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010
02013 2013화
그렇게 그가 나간 후였다. 이선정 간호사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언니,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기는. 정 선생님이 전화하셨나 봐. 어제 소식 듣고 오늘 시간 내서 잠깐 오신 거래.”
“이 선생님이 이렇게 누구 문병 오는 스타일이 아닌데.”
그 말에 태수도 동감을 표했다.
“제가 알고 있는 기준이도 이런 스타일 아닙니다.”
“거 사람들이. 애써 와 준 이기준 선생님한테 왜 그렇게 야박하게 굽니까?”
김혁권이 아주 대놓고 이기준 편을 들자 태수는 황당했다.
“별로 안 좋아하신다면서요.”
“내가 안 좋아하는 게 중요해요? 현미 걱정되고 또 축하해 주러 온 닥터인데. 그거면 됐지.”
“……출산 선물로 뭘 가져왔을까요?”
태수가 가늘게 뜬 눈으로 묻자 김혁권이 움찔했다.
“뭐, 뭘 사와. 마음이 중요한 거지.”
“그 마음이 파랗거나 노란빛이겠죠?”
“그래요. 나 돈 받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김혁권이 당당하게 말하자 태수가 빙긋 미소 지었다.
“그냥 그렇다고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기쁜 소식 듣고 고마웠던 현미 생각에 한달음에 찾아왔다던데.”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뭐가 고마워요?”
태수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이 이선정 간호사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 맞다!”
“이 간호사님은 왜요?”
“이 선생님이요. 처음에 응급의료대에 와서 적응 못할 때 언니가 계속 챙겨 줬거든요. 모르셨어요?”
그 소리에 태수가 눈을 굴리다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죠. 출동할 때도 송 간호사님이 이 선생이랑 많이 출동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선생님 생각보다 멋지네. 그걸 기억하고 이렇게 찾아오고.”
“참 고양이 같은 놈입니다.”
“고양이요?”
뜬금없는 표현에 이선정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수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
“고양이가 은혜를 아주 시크하게 갚잖아요. 쥐 한 마리 물어다 놓고 씨익 웃고. 그런데 원수는 또 아주 철저하게 응징하죠.”
“겉으로는 도도하고 차가워 보이는데 겁도 은근히 많고요.”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죠.”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가 죽이 척척 맞아 대화하자 김혁권이 인상을 찌푸렸다.
“없는 사람 그만 욕하시고. 선정아, 여기 좀 봐 줘. 캡틴, 우리 커피 한잔합시다.”
스윽.
그가 통보하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태수가 황당한 얼굴로 송현미 간호사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는 잔잔한 미소로 병실 밖을 손짓했다.
무슨 일인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태수도 더 지체할 필요 없었다.
“실례.”
태수는 그렇게 양해를 구하고 김혁권의 뒤를 쫓아 병실을 나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자리한 곳은 옥상이었다.
아직 선선한 바람이 부는 봄이었지만 손엔 차가운 음료수가 쥐어져 있었다.
음료수를 반쯤 마신 태수가 저 멀리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도대체 회장님들은 언제 오신답니까?”
“매일 오시는데요.”
“네?”
“아침이나 저녁에 잠깐씩 들르십니다. 귀국하신 지가 언젠데.”
그 소리에 태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데 저는 왜 몰랐을까요?”
“노시느라.”
“……제가 지금 섭섭해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바쁘신 양반들인데 캡틴한테 연락해서 올 때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그건…… 아니겠죠. 그럼 오늘은 언제 오십니까?”
“아침에 잠깐 얼굴 보고 가셨습니다. 르완다에 병원 건물 올라가기 시작해서 거기 좀 다녀오신다고요.”
김혁권의 말에 태수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이젠 일 좀 줄이셔야 하는데요.”
“두 분이 같이 계시니까 알아서 하시겠지.”
“아차차. 그럼 복돌이 이름은 어떻게 됐습니까?”
“…….”
김혁권이 갑자기 답 없이 음료수를 홀짝이자 태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왜요, 사용하면 안 된답니까?”
“아니요. 허락은 받았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심각하십니까?”
“난…… 아니지, 우리는 그 이름에 그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네요.”
“들으…… 셨습니까?”
