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17
00218 218화
하석준 과장의 방에는 의외로 열량 높은 간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수술과 수술 사이에 잠깐 쉴 때 열량을 보충하기 위해서 준비된 거라고 추정됐다.
상석에 자리한 김기훈 과장은 간식에 손을 뻗었다.
사무실 주인이 없다고 해도 하석준 과장과는 예전부터 안면이 있었기에 할 수 있던 행동이다.
너무 자연스러워 마치 사무실 주인같을 정도였다.
우적우적.
태수도 마찬가지였기에 같이 간식으로 주린 배부터 채웠다.
정말 배가 고팠던 태수는 정신없이 먹어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기훈 과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응급실에서는 누구보다 냉정하더니. 이렇게 보면 딱 그 나이 또래 청년 같단 말이야.”
“저 원래 제 나이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걸 누구한테 물어볼까? 하 과장? 아니면 레지던트들?”
김기훈 과장이 놀리듯 묻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기왕이면 간호사분들에게 물어봐 주십시오.”
“왜?”
“나름 친하니까 말도 좋게 해줄 거 같습니다.”
태수의 대답에 김기훈 과장이 소탈하게 웃었다.
“하하하. 간호사들이랑 친하다. 물론 그래야지. 그래야 의국 생활이 편하니까 말이야.”
“물론입니다.”
“아까 응급실에서 보니까 그 수간호사 말이야. 전부터 안면은 있지만 그렇게 적극적인지는 미처 몰랐어. 역시 외과 간호사들은 좀 거칠어야 멋진 거 같단 말이지.”
“너무 와일드 하셔서 가끔 문제가 되기도 하죠.”
태수는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김기훈 과장은 말 그대로 담소만 이래저래 이어갔다.
별다른 주제도 없고, 특별한 의미도 없는 대화가 몇 차례 오간 후였다.
김기훈 과장이 태수에게 슬쩍 물었다.
“그래, 아직도 내 제안에는 전혀 생각이 없나?”
“또 그 말씀이십니까?”
“이번에 수술을 같이 하면서 정말 자네를 끌어당기고 싶어졌다면 이해하겠지.”
김기훈 과장의 목소리에는 진지함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눈빛 또한 굳건했다.
태수가 한마디만 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한길병원으로 데려가겠다는 표현이다.
1년차 때도 그랬고, 요 근래에 몇 번 만났을 때도 똑같은 제안을 했다.
특히나 태수가 외국에 나갔다가 왔단 소리를 듣고는 하석준 과장이 있는데서 스카우트 하려다 둘 사이에 신경전이 오가기도 했다.
태수는 그때마다 대답은 한결같았다.
“사람이 신의 있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럼 왜 레지던트 지원할 때 우리 병원에 안 했나?”
“그 전에 이미 이쪽으로 오기로 결정이 났었다니까요.”
케케묵은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대화였지만 서로 불쾌해하지 않았다.
이런 대화는 만날 때마다 하는 인사와 비슷함 때문이다.
김기훈 과장은 태수가 왜 동성에 계속 있으려 하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운을 떠본 거였다.
태수는 그때마다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거절했다.
자신을 한결같이 좋게 봐 주고 농담 삼아 찔러보는 말에 정색하며 대꾸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탓이다.
보통은 이쯤에서 이런 대화가 끝나는데 오늘은 좀 달랐다.
“최 선생.”
“네. 과장님.”
“이런 대화도 이제는 슬슬 지겹지?”
“감사하죠.”
태수가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김기훈 과장은 고개를 저었다.
“농담도 지나치면 기분이 나쁜 법이니까 이젠 그만 하지.”
“왜 그러십니까?”
“대신 다른 말을 하려고 말이야.”
“…….”
태수가 감을 잡지 못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볼 때였다.
김기훈 과장은 더욱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대전 종합병원에 있긴 하지만 서울 쪽에서도 힘 좀 써.”
“전에 이야기를 들은 거 같습니다.”
“내 자랑은 아니고 예전에 작고한 카프레네 박사님이 내한하셨을 때도 초대되었다는 거 기억하나?”
