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2
00022 22화
이기준은 그런 태수를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살짝 들었다.
“어째 커피는 내가 사야 되는 분위기 같은데.”
“공짜 커피가 맛있지.”
“그럼 가자고.”
이기준도 더 말하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태수와 이기준은 옥상에서 일은 머릿속에 지운 듯이 서로를 대했다.
태수는 이기준의 야망을 알지만 굳이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서로의 생각은 굳혀진 상태다. 이야기를 나눠봐야 교차점 없는 평행선을 달릴 뿐이었다.
태수가 대학병원 흉부외과를 선택한 건 명확한 이유가 있다.
자신에게 온 인연.
버린다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또한 세계 최고의 흉부외과 의사가 되면 따라올 부와 명예도 당연히 생각했다.
어느 때와 같이 바쁜 나날들이 흘러갔다.
어느덧 태수와 인턴들의 실습 기간은 일주일도 남지 않게 됐다.
군대로 치면 말년병장이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할 시기다.
또한 말년병장들이 사회에 나가 뭘 해야할지 고민할 시기다. 인턴들 또한 어떤 의과에 레지던트 면접을 볼지에 대해 심도 깊게 고민할 때기도 했다.
태수는 이미 흉부외과로 굳혔기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 인턴 실습의 마지막 그 날까지 시간이 흘러가길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응급대기로 태수는 레지던트 당직실에 머물렀다.
앞으로 4년 넘게 보내야할 곳이라 그런지 익숙해지려 했다.
괜히 서성이는 것보다는 복층 침대 1층에 누워 휴식도 취하고 분위기에도 적응하고 있을 때였다.
침대 2층에 누워있던 박성민 치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최 선생.”
“네.”
“인턴도 거의 끝나 가는데 야밤에 잠도 못자고 튀어나가야 할 응급대기를 하는 소감이 어떤가?”
“무사히 지나갔으면 합니다.”
태수의 말에 박성민 치프가 푸덕거리더니 고개만 삐쭉 내밀며 물었다.
“무사히?”
“아픈 사람이 없다는 거 아닙니까?”
“하루에 교통사고만 수백 건이 나는 우리나라에, 그것도 인구 3천만 이상이 모여 있는 이 서울에 아픈 사람이 없을 수가 있나?”
박성민 치프가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지만 태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안 아프면 좋은 거 아닙니까? 저희도 쉬고.”
“그건 또 그러네? 말하고 보니 내가 사고 좀 나라고 하는 느낌인데?”
“제 걱정해주시는 거 아닙니까?”
태수의 물음에 박성민 치프가 삐쭉거렸다.
“정확하게는 우리 브레인 이필영 선생 걱정하는 거지. 내가 네 걱정해서 뭐해?”
“앞으로도 같이 여기 있을 사이 아닙니까.”
“오, 정말 흉부외과로 마음을 굳혔다는 거야?”
박성민 치프 얼굴이 순간 환하게 피어났다.
가뜩이나 인력난에 시달리는 흉부외과다. 빠릿빠릿한 태수가 지원해준다면 두 말 할 거 없이 좋은 일이다.
기대 가득한 박성민 치프 말에 태수도 빙긋 미소 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물리기 없기다. 물리면 내가 널 확 물어버릴 거야.”
“안 물릴 겁니다.”
“쉐끼! 좋았으!”
박성민 치프가 당직실이 떠나가라 기쁨을 분출했다.
같이 응급대기를 하고 있던 이필영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태수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마는 존재라는 걸 태수도 알고 있기에 별다르게 건넬 말도 없었다.
잠깐 기쁨의 순간이 지나간 후였다.
박성민 치프가 볼일 끝났다는 듯이 다시 2층 침대로 사라졌다.
이필영도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자 태수는 눈치 빠르게 일어나 전등 스위치에 섰다.
“소등하겠습니다.”
“오냐, 잘 자라.”
대답을 듣고야 태수가 전등을 껐다.
금세 어두워졌지만 SICU에서 흘러들어오는 전등 빛에 사물을 분간할 정도는 됐다.
여러 구조물을 피해 다시 침대에 몸을 뉘였다.
앞으로 계속 머물 곳이라고 생각해서 일까?
아늑한 느낌이다.
왠지 모를 포근함에 몸을 맡긴 태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감았다.
이른 새벽.