태수가 살짝 흔들리는 눈빛으로 묻자 김혁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 회장님이 직접 말씀해 주시던데요.”
“그러셨군요.”
“누구의 입에나 쉽게 오르내리는 이름인데…… 정작 그 숨은 의미는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복돌이, 아니 성호…… 우리 성호, 아주 멋진 아이로 키울 겁니다.”
김혁권의 확답에 태수가 미소 지었다.
“그럼요. 두 분이라면 충분히 그러실 수 있죠.”
“그리고 또 하나.”
“또 뭡니까?”
“……아버지를 찾아보려고요.”
그 소리에 태수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김혁권에게 유일하게 조심해야 할 말이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그만큼 뼛속 깊은 원망을 품고 40년 넘게 살아 왔다.
그런 그가 스스로 처음 언급했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태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자식을 낳아 보니까…… 왜 아버지란 사람이 보고 싶은지 모르겠네요.”
“…….”
침묵하는 태수에게 김혁권이 허공에 뱉듯이 말문을 늘어놨다.
“뿌리를 찾고 싶단 생각도 없습니다. 성호에게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 주고 싶지도 않고요.”
“…….”
“그냥 만나면 물어보고 싶습니다. 왜 그랬는지, 우리 엄마는 그 사람에게 도대체 어떤 존재였는지.”
김혁권의 무거운 목소리에 태수도 진지하게 말했다.
“원하는 대답을 얻을 거라고 확신하진 못하겠습니다.”
“나도 그런 기대는 없습니다. 그저 한 번만 내 눈에 담아 보고 싶은 거죠. 그냥 그런 겁니다.”
“음…… 어떻게 알아보시려고요?”
“성 변호사님이 도와주신다네요. 그쪽 로펌에서 이미 착수했고,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랍니다.”
“……아무쪼록 원하는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태수가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러자 김혁권이 힐끔 쳐다보며 옅게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캡틴도 불효 그만하고 효도 좀 해 봐요.”
“네?”
“장인어른하고 장모님하고 얼마나 기뻐하시던지……. 날 끌어안고 뽀뽀까지 해 주셨습니다.”
“…….”
“애 낳기 전까지는 캡틴이 결혼을 하든지 말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하라고 말하고 싶네요.”
김혁권의 권유에 태수가 어색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결혼식장에 혼자는 못 들어가게 하던데요.”
“나랑 뉴델리 가시든가. 거기 내가 아는 여자애들이 수두룩한데.”
“하하.”
“웃기는. 닥터 신이 카르힘한테 그랬답니다. 언젠가 캡틴이 어떤 여자를 데리고 오거든……가장 멋지게 환영해 달라고요.”
그 소리에 태수가 휙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지금까지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
“그리고 나도 얼마 전에 갔을 때 들었어요.”
“음.”
“캡틴 곁에는 평생 우리가 있을 겁니다. 가족도 있고, 아이들도 있겠죠. 하지만……그걸로도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맞죠?”
그의 물음에 태수가 멈칫했다.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모르고 싶은 건 아니고?”
“…….”
“그래서 닥터 김은 어떻게 지낸답니까?”
그의 뜬금없는 물음에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씨가 한둘이어야죠.”
“또 그런다. 카이로에서는 잘 적응한답니까?”
“아, 은영이요. 예멘 쪽으로 갔을 겁니다. 2월 말에 마지막으로 연락했었습니다.”
“그 뒤로는 연락 없어요?”
김혁권의 한심스런 표정에도 태수는 꿋꿋했다.
“네.”
“그럼 해 보든가.”
김혁권이 흘려 말하자 태수가 어이없이 웃었다.
“하하. 그런 거 아닙니다.”
“혼자 아니지. 혼자 아니라고 하면 뭐하냐고, 이미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데.”
“…….”
“남녀 간의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여기 산증인이 있잖아요.”
턱턱.
김혁권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 말에는 어떤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철천지원수처럼 지내던 송현미 간호사가 지금은 그의 부인이었다.
태수는 음료수 캔을 살살 돌리며 말했다.
“강요하진 마세요. 마음이라는 게 제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요.”
“뭐, 그럽시다. 내 사정도 아니고.”
“김 간호사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또 섭섭하죠.”
