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181
02184 2184화
울 만큼 울고 난 그녀는 간신히 안정을 되찾고 흔들림을 애써 억누른 목소리로 그간의 일들을 들려주고 있었다.
“……흐흑, 그래서 미국으로 온 저희는…….”
박은주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태수는 그 말을 한 번도 끊지 않고 듣기만 했다.
그 속에 어떤 이유로 미국 이민을 결정했는지도 언급됐다.
민감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마음이 툭 풀어진 박은주는 나오는 대로 모두 말했다.
어쩌면 자신에 대해 전혀 모르는 태수였기에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태수는 그 이민에 대한 대화를 듣자마자 흘려버렸다.
아주 좋은 일로만 온 게 아닌 탓이다.
그걸 기억하며 대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다만 이민을 온 후에 날카로워진 부부 사이, 아이에게 신경을 쓴단 이유로 예민하게 굴었던 점들은 기억에 담아 뒀다.
이건 이후 치료 과정에서도 필요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박은주의 말이 끝났다.
“……그렇게 된 거예요.”
“고생하셨습니다.”
“…….”
“진심입니다. 형님도, 형수님도, 또 우리 현수도 참 고생하셨어요. 그리고 잘 이겨 내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흐읍. 흑.”
태수의 진심 어린 위로에 박은주는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나 울지 않으려 모진 애를 썼다.
태수는 그걸 지켜만 보지 않고 슬쩍 화제를 돌렸다.
“저하고 동환이가 어떻게 만났는지 모르시죠?”
“도련님이 말씀하셨어요.”
“동환이가요?”
“네. 어려운 걸음 하시고 참 고생하셨다고. 그때가 선생님이 뉴스에 나올 때였을 거예요. 제일 좋아하는 선배님이라고 하셨어요.”
그 소리에 태수가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이, 자식이. 직속 선후배도 아닌데.”
“선생님, 아니, 아니, 팀장님도 이렇게 오셨잖아요.”
“네. 그간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고요. 이제 의사로서 나서 볼까요?”
펄럭.
태수가 괜스레 가운을 펄럭이자 박은주가 얼른 눈물을 훔치며 옆으로 비켜섰다.
“네. 현수 좀 부탁드릴게요.”
“일단 형수님 먼저요.”
“네? 저, 저요?”
“그간 수면 시간이 많이 부족하셨네요. 신경성 수면장애 비슷한 증상이고요. 또 소화 같은 생리적인 문제도 좀 있으시네요.”
태수의 말에 박은주가 크게 놀랐다.
“소화가 안 되는 건 또 어떻게…….”
“얼굴에 뾰루지 같은 게 올라오잖습니까. 그게 장의 독소가 제대로 배출되지 않아서 올라오는 겁니다.”
“이게…… 어머.”
그녀가 트러블이 있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태수는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 옆의 병상에서 좀 쉬세요. 현수랑 같은 공간에 있으니까 안심되실 거고요.”
“그래도…….”
“제가 얘기해 놓겠습니다. 현수의 병과도 관련이 있는 조치니까 따라 주세요.”
“현수의 병이랑요?”
박은주의 물음에 태수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러니까…….”
긴 이야기를 시작할 채비를 하던 중이었다.
똑똑.
병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자 태수가 입을 다물고 그쪽을 쳐다봤다.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한 무리의 한국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을 본 순간 태수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막 미국에 도착한 제2수술팀이었다.
가장 선두에 선 여성현이 태수를 향해 미소 띤 눈빛으로 다가왔다.
척.
그가 멈춰 서자 그 뒤를 따르던 모든 팀원들도 제자리에 섰다.
태수는 팀원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홍진만, 안성훈, 김명철.
그리고 김수진, 조현정, 박수영, 정새롬 간호사까지.
낯선 땅에서 만난 반가움과 또 이곳에 온 사명감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긴 비행의 피로가 얼굴에 가득했지만 태수를 만난 기쁨이 조금 더 큰 듯했다.
그중 한 발 앞에 선 여성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출하신 응급의료대 제2수술팀,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팀장님.”
단단한 그의 눈빛이 태수에게 화답을 요구했다.
그러나 마주한 태수의 눈빛에 짓궂음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견문 넓혀 주려 부른 게 아니다.