“드르렁!”
누군지 몰라도 코고는 소리에 당직실이 떠나갈 듯 들썩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세상모르고 잠든 모습이다. 꿈속에서도 이 시간이 길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굴뚝일게 틀림없다.
하지만 단잠을 깨우는 요란한 벨소리가 울렸다.
띠리릭!
“헉!”
태수가 번쩍 눈을 떠 자면서도 쥐고 있던 휴대폰을 바라봤다.
액정이 시꺼멨다.
잠결에 환청을 들었나?
생각하던 태수가 거칠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견디지 못할 즈음이었다.
“최 선생!”
벼락같이 들려오는 소리에 감기던 태수 눈이 또다시 떠졌다.
휙!
옆을 바라보자 이필영이 가운을 거칠게 걸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물어볼 틈도 없다.
응급상황이다.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태수가 의자에 걸어둔 가운을 찢듯이 잡아챘다.
그 사이 이미 옷을 입은 이필영은 당직실을 나서는 중이다.
가운에 손을 넣을 시간도 없었다. 태수는 재빨리 뒤를 따르며 펄럭이는 가운에 억지로 손을 넣었다.
그때 뒤에서 잠에 취한 박성민 치프 목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들아. 조용히 좀 나가라!”
“죄송합니다!”
“넌 말할 시간에 뛰어.”
박성민 치프는 잠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태수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태수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당직실을 나선 태수는 이필영의 뒤를 바짝 쫓는 중이다.
이필영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죽어라 달릴 뿐이다.
태수도 묻지 않았다.
이미 뛰어가는 방향을 보아하니 응급실이다.
이 새벽에 응급실에서 콜?
느낌이 좋지 않았다.
타다닥!
고요한 병원복도를 울리며 두 사람이 응급실로 급하게 들어섰다.
이필영이 바로 소리쳤다.
“흉부외과 콜 받고 왔습니다!”
“이쪽이에요!”
저 멀리서 간호사가 손짓하며 알렸다.
이필영이 바로 그쪽으로 또다시 뛰고 태수도 이어서 달렸다.
환자가 누운 침대가 보였다.
도착해서 환자를 본 순간 태수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환자는 외상이 없음에도 입에서 피를 토하는 중이다.
태수 망막에 순간 카프레네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
“이, 이게.”
태수가 당황하는 사이 옆에서 응급실 당직의사가 다가섰다.
이필영이 먼저 당직의사에게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교통사고야. 혈압은 계속 떨어지고 있고 토한 혈액양은 대략 2천cc 정도.”
“2천 cc요?”
“아직 촬영은 안 해봤는데, 촉진해보니까 Multiple fracture of ribs(다발성 갈비뼈 골절) 에 rupture of lung(폐 파열)도 심각하고 hepatorrhexis(간파열)도 의심 돼.”
당직의사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이필영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래서 어쩌라고요.”
“어쩌기는 뭘 어째? 나보고 째라고?”
“째기는 뭘 쨉니까? 아니, 누가 쨉니까? 교수님 호출해도 1시간은 걸려요.”
“그럼 뭐 어쩌라고?”
외려 응급실 당직의사가 짜증을 냈다.
어떤 조치도 섣부르게 취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상태다.
응급실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모조리 자기책임으로 돌아온다.
그건 이필영도 마찬가지였다.
흉부외과에서 브레인으로 통하며 3년 동안 교수님들에게 예쁨을 많이 받았다. 그렇다고 응급수술을 지시할 만큼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다.
그 이전에 교수님이 도착할 때까지 환자를 살려둘 엄두도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필영이 짜증부터 토했다.
“아, 미치겠네.”
“난 환장하겠거든? 저 환자 도착한 후부터 피가 마른다고.”
“좌우간 못 합니다. 다시 실으세요.
이필영의 말에 응급실 당직의사가 바로 물었다.
“어디로 보내?”
“보내는 동안 수소문 해봐야죠.”
“아, 진짜.”
응급실 당직의가 거칠게 머리를 긁었다.
의견 충돌이 있지만 결론은 이송이다.
그 시각, 태수는 마른 침을 삼키며 환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똑같다.
당시 카프레네의 상태와 저 환자 상태가 놀랍도록 일치했다.
상황 또한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그때는 산이었고 지금은 병원이다. 하지만 수술하지 못해 죽어가는 걸 눈앞에서 보고 있는 현실은 다르지 않았다.