카프레네의 이름이 불쑥 튀어나왔다.
전이라면 머뭇거리기라도 했을 이름이다.
하지만 태수는 웃는 낯에 눈썹 한 가닥 변하지 않았다.
카프레네.
그 이름은 이미 태수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
또 그의 지식은 태수의 머릿속에서 전과 다른 의술로 표현되고 있다.
그렇기에 카프레네가 자신의 스승으로서 함께 살아간다고 여기는 중이었다.
그러니 태수는 미소를 잃지 않고 대답했다.
“네. 기억합니다.”
“그래. 그렇게 내가 외과 쪽에서는 콧방귀를 어느 정도 뀌어.”
“그런데 그 말씀을 왜.”
“서두가 좀 길었네.”
거기서 말을 끊은 김기훈 과장은 음료수로 목을 살짝 축였다.
태수는 그저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집중하고 있는 태수의 모습에 만족한 김기훈 과장이 뒷말을 이었다.
“언제, 어느 때고. 무슨 일이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해. 24시간 어느 때라도 말이야.”
“갑자기…….”
“오늘 초임 시절 의사로서 내 열정을 다시 떠올려준 의사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지.”
“네?”
태수가 이해하지 못했지만 김기훈 과장은 더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뒷이야기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것만 기억하면 돼.”
“정말 전화해도 됩니까?”
“언제든지.”
“저 기억력 무지하게 좋습니다.”
“나 또한.”
김기훈 과장은 끝까지 자신이 내뱉은 말을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단순히 충동적인 생각이 아닌지 눈빛은 깊이 내려앉은 모습이었다.
태수는 그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커다란 호의를 보여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조금 더 휴식을 취한 두 사람은 응급실로 내려왔다.
응급실 안은 경상자 몇 명만이 치료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많은 환자가 입원 되었거나 귀가했다는 뜻이다.
태수가 수술하는 사이 정리가 된 모양이다.
김기훈 과장이 태수에게 말했다.
“내가 수술실 들어갈 때 얼추 정리가 되는 거 같더니. 다 끝났나 보군.”
“꿈같네요.”
“영원한 건 없으니까. 만약 응급실에 영원히 급한 환자가 들어온다고 생각해 봐.”
“그건 끔찍하죠.”
태수가 질색하자 김기훈 과장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꿈 같이 흘려버리는 게 좋은 거 아니겠나?”
“아예 꾸지 않았으면 하는 꿈이길 바랍니다.”
“그거야 그렇지. 자, 그럼 마지막까지 힘을 좀 내볼까? 최 선생은 이제 병동으로 올라가도록 해. 여기는 우리에게 맡기고.”
김기훈 과장은 팔을 걷어붙일 듯이 호기를 내보이며 환자에게 다가갔다.
수술 전보다 한결 나아진 응급실이었기에 다급한 환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훈 과장과 파견 온 의료진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만 보여줬다.
그걸 감사하게 생각할 때였다.
“최 선생.”
부르는 소리에 바라보자 박완용 과장이 어느새 다가와 서 있었다.
잠깐 정신을 팔고 있는 중에 온 모양이다.
태수는 바로 인사부터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 인사는 너무 일러. 아직도 뒷정리가 한 보따리야.”
“이 정도면 여유로운 거 아닙니까? 아니면 제가 뭘 좀 도와드릴까요?”
태수가 묻자 박완용 과장은 축 처진 얼굴로 말했다.
“이제 약품 사용 내역서 써야 되지, 외부인력 확인해서 지급할 수당도 확인해야 되지, 거기서 끝인 줄 아나? 각종 보고서 작성할 게 얼마나 많은데.”
“아, 수고하십시오.”
“…….”
갑자기 말을 바꾸자 황당해진 박완용 과장은 태수를 살짝 노려봤다.
태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 게 없어서요.”
“그래.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그게 문제인 거지. 그보다 잘했어. 역시 경험자가 나서니까 정리가 빨리 되더라고.”
“건방지게 나선 거죠. 나중에 크게 한 소리 들을 거 같습니다.”