또 출발 전에 메일로 검사 결과를 보내 줬다.
지금 이 순간이 그들이 미국에 어떤 마음으로 왔는지 확실히 판단할 수 있는 순간이 될 터였다.
그 생각과 동시에 태수는 시선을 돌려 박은주를 바라봤다.
병실이 꽉 차게 내뿜은 팀원들의 열기에 박은주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얼굴이었다.
태수는 그녀에게 말했다.
“흠, 저 대신에 메네트리에병에 대해서 설명해 줄 사람들이 왔네요.”
“…….”
박은주는 엉뚱한 태수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해 눈만 끔뻑거렸다.
태수는 박은주를 계속 바라보며 호명했다.
“홍진만.”
“네! 팀장님.”
“메네트리에병에 대해 설명해 드려.”
태수의 말과 동시였다.
척!
홍진만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시선을 전방 15도 정도 위를 바라보며 절도 있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메네트리에병을 판단하는 기준은…….”
홍진만의 설명은 마치 녹음기를 틀어 놓은 듯이 바로 이어졌다.
이 모든 게 사전에 말을 맞췄단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홍진만의 설명도 상당히 유창했다.
“……이상입니다.”
“좋아. 다음 안성훈, 메니트리에병의 합병증은?”
태수의 질문이 끝난 순간이었다.
홍진만이 제자리로 들어가고 안성훈이 한 발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메네트리에병의 주요 합병증으로는…….”
그의 설명도 유연하게 진행됐다.
태수는 멈추지 않고 김명철도 호명했다.
“김명철, 출발 전에 차트 받았지? 우리 현수가 받아야 될 수술에 대해 설명해 드려.”
“네. 이현수 환자는 현재…….”
김명철의 목소리도 담백하고 또 씩씩했다.
거기서 끝?
태수는 마지막으로 여성현을 바라봤다.
“선배님, 수술 전 통증 관리, 수술 후 경과 관찰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흠, 알았어. 보호자분, 현수가 현재 가장 힘들어하는…….”
여성현 또한 박은주를 향해 막힘없이 진행 과정을 풀어서 설명했다.
박은주는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웠다.
그녀가 알기로 팀원들은 공항에서 바로 여기에 왔을 터였다. 그런데 마치 전부터 이현수를 관찰했단 듯이 술술 말해 왔다.
그 누구도 한마디 막힘이 없었다.
그건 단순한 놀람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태수와 수술팀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모든 브리핑이 끝난 후, 박은주의 머릿속엔 넓은 들판을 뛰어다니는 이현수의 모습이 가득했다.
그녀는 태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소리 내 알렸다.
“팀장님하고 여기 모든 분들을 믿고 차분히 기다릴게요.”
“네, 형수님. 우리 현수가 바로 털고 일어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여러분들도 정말 감사해요. 잘 부탁드릴게요.”
그릉.
그녀는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나 깊게 고개 숙여 마음을 표현했다.
그 인사에 팀원들 모두 같이 허리를 깊이 굽혔다.
“저희에게 보여 주신 믿음, 미소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들의 인사는 병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태수는 그런 팀원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자신의 결정은 다시 생각해도 최선이었다.
태수와 팀원들이 병실을 나선 건 그 후로 1시간 정도 지나서였다.
그 1시간 동안 자다가 일어난 이현수에게 팀원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수술실이 준비될 때까지 어떤 치료들이 선행될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했다.
그런 시간이 흐른 지금, 태수는 병실 문 앞에 서서 병실 안에 대고 말하고 있었다.
“……네. 그럼 쉬십시오. 현수야, 내일 보자.”
태수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 뒤를 팀원들이 단단한 눈빛으로 걸어 나왔다.
마지막으로 나온 홍진만이 병실 문을 조용히 닫았다.
탁.
그와 동시였다.
홍진만의 굳어진 표정이 바로 풀어지고 어깨를 툭 내렸다.
“후우, 오자마자 아주 난리도 아니네.”
“바로 풀어지지 말고.”
김명철이 경고했지만 홍진만은 내려뜨린 어깨를 가볍게 돌리며 투덜거렸다.
“왜. 환자랑 보호자 앞에서 무게 잡았으면 됐지.”
“야, 야.”
