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928
01931 1931화
세상은 너무도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태수에겐 당장 어떤 의미도 없었다.
송민규의 사고가 마음속에 깊은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카프레네 이후 자신의 눈앞에서 의사가 죽은 건 처음이었다.
이젠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 또 하나의 커다란 상처가 생겨 충격이 곱절로 다가왔다.
이런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 가장 좋은 건 역시 일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하루를 보내다 보면 임시방편일지 몰라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태수는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석정현 회장은 물론 정용철 이사장이 출입을 금해 버렸다.
몰래 화이트엔젤이나 신속대응센터를 찾아가도 누구도 태수에게 환자를 부탁하지 않았다.
-지금은 한숨 돌려.
만나는 의사들마다, 또 간호사들마다 같은 말을 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그게 태수를 배려해 주는 마음이었다.
태수와 송민규의 사이를 모두가 안다.
태수가 송민규를 얼마나 아끼는지, 송민규가 태수를 얼마나 따랐는지를, 그 모든 걸 알기에 힘겹게 밀어냈다.
그런 이유로 태수는 집에서 머물렀다.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
아니, 혼자 사색하는 시간이 늘었다.
집 안은 고요했다.
아이들마저도 집 안에서 가급적 소리를 내지 않았다.
어느 순간 태수는 그걸 알아챘다.
왜 아이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며 지내야 할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좀 쉬고 싶었다.
그 생각으로 태수는 짐을 꾸렸다.
챙겨 든 가방을 메고 현관으로 향하기 전 주미성에게 말했다.
“좀 쉬었다 올게.”
“집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걱정 마시라니까요. 아무 생각 마시고 편안하게 다녀오세요.”
주미성은 제법 어른다운 미소를 보였다.
대화하는 사이 다가온 윤사라와 주영수도 마찬가지였다.
태수는 아이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친 후 집을 나섰다.
정한 곳은 없었다.
그저 발길 닿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몇 시간 후.
한참 운전하던 태수는 도착한 장소를 보며 어이없어 했다.
초곡리.
제2의 고향이다.
차라리 좋았다.
본가로 가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터였다.
다른 지역으로 가면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편안히 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음의 고향이라면 좀 쉴 수 있지 않을까.
태수는 그 생각으로 언덕 위에 지어진 집으로 차를 몰아가다 방향을 틀었다.
마을 사람들이 지어 준 집에는 이곳으로 이주해 온 아이들 중 몇몇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도 소식을 알 텐데 눈치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태수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이기남 이장을 찾아갔다.
바다에 나가지 않았는지 마침 집에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태수를 그물을 꿰며 바라보던 이기남 이장이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비루먹다 뒤진 개새끼모냥 히마리가 없어?”
“강녕하셨습니까.”
“이젠 눈치도 없어지나?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이는데?”
이기남 이장이 꿰고 있던 그물을 들어 보이자 태수가 옅게 미소 지었다.
“정정하시네요.”
“됐고,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마을에 빈 집 있죠?”
“……그렇다만.”
“거기 좀 써도 될까요?”
태수의 말에 이기남 이장이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던 그가 꿰던 그물을 놓고 평상에서 일어났다.
“잠깐 있어 봐.”
“어딘데요?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있어 보라니까. 하여간 말 더럽게 안 들어. 거, 최 선생 왔는데 시원한 보리차라도 한 잔 주소.”
이기남 이장은 집 안을 향해 퉁명하게 말한 후 그길로 대문을 나갔다.
태수가 뒤를 따르기도 전에 이장 부인이 불쑥 고개를 내밀고 깜짝 놀랐다.
“어머, 어머! 이게 누구야? 최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기다려 봐요. 아니, 저 양반은 선생님한테 이 추운 날 보리차를 왜 주래? 내가 따뜻한 유자차 한 잔 타 줄게요. 기다리고 있어요.”
이장 부인이 부엌으로 얼른 달려갔다.
