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893
01896 1896화
흠칫 놀란 태수는 팔을 잡은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김성국 기자였다.
그가 찡긋하며 잡은 팔을 강하게 당겼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꼼짝없이 갇힌 태수를 구하는 건 어림도 없었다.
그때 독특한 군복을 입은 몇몇의 군인들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태수 주변에 공간을 만들었다.
공항 경비대였다.
그들은 단호한 표정으로 사람들과 태수를 떼어 놓았다.
사람들은 당연히 불만을 토로했다.
“뭐 하는 거예요? 사인 받아야 한다고요.”
“좀 비켜요. 사진 찍잖아요.”
“…….”
공항 경비대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할 일만 착실히 수행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공간이 생기자 김성국 기자가 더욱 강하게 당겼다.
이젠 태수도 움직일 수 있었기에 얼른 그에게 향했다.
차도 쪽으로 나가니 언제 준비했는지 김성국 기자의 차가 시동이 걸린 채 대기 중이었다.
끝까지 공항 경비대의 도움을 받고야 태수는 간신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탁.
문을 닫자 동시에 운전석에 자리한 김성국 기자가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사람들은 차를 막아서는 행동까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차는 빠르게 이동해 공항 밖으로 빠져나왔다.
김포와 연결된 길고 긴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에 올라선 후에야 태수는 길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아아.”
“하하하!”
옆에서 김성국 기자가 파안대소하며 운전하자 태수가 흘겨봤다.
“웃음이 나오십니까?”
“그럼 웃기지. 이야, 최 팀장 인기가 엄청나던데. 정치권에 나설 생각 없어? 지금 출사표 던지면 국민 지지율 만땅이겠는데 말이야.”
“그냥 의사로 살 겁니다.”
“아쉽네. 내가 보좌관 해 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푸하하!”
농담을 던진 김성국 기자는 더욱 크게 웃었다.
얼마나 신나게 웃는지 차가 좌우로 휘청거렸다.
끼긱.
“형님!”
“알았어. 알았다고. 운전에 집중할 거야. 아으, 볼 당겨. 그만 웃어야지.”
“진짜…….”
“뭐야, 구해 줬더니 째려보나?”
“그건 아니고요. 형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태수가 고개 숙이자 김성국 기자가 질색했다.
“내가 그런 인사 받자고 한 건 아니잖아. 농담인데 그러면 내가 더 무안해진다고.”
“감사하죠. 전 거기 밤새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밤새워서 되겠어? 사람들은 계속 몰려올 텐데, 한 2박 3일은 지나야 틈이 좀 나겠지.”
김성국 기자가 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다시금 놀리자 태수는 포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아까 가신 거 아니었습니까?”
“기자들 때문에 같이 행동하는 척했지. 캐리어도 내가 가지고 있고 하니 집에 데려다줄까 하고 돌아갔더니 아주 재밌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더라고.”
가만히 듣던 태수가 침묵했다.
“…….”
“알았어. 놀리는 거 그만한다고. 째려보지는 말자. 좌우간 얼른 공항 경비대에 연락해서 지원 요청 받았지.”
“진짜 형님의 재치에 존경을 표합니다.”
태수가 진심으로 말하자 김성국 기자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앞을 바라보며 운전에 집중한 그는 입을 열어 태수에게 말했다.
“다 끝난 일이니까 털어 내고. 옷은 왜 그렇게 얇게 입고 있어?”
“여기 날씨까지 생각 못했습니다.”
“사람 참. 꼼꼼하다가도 이상한 데서 덤벙거린다니까……. 자, 곧 따뜻해질 거야.”
김성국 기자가 히터를 조작하자 훈풍이 나왔다.
삽시간에 차 속에 열기가 올라 태수의 파리한 얼굴도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후우.”
“좀 살겠어?”
“네. 아차, 그런데 어떻게 공항에 나와 계신 겁니까?”
“공항 기자가 알려 주던데. 기자들은 각 비행기의 탑승자 명단을 볼 수 있거든. 거기에 동생 이름이 있으니까 바로 비상소집한 거지.”
김성국 기자의 말에 태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기자님들 시선 벗어나기 쉽지 않겠는데요?”
“당연하지. 우리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유명 인사들이 언제, 어디에 다녀오는지 다 알고 있다고.”
“저도 조심하겠습니다.”
태수가 말하자 김성국 기자가 의미심장하게 나갔다.