“아마 그러지 못할 거야. 그건 내가 장담하지.”
박완용 과장의 말뜻을 태수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할 뿐이었다.
박완용 과장과 헤어진 태수는 그제야 외과 병동으로 올라왔다.
언제 응급실로 뛰어 내려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시간이 흘러 있었다.
다행인 건 외과 병동 복도를 뛰어다니는 레지던트들의 다급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단 점이다.
병동에 도착한 환자들은 안정세를 보이는 모양이다.
철컥.
태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의국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태수는 순간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왜 없는지 알만한 탓이다.
다들 진이 빠질 대로 빠진 몸일 텐데도 환자들 곁을 지키는 모양이다.
자신이 가장 이상적으로 원하는 레지던트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자식들. 이제 의사 비슷한데.”
물론 칭찬은 한 번이고 또다시 혹독한 훈련을 이어갈 일이었다.
이제야 좀 한가해졌다는 생각이 긴장된 태수의 마음을 살짝 풀어줬다.
그래서일까?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태수는 의자에 쓰러지듯 자리했다.
지금 입원한 환자들의 상태를 한 번이라도 더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건 마음뿐이었다.
한 번 풀린 다리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인 피로도가 상당했다.
“조금만 쉬자.”
다른 레지던트들에 대한 죄책감도 들었지만 조금이라도 회복해서 교대해 줄 계획이었다.
태수가 의자에 그대로 기댄 채 잠깐 눈을 붙인 직후였다.
띠리릭.
느닷없이 울리는 휴대폰 소리.
동시에 감고 있던 태수의 눈이 번쩍 떠졌다.
누군지 확인할 정신도 없이 일단 통화부터 연결시켰다.
“최태수입니다.”
“내 방으로, 1분!”
뚝.
통보 후 끊어진 전화에 태수가 황당한 얼굴로 발신자를 확인했다.
박성민이 걸어온 전화였었다.
아니, 이런 전화는 박성민 외에는 할 사람이 없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전화한 경우에는 뭔가 급하거나 안 좋은 일인 경우였다.
태수는 반사적으로 의자에서 일으켰다.
후들후들.
굳건해야 할 다리가 약간 후들거렸다.
그나마 잠깐 눈을 붙여서 약간 회복된 정도였다.
지쳤지만 존경하는 선배의 부름이기에 태수는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어기적거리는 움직임에 거친 혼잣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미치겠네.”
그래도 태수는 끝까지 몸을 움직였다.
태수는 복도로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속도가 영 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가려는 자신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좀 더 쉴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박성민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었다.
인턴 시절 자신을 가장 많이 야단쳐 주고 또 칭찬해 준 선배다.
-정 안되면 같이 개업하자.
그때 해 준 그 한마디는 아직도 떠올리기만 하면 가슴이 찡했다.
그런 선배가 다급하게 부르는 상황인데 지체하기는 싫었다.
허나 가는 건 가는 거고, 현재 자신의 외과 치프다. 외과 병동을 책임지고 있는 의사란 뜻이기도 했다.
무책임한 건 너무도 싫었다.
태수는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복도 중간에 있는 간호사실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어머, 선생님. 괜찮으세요?”
현장에 투입되지 않았던 간호사 두 명이 태수를 보자마자 걱정부터 보였다.
잠깐의 휴식으로는 피로감이 충분히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도 태수는 자그마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희보다 선생님이 더 많으시죠.”
“그런데 다들 어디 있습니까?”
태수의 말에 간호사는 빠르게 현 의료진 위치를 설명했다.
“과장님하고 전문의 선생님들은 아직 수술 중이세요. 새벽은 되어야 끝날 거 같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다른 의사분들하고 간호사들은 병실에서 킵하는 중이에요.”
“잘하고 있네요. 그럼 교대로 눈 좀 붙이라고 해 주세요.”
“가 보시는 거 아니에요?”
“흉부외과 쪽에서 호출이 와서요.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주세요.”
태수의 말에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치프 안색이…….”
“괜찮습니다.”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을 때였다.
“괜찮기는, 아주 죽을상을 하고 있는데.”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김혁권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