태수는 어정쩡한 얼굴로 꼼짝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뜨끈한 유자차 한 잔이 시린 마음에 약간의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집에서 직접 만든 유자차인지 모양도 일정하지 않고 신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래서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그런데 유자차를 모두 마셨는데도 이기남 이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기다림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나가서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볼까도 생각했지만, 태수는 평상에 가만히 앉아 있는 걸 선택했다.
지금은 그러고 싶었다.
그런 시간이 좀 더 지난 후 대문이 열렸다.
그 틈으로 이기남 이장이 고개만 내밀며 태수에게 손짓했다.
“가자고.”
“네? 아, 네. 사모님, 차 잘 마셨습니다.”
태수는 얼른 대문으로 향하면서도 따뜻한 차 한 잔의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대문으로 나오자 이기남 이장이 태수의 차 조수석 앞에 서 있었다.
“문은 왜 잠가? 언제부터 잠그고 다녔다고.”
“서울 습관인가 봅니다.”
“각박하게들 산다. 얼른 문 열고 운전이나 해.”
“네. 갑니다.”
마치 제 차처럼 당당한 이기남 이장이었지만 태수는 순순히 따랐다.
곧 두 사람이 탑승한 차량이 마을을 천천히 가로질러 갔다.
이기남 이장이 내비게이션을 자청하며 이리저리 삿대질했다.
“저쪽으로, 여기서 이쪽, 아니, 이쪽이라고.”
이쪽, 저쪽.
지시하는 단어는 두개였지만 방향은 제각각이었다.
태수는 그 투박한 지시에 야단까지 맞아 가며 운전해야 했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마을 외곽에 있는 자그마한 농가 주택이었다.
태수가 보건의로 근무할 때도 와 보지 않았던 장소였다.
마을에서 가까우면서도 적당히 떨어져 한적한 분위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집 앞에서 차를 멈춘 태수와 이기남 이장이 내려섰다.
이기남 이장은 태수에게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충 청소했으니까 잠은 잘 만할 거야. 이 집만 보일러가 살아 있더라고.”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런 부탁이나 드리고요.”
“헛소리 말고, 집 안이 냉골이야. 보일러 틀어 놨으니까 곧 따뜻해질 거야. 괜히 기름값 아낀다고 주접 떨지 마.”
“감사합니다.”
태수가 인사하자 이기남 이장이 힐끔 쳐다봤다.
“더 필요한 건?”
“없습니다. 필요하면 잠깐 나갔다가 오면 되죠.”
“헛돈 쓰지 말라고.”
“진짜 없습니다.”
“그래. 알았으니까 들어가 보든가.”
이기남 이장이 돌아서자 태수가 얼른 나섰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일없으니까 자빠져 잠이나 자. 얼굴은 시꺼메서……. 쯧쯧.”
“오늘은 이상하게 야단만 맞는 거 같습니다.”
“이거 귀가 시끄러워 살겠나. 나 먼저 가네.”
휙휙.
이기남 이장은 폭이 넓은 팔자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태수는 그 뒷모습에 옅게 미소 지었다.
알고 있을 터였다.
아니, 분명히 알고 있었다.
퉁명한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걸 내색하지 않으려 더욱 까칠하게 말한 것이다.
태수는 그 배려가 고마웠다.
이기남 이장이 멀어지자 태수도 챙겨 온 가방을 들고 집 안으로 향했다.
집은 작았다.
방 한 칸에 부엌 하나가 전부였다.
농가 주택 중에서도 가장 심플하게 지어진 구조였다.
태수는 지금은 그 아담한 사이즈가 너무 좋았다.
“청소는 간단하겠어.”
둘러볼 것도 없이 슬라이드 문을 열고 쪽마루에 올랐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깜짝 놀랐다.
방치된 집이라고 하더니 내부가 반짝거릴 정도로 깔끔했다.
물론 벽지나 장판이 깔끔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한쪽에는 두툼한 요와 이불이 놓여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엌으로 가 봤다.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라면, 그리고 냉장고에 김치와 음료수가 채워져 있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태수는 확신했다.
이기남 이장 혼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정리하고 청소했을 것이다.
불과 1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이 모든 게 진행됐다.
많은 사람들이 도와준 걸 직감했다.