“왜 자꾸 찔러!”
홍진만의 얼굴에 짜증이 떠오를 때였다.
앞만 보고 있던 태수가 슬쩍 시선을 돌려 홍진만에게 말했다.
“보는 눈 많다.”
“팀장님은. 무슨 또 보는 눈이……. 흠흠, 알겠습니다.”
홍진만은 거리를 두고 선 사람들을 발견하고 바로 다시 점잖은 척했다.
태수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려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여성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 원장님께 인사는 드리셨습니까?”
“바로 드렸지. 무척 반가워하시던데. 그리고 내 병원처럼 편안하게 지내라고 하셨고.”
“그럴 분이시죠. 그럼 내과에 추가 오더만 전달하고 숙소로 갈까요?”
“그러자고. 그런데 숙소는 잡았어? 조금 전에 도착했다더니.”
“네. 협회장님이 문자를 보내 주셨네요.”
태수가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환자와 함께 있어서 진동으로 한 모양이었다.
휴대폰 액정 속 내용을 대충 훑어본 여성현이 옅게 미소 지었다.
“빨리 전달하고 가서 좀 쉬자. 사실 좀 피곤하긴 하니까.”
“그러시죠.”
태수가 먼저 걷자 팀원들이 뒤를 따랐다.
총 9명의 의료진이 동시에 움직이는 모습이 회진을 연상시켰다.
은연중에 내뿜어지는 위압감 때문인지 사람들은 지나는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잠시 후.
태수와 팀원들은 한적하고 깔끔한 동네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엔 커다란 대문이 떡하니 자리한 모습이었다.
분명 주소대로 찾아온 길이었다.
그런데 호텔도 아니고 모텔도 아니었다. 거기다 숙박업소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태수는 휴대폰 속 주소를 다시 확인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뒤에서 안성훈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뭐야? 미국은 호텔이 이래?”
“나도 몰라. 와 봤어야 알지.”
“확실히 미국은 다른가 봐.”
외국 여행이 처음이란 걸 대화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럴 정도로 후배들의 쑥덕거림 속에 믿음이 가득했다.
그런 오해는 나중에 풀더라도 일단 여기가 자신들의 숙소가 맞는지부터 제대로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태수는 바로 휴대폰을 들어 홍준석 LA한인협회장에게 전화했다.
“협회장님.”
“아, 팀장님, 어떻게 가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오늘은 얼굴 보고 인사하는 날이라서 별거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소대로 찾아왔는데…… 뭔가 이상하네요.”
“이상하다니요. 혹시 뭐가 잘못됐습니까?”
그가 오히려 당혹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태수는 그런 홍준석 LA한인협회장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큰 문제는 아닌데, 주소를 잘못 보내 주신 거 같습니다.”
“잠시만요……. 어? 제대로 보냈는데요.”
“그렇습니까? 호텔에 이런 정문이 있는 곳은 저도 처음이라서요.”
태수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곧 휴대폰에서 홍준석 LA한인협회장의 크고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하! 제가 설명이 짧았습니다. 그거 풀빌라입니다. 문 열려 있으니까 열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풀빌라요?”
“자그맣게 수영장도 있고, 한인 마트도 가까우니까 생활하기 괜찮으실 겁니다.”
“이거 엄청 비싸 보이는데…….”
간 큰 태수도 대문을 쉽게 열어 보지 못했다.
엄청 화려한 모양이나 장식은 없지만 미국에서 이런 장소에 오는 건 처음이라 망설임이 생겼다.
그런 태수의 반응에 홍준석 LA한인협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숙박업을 하는데, 그중에서 하나 쓰시라고 드린 겁니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거 같습니다. 호텔만으로도 충분한데요.”
“충분히 쉬셔야 기운이 나는 법입니다. 그 동네는 사생활 침해가 거의 없으니까 편안하게, 아주 편안하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홍준석 LA한인협회장의 설명에 태수 가슴이 따스해졌다.
배려다.
힘든 자신들을 위한 배려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했다.
“아…….”
“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어이쿠, 제가 이거 손님이 오셨네요. 먼저 실례합니다.”
뚝.
전화가 끊어졌다.
척 들어 봐도 손님은 핑계였고, 더 말이 오가기 전에 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