제일 큽니다. 꼭 하게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
지제이는 태수를 진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지제이는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혹시 부족한 게 있을지 모른다며 언제든지 찾아 달라고 했다.
태수는 웃으며 그러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저 멀리 있는, 자신의 부족들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내일 아침에 부족민들과 함께 오겠다는 말도 전했다.
졸지에 주인이 사라진 학교에 남은 꼴이었다.
그러나 그런 건 다들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은 천막과 텐트를 설치하는 게 중요했다.
“거기 좀 더 당겨!”
“여기, 여기 좀 받쳐 줘야지!”
텐트 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천막 두 동은 이미 설치가 끝난 상태였고, 텐트는 의료진들이 머물 장소였다.
보통 텐트가 아니어서 10명은 족히 잘 수 있을 만큼 상당히 커다랬다.
태수도 지제이와 헤어진 뒤 바로 텐트 설치에 동참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고정시키고 팽팽하게 당기는 작업들이 빠르게 진행됐다.
그때였다.
푸덜덜!
텐트 뒤에 세워 둔 트럭들 중 하나에서 커다란 소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의료진들에게 그 소리는 소음이 아닌 음악 소리였다.
발전기가 가동되는 소리였던 것이다.
도성민과 유병태가 남수단에서 많은 걸 배워 왔는지 발전기가 수월하게 가동됐다.
그러던 중 정민수가 태수 옆으로 다가와 줄을 잡아 주며 짜증을 냈다.
“젠장.”
“또 왜?”
“이기준, 저 새끼 말이야, 알아듣는 건 잘하는데 행동이 굼떠.”
정민수의 말에 태수가 힐끔 쳐다봤다.
“행동이 굼떠?”
“아니, 꼭 굼뜨다기보다는 뭐랄까, 그래! 어설퍼. 너무 어설퍼서 계속 손이 한 번 더 간단 말이야.”
“그게 당연하겠지.”
“그래. 초보니까. 나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하려고 했는데 너무 심하다고. 캠핑 한번 안 해 본 놈처럼 말이야.”
“넌 카슈미르에 가기 전에 해 봤어?”
태수의 질문에 정민수가 멈칫하더니 슬쩍 시선을 돌렸다.
대답하지 않는 그를 향해 태수가 나지막이 이어서 말했다.
“여기 와서까지 그런 감정들 드러내지 말자.”
“전에도 말했지만 난 예전 일로 이러는 게 아니라고. 저 따로국밥 말아 먹는 새끼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니까.”
“기준이 입장은 생각해 보고 말하는 거냐?”
태수의 목소리가 약간 딱딱하게 변했다.
그러나 정민수는 뚱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