“기자들이 무조건 파고드나? 냄새가 딱 풍겨야 뒷조사 들어가지. 이번에야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서 어쩔 수 없었고.”
“그거야 뭐.”
태수도 자신이 벌인 일이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지 조금 전에 절실히 확인했기에 두말하지 않았다.
그때 김성국 기자가 한 소리 했다.
“그래도 나한테 미리 전화를 했어야지. 그러면 내가 적당한 수준으로 싹 정리해 놓았을 거 아니냐고.”
“…….”
“다른 신문사에서 먼저 냄새 맡아 버려서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단 말이야.”
“죄송합니다. 쿨럭쿨럭. 흐음, 제가 조금 몸이 안 좋았습니다.”
태수는 긴장이 풀렸는지 다시 한기가 느껴지고 기침도 터져 나왔다.
그제야 입국 인터뷰 내용을 다시 상기한 김성국 기자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힐끔거리며 물었다.
“그랬지. 그래서 지금도 많이 안 좋아?”
“많이 좋아졌습니다. 조금 더 쉬면 깔끔하게 나을 겁니다.”
“좋아지기는. 이대로 성호종합병원으로 갈까?”
김성국 기자의 말에 태수가 얼른 도리질 쳤다.
“절대 안 됩니다. 저 지금 가면 최소 일주일은 병상에 강제로 잡혀 있을 겁니다.”
“천하의 최태수를, 그것도 인지도가 치솟고 있는 이 시기에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는데?”
김성국 기자의 질문에 태수가 손가락을 꼽았다.
“너무 많죠. 이사장님, 병원장님, 과장님들, 팀장님들도 있고.”
“……진짜 많네. 그래도 지금 인기 많은데.”
“그분들한테 그 인기가 소용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분보다 석 회장님 아시죠?”
태수가 묻자 김성국 기자가 바로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아, 석정현 회장님. 그분은 진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분이지.”
“그러니까 절대 가면 안 됩니다. 집에서 며칠 쉬고 다 나으면 제 발로 걸어가더라도 지금은 안 됩니다.”
“그래. 절대 가면 안 되겠어.”
“그럼요. 아, 혹시 르완다에서 다들 돌아왔습니까?”
태수가 소식을 묻자 김성국 기자가 대답했다.
“이틀 됐지? 그때 엄수찬 차관이 직접 배웅 나와서 석 회장하고 악수하고 그랬어.”
“그럼 다들 지금쯤 쉬고 있겠네요.”
“자세한 일정까지는 말해 주지 않았는데, 대부분의 의료진은 일주일 쉰다고 하더라고. 선발대는 휴가가 한 달일 거야.”
김성국 기자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정도 쉬어야죠. 꼭 쉬어야 합니다.”
“최 팀장이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여간 힘들었던 게 아닌 모양이야. 잔소리도 나중에 하자고. 일단 눈 좀 붙여.”
“오늘은 거부 못하겠네요. 그럼 눈 붙이겠습니다.”
태수는 양해를 구하고 눈을 감았다.
몸이 으슬으슬한 게 역시 몸살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다른 생각은 뒤로하고 일단 쉬는 게 최고였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였다.
태수는 오피스텔 최상층에 있는 자신의 집 현관 앞에 도착했다.
돌고 돌아 돌아온 집이라 그런지 가슴이 다 벅차올랐다.
아이들은 모두 학교 갔을 시간이기에 태수는 전자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띡띡.
몇 개월 동안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비밀번호였지만 손가락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열린 현관문 안으로 들어간 순간이었다.
“누구세요?”
안에서 물으며 다가오던 주미성이 태수를 보고 순간 그 자리에 굳어졌다.
총명한 눈빛이 갑자기 격하게 흔들리더니 가까스로 입을 열어 물었다.
“삼…… 촌?”
“너 왜 여기 있냐? 학교 안 가?”
“방학…… 인데요.”
“아, 그렇지. 대학은 방학이 일찍 시작하지. 난 대학 다닐 때 방학을 제대로 즐긴 적이 없어서.”
태수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주미성은 그런 태수를 바라만 볼 뿐,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신발을 벗은 태수가 캐리어를 안으로 들일 때였다.
주미성이 갑자기 번개같이 다가와 태수를 꽉 끌어안았다.
“삼촌!”
“뭐, 뭐야?”
“얘들아, 삼촌 오셨어!”