환자 얼굴이 점점 카프레네와 같이 변해갔다.
그때의 일이 트라우마(정신적외상)으로 남은 상태다.
태수는 지금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했다.
사고로 인한 외상이나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사고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 지금 계속 오버랩이 되고 있던 탓이다.
그때의 부족함이 태수의 손과 발을 꽁꽁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극도의 불안감을 밀어내고 머릿속에 반지 하나가 떠올랐다.
카프레네 부인이 직접 태수에게 건네준 반지다.
다짐했다.
세계 최고의 흉부외과 써전이 되기로 반지 앞에 맹세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어떤가?
도망치려고 하고 있을 뿐이었다.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세상의 많은 저명인사들이 하는 말들 중에 하나였다.
카프레네가 저술한 의학서적에도 담긴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똑같은 상황이 펼쳐진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스스로 숨어버리거나, 트라우마를 극복하거나.
둘 중에 하나는 분명했다.
태수는 후자를 택했다.
지금 스스로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평생 풀어내지 못할 숙제로 남을 일이다.
그런 정신적인 외상을 가지고 세계 최고의 써전은 꿈도 꿀 수 없다.
스스로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순간이다.
온 몸을 압박하는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태수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턱.
남들에게는 쉬운 한 발자국.
하지만 태수에게는 의미가 남달랐다.
역시 처음이 힘들 뿐이다.
그 다음 걸음을 내뱉는 건 어렵지 않았다.
두려움과 불안감까지도 포용하며 태수는 환자에게로 다가갔다.
동시에 뒤에서 이필영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가?”
“…….”
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지금 태수의 눈에는 환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전과 지금은 다르다.
그때 자신에게 없던 카프레네의 지식이 지금은 머릿속에 가득 찬 상태다.
스스로를 믿어야 했다.
신뢰해야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환자에게 다가간 태수는 바로 상태부터 다시 살폈다.
이론만큼은 세계 최고 써전인 태수의 눈에 환자 이상상태가 훤히 들어왔다.
그건 카프레네의 특수한 이력 탓이다.
외과의에서 출발한 카프레네는 흉부외과의로 전과했다.
외과와 흉부외과.
두 의과를 모두 섭렵한 인물로도 유명했다.
그런 카프레네의 지식을 토대로 환자를 바라봤기에 태수는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급정차하면서 가슴이 그대로 운전대를 강타했다.
에어백이 터지지 않은 건지, 장착되지 않은 건지 몰라도 그에 관한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럴 경우에는 우선 심장상태부터 확인해야 했다.
태수가 심장부근을 가볍게 쓸며 환자에게 물었다.
“환자분, 여기 느껴지세요?”
“으으윽. 네.”
“살짝 눌러볼게요.”
태수가 정말 가볍게 손끝으로 가슴을 눌렀다.
“크윽.”
환자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지만 발작할 정도의 아픔은 아닌 모양이었다.
조금 더 눌러보자 부러진 갈비뼈 파편이 손가락 끝에 걸렸다. 손끝의 감각으로 파편 위치를 살펴본 태수가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나마.’
천운처럼 심장은 피해갔다.
그렇다고 상황이 좋은 건 아니다.
뒤집어 말하면 심장만 멀쩡하다는 이야기도 됐다.
태수는 주의를 기울여 몇 번 더 심장 주변을 눌러보며 환자의 통증을 살폈다.
“으으윽.”
신음을 끊임없이 토하지만 경련까지는 아니다.
태수는 또 한 번 눈동자가 떨렸다.
이 상황조차도 카프레네와 비슷했다.
태수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으며 조심스럽게 손을 떼고 말했다.
“심장은 다행히 무사한 거 같습니다. 그럼 좀 더…….”
태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깨를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휙!
태수가 손길에 이끌려 반쯤 돌아서자 이필영의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 시야에 잡혔다.
“야이 새끼야.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환자 상태 보고 있습니다.”
“봐서, 네가 봐서 뭘 어쩔 건데? 이송 준비하고 있잖아. 이송하면 문제없는 일이잖아!”
이필영이 평소 차가운 모습까지 던지며 벼락같이 화를 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책임자는 이필영이었기에 분노도 당연했다.
태수가 실수해도 책임은 자신에게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