거기다 뻔히 태수가 온 줄 알고 있는데도 어느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곳 생활에 적응한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쉬고 싶어서 왔으니 그저 편안하게 쉬라는 의미다.
그 뜻을 알아챈 태수는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고마웠다.
세세한 배려 하나까지도 모든 게 감사했다.
초곡리가 제2의 고향이란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날부터 태수는 농가 주택에서 지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실컷 자는 거였다.
따뜻한 방에서 두툼한 요와 이불에 몸을 맡기니 밀린 잠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식사는 라면이 아니었다.
부엌으로 가 보면 항상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루는 삼계탕, 냄비에 담겨 있어 끓여 먹기만 하면 됐다.
또 하루는 수육과 김장 김치,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맛이었다.
이후로도 매끼마다 색다른 밥과 반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때로는 태수가 깨어 있기도 해서 음식을 준비해 온 마을 사람들과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일이 있다며 먼저 돌아가기 일쑤였고, 그 외에는 따로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태수가 하는 일이라고는 먹고 자는 것뿐이었다.
그 두 가지 일이 태수의 지친 몸과 마음을 풀어 주고 원기를 차곡차곡 채워 줬다.
어느 날 태수는 쪽마루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모습을 여유롭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런 태수의 얼굴은 며칠 전과 비교될 정도로 안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차분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때 태수의 귀에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부웅.
밥 때도 아니라서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집 앞까지 곧장 다가왔다.
태수의 차 옆에 눈에 익은 차량이 주차되었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박성민과 정민수의 모습에 태수가 얼른 일어났다.
드륵.
“선배, 민수야.”
태수가 슬라이드 문을 열고 부르자 박성민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런 반면 정민수는 종이 상자를 끙끙거리며 들고 뒤따라왔다.
먼저 태수 앞에 도착한 박성민이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이야, 여기 뭐 이렇게 참신하게 시골스러운 곳이 다 있어? 초곡리 명예 주민인 나도 이런 곳은 처음인데.”
“이장님이 전화하셨습니까?”
“아니. 그냥 왔는데.”
박성민이 빙글빙글 미소 짓는 사이 정민수가 도착했다.
“야야, 좀 받아, 인마.”
“줘. 윽! 이게 다 뭐야?”
묵직한 종이 상자에 정민수가 팔을 털며 대답했다.
“먹을 거. 죄다 먹을 거라고.”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
“같이 몸보신 좀 하자고. 그런데 여기는 아무리 집주인이 없다고 해도 임시 거주자는 손님 들이면 안 되냐?”
정민수가 핀잔을 주자 태수가 얼른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선배, 얼른 들어오세요. 너도.”
“역시 우리 태수야. 엎드려야 아, 절을 해야 할 타이밍이구나 생각하고 말이지.”
“얼마나 놀랐으면 들어오라고 말씀드리는 것도 있었겠습니까?”
태수 말에 박성민이 불퉁스럽게 쏴붙였다.
“됐다고 본다. 그거 옆에 대충 내려놔. 여기서 먹지, 뭐.”
“부엌 있는데요.”
“이런 낭만이 결여된 피플 같으니라고. 이 흩날리는 눈발을 보고도 삭막한 생각이 든단 말이더냐? 민수야, 쟤 눈치 어떻게 할 거야?”
박성민이 째려보자 정민수가 얼른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렇게 눈치 없는 녀석인 줄은 제가 꿈에도 몰랐습니다.”
“모르면 땡이냐?”
“철저하게 교육시키겠습니다.”
“교육의 성과는 이후에 확인하기로 하고. 아이고, 쪽마루 오랜만이다. 정겹고 좋네.”
박성민이 쪽마루에 올라와 앉자 정민수도 바로 자기 자리를 만들어 차지했다.
“진짜 좋네요. 약간 썰렁한데 그래도 운치는 죽여줍니다.”
“이게 또 시골적인 낭만 아니겠냐고. 그나저나 배고프다. 가져온 것부터 세팅해 보자.”
“실시하겠습니다.”
정민수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고 박성민이 보조를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