주미성은 집 안이 떠나갈 듯이 크게 외쳤다.
그와 동시였다.
벌컥벌컥!
방문들이 급격히 열리더니 윤사라와 주영수가 동시에 뛰쳐나왔다.
그러다 태수를 보고는 울컥한 얼굴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너희도 방학…….”
“삼촌!”
“야야야!”
가뜩이나 몸이 좋지 않은 태수가 얼른 만류하려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아이들은 저돌적으로 달려와 태수를 들이받듯이 안았다.
턱!
“삼촌, 삼촌!”
“이런……. 내 새끼들, 잘 지냈냐?”
“흐윽.”
“미성아, 니가 울면 어떻게 하냐. 애들도 안 우는데……. 다 우냐? 자식들. 그래, 나 왔다. 잘 다녀왔어.”
태수는 훌쩍이는 아이들의 등을 어루만지고 달래며 집에 돌아왔단 걸 실감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자신은 행운아다.
그 누구보다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 분명했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단 걸로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었다.
태수가 품에 안긴 아이들을 환한 미소로 다독일 때였다.
주미성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기가 막힌 미녀가 아래서 올려다보니 태수도 느낌이 싸했다.
‘자식, 남자 여럿 울리겠네.’
태수가 짧게 생각하는 사이 주미성은 굳어진 얼굴로 심각하게 물었다.
“삼촌, 몸이 왜 이렇게 뜨거워요?”
“어?”
“혹시 편찮으신 거 아니에요?”
주미성의 질문이 이어지자 윤사라와 주영수도 얼른 태수를 올려다봤다.
세 아이들이 똑같이 얼굴만 보이자 순간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보였다.
태수는 더욱 부드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비행기를 오래 탔더니 그냥 좀 피곤한 거야.”
“진짜요?”
주미성이 다시 묻자 태수가 어깨를 폈다.
“그럼. 진짜지. 내가 언제 픽픽 쓰러지고 그러는 거 봤어?”
“아니요.”
“니들 삼촌은 그렇게 약하지 않다고. 자, 이제 들어가자.”
태수가 얼른 말을 돌렸다.
아이들이 얼마나 걱정할지 뻔히 아는데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가장의 무게라고 해도 좋았고, 남자의 오기라도 해도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걱정을 끼친다?
절대 사양이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변수가 있는 법이었다.
주미성과 주영수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반면, 윤사라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삼촌, 열이 좀 높으신데요.”
“아니라니까. 그냥 일시적인 거야.”
“저 내년도 충선대 간호학과 예비 입학생이에요. 성호종합병원 최고의 간호사에게 직접 가르침도 받았어요.”
“그 간호사님이 가장 신뢰하는 게 이 삼촌이다, 이 녀석아. 어디서 의사 앞에서 간호학과 입학생이 병을 논해?”
태수는 강하게 나갔지만 윤사라의 눈빛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언니, 영수야, 삼촌 거실로 모셔. 자동 혈압계 가져올게.”
“사라야, 많이 안 좋으신 거야?”
“아직 자세히는 몰라. 일단 바이탈부터 확인하고 바로 큰 이모에게 여쭤 보려고.”
“그래. 그게 좋겠다. 삼촌, 가요. 영수야.”
주미성이 다그치자 주영수도 얼른 태수를 이끌었다.
“삼촌, 이쪽입니다. 웰컴 투 홈.”
“얘들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이거 놔.”
“얼른 오세요. 누나들 화나면 진짜 무서운 거 아시잖아요.”
주영수가 끌자 태수는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다시 보니 주영수의 몸에 제법 근육이 도드라졌다.
거기에 주미성까지 뒤에서 밀자 태수는 떠밀려 갈 수밖에 없었다.
“아, 자식들. 거참.”
싫은 소리를 내뱉었지만 미소가 지어지는 건 태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수는 가장 편안해야 할 집인데도 불구하고 바짝 긴장해야 했다.
바로 앞에 만삭의 몸을 한 송현미 간호사와 김혁권이 째려보고 있던 탓이다.
그런 두 사람에게 윤사라가 얼른 메모해 놓은 걸 읊었다.
“현재 체온은 38.3도고요, 혈압은…….”
제법 간호사처럼 말하는 윤사라의 모습에 태수는 심정이 복잡했다.
잘 배웠다고 칭찬하고 싶었지만, 그로 인해 저승사자들을 불러들였으니 울지도 웃지도 못할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