“그럼 닥터 김 좋아하라고 하면 좋아할 겁니까?”
김혁권의 돌직구에 태수 말문이 곧바로 막혔다.
“…….”
“봐요. 결국 캡틴이 결정하는 거라고. 잘 생각해 보시고 결정 내려요. 막말로 고아가 흠이야? 나 봐. 장인, 장모님한테 얼마나 사랑받으며 사냐고.”
김혁권은 툴툴거리며 먼저 옥상에서 내려갔다.
뒤에 남은 태수가 한쪽 입꼬리를 가볍게 들며 중얼거렸다.
“알고 계셨네. 그런데 전 그런 생각 한 번도 해 본 적 없습니다. 다만…….”
아직 스스로의 감정이 어떤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뭘 봐야 마음이 생기든지 말든지 하지.
속으로 뇌까린 태수가 쓰레기통으로 캔을 던졌다.
텅.
골인이다.
가만히 바라보던 태수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주말이 다가오던 어느 날 아침.
태수는 송현미 간호사의 병실에 들어섰다.
각종 선물들로 어수선했던 병실이 이제 안정을 찾은 모습이었다.
널찍한 소파에 앉아 있던 김혁권이 손을 들어 반겼다.
“왔어요?”
“네. 안녕하……. 어? 성호가 와 있었네요.”
송현미 간호사 품에 안긴 김성호를 본 순간 태수의 눈이 부드럽게 변했다.
김혁권에겐 손만 흔든 태수는 곧장 병상으로 다가갔다.
그 모습에 김혁권이 한쪽 입꼬리를 살짝 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고.”
하지만 아기에게 쏠린 관심이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태수가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송현미 간호사가 김성호를 슬쩍 내보이며 말했다.
“태수 삼촌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성호도 엄마랑 놀고 있었어요.”
옹알이도 못하는 아이를 대신한 인사였다.
태수는 그런 김성호를 받아 들어 정성스레 안으며 화답했다.
“삼촌이 우리 성호 보고 내려가려고 왔어요. 아구구, 어제 잘 잤어요?”
둥실둥실.
태수는 몸을 좌우로 가볍게 움직이며 반동을 줬다.
김성호는 엄마와 다른 냄새에 미간이 찡그려지더니 점차 편안한 얼굴로 변해 갔다.
그때 송현미 간호사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다른 간호사들이 안으면 칭얼거리는데, 어떻게 팀장님이 안으면 조용한지.”
“저도 쉽게 이 경지까지 오른 게 아닙니다.”
“아, 수현이가 좀 예민했다고 하던데요.”
“조금이요? 하하.”
태수는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은 그저 웃는 게 최고의 대답이었다.
송현미 간호사도 어색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태수는 몇 번 더 아기를 어른 후 송현미 간호사에게 건넸다.
아기를 받아 들며 송현미 간호사가 물었다.
“오늘 내려가신다고요?”
“네. 가 봐야죠.”
태수가 대답하자 김혁권이 슬쩍 다가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려가기는. 닥터 박이 혜민병원이나 돌봐 달라지 않습니까.”
“돌보기는요. 그리고 거기 다들 몰려갔는데 저까지 가면 민폐잖습니까.”
“뭐 그렇게 엄한 말을 해요. 거기 병원장님이 캡틴 보고 싶다고 닥터 박을 못 살게 군다던데.”
“하하. 병원장님은 여전하신가 보네요.”
태수의 말에 김혁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닥터 박이랑 똑같죠, 뭐. 그보다 다음 달에 닥터 박 결혼하는 건 아시죠?”
“그럼요. 그거 까먹으면 저 진짜 죽습니다.”
“닥터 박 성격에 진짜 죽이려고 들지도 몰라요.”
“절대 안 잊을 거니까 걱정 마시고요. 슬슬 내려가 봐야겠네요.”
태수가 운을 떼자 송현미 간호사가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벌써 가요?”
“가서 좀 쉬었다가 출근해야죠. 제 간도 좀 쉬고요.”
“사람이 매일 그렇게 어떻게 마셔.”
“그러게 말입니다. 오랜만에 올라온 죄라고 해야죠.”
서울에 올라온 후 어떤 일정을 보냈는지 그 말속에 모두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