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233
02236 2236화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였다.
시끌벅적하던 병실에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고요하다 못해 텅텅 빈 느낌이었다.
하지만 태수는 이런 외로움을 느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이번에는 무사히 지켜 낸 휴대폰을 꺼내 들어 어디론가 전화부터 했다.
“……그래. 나? 당신들 걱정까지 받을 정도는 아니야. 전화한 건 다름이 아니라…….”
태수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전화로 부탁했다.
짧게 통화를 마친 태수의 얼굴엔 이제야 편안한 미소가 지어졌다.
환자들은 모두 수술에 들어갔다고 했다.
이젠 자신의 손을 완전히 떠났다.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모두 함께 돌아올 수 있었다.
수술도 잘 끝날 거라 믿었다.
고요한 병실 분위기에 젖어 가는지 남아 있던 긴장감도 하나씩 풀려 갔다.
피로가 물밀듯이 몰려왔다.
태수는 점점 감기는 눈꺼풀을 자연스럽게 놔뒀다.
곧 눈이 감기자 태수는 고른 숨을 내뱉었다.
그런 태수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가득 지어져 있었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태수는 조금씩 잠에서 깨어나는 걸 느꼈다.
오랜만에 너무 푹 자서 그럴까?
생생한 그 느낌이 너무도 기분 좋았다.
그런 좋은 기분도 잠시였다.
수술은?
의식이 깨어남과 동시에 환자가 걱정됐다.
이번에는 편하게 마음먹어야겠단 다짐이 잠든 사이에 날아간 모양이었다.
환자 걱정과 동시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또 수술은 진행 중인지, 아니면 끝났는지, 진행 중이면 어디까지 진행됐고, 끝났다면 수술 결과는 어떤지까지.
삽시간에 머릿속을 채운 생각에 태수는 바로 눈을 떴다.
병실은 어둡지만 간접 조명 덕분에 보는 건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창문이었다.
창밖은 어두웠다.
도시의 불빛도 어느 정도 사그라진 걸 보면 꽤 늦은 시간 같았다.
그걸 확인한 태수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병상 반대쪽에 자리한 누군가의 모습이 창문에 비쳐 보였다.
태수가 무심코 고개를 반대로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그 상대를 두 눈에 담는 순간 태수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성성한 머리카락과 멋스럽게 자란 턱수염.
이마와 눈가에 자잘하게 팬 주름.
무엇보다 편안함과 신뢰를 느끼게 해 주는 자애로운 미소.
마지막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두 눈동자가 깊고 맑았다.
그렇게 태수를 부드럽게 내려다보는 그는 바로 제임스 박사였다.
예기치 못한 만남이다.
그래서 그런지 태수의 얼굴이 멍하게 변했다.
그런 태수의 표정 변화를 지켜본 제임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좋은 꿈 꾸었나?”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어떤?”
“눈을 뜨니 제 앞에 제임스가 있는 놀라운 꿈이요.”
태수의 말에 제임스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부드러워졌다.
“길몽인가, 아니면 흉몽인가?”
“현몽이 아닐까요?”
“그런가? 그런데 계속 그렇게 꿈속에서만 날 만날 건가?”
제임스가 짓궂게 묻자 태수의 눈가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니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또 뭐가?”
“꿈에서 깼는데, 분명 깨어났는데도 제임스가 이렇게 제 앞에 있네요.”
“후후, 여전히 엉뚱한 사람.”
툭.
제임스는 태수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얹었다.
그 하나의 손짓이 가뜩이나 들썩이는 태수의 마음을 더욱 거칠게 흔들었다. 촉촉하게 젖어 오던 눈가를 느끼며 태수는 억지로 숨을 들이켜며 참아냈다.
“흐음.”
“내가 많이 보고 싶었나?”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아직도 그렇게 어리광이 남아 있으면 어쩌나.”
“계속 이럴 겁니다. 제임스 앞에선 이렇게 애같이 살 겁니다.”
태수가 소심한 항변을 하자 제임스는 더욱 진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나도 항상 변함없는 닥터 최가 보고 싶었어.”
“흐읍! 흠! 그보다 어떻게 된 겁니까? 미국에 언제 오신 거고요.”
마음을 가라앉힌 태수가 본격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그때 응접 소파 방향에서 반갑고 친숙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붙여 놓으니까 아주 신파를 찍고 있어. 어떻게 생각하나?”
탁.
묘한 소리가 들리더니 그 말을 받아 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그런데 2시면 곤란한데.”
두 사람의 목소리에 태수가 멈칫했다.
설마?
태수는 얼른 고개를 들어 봤다.
응접 소파에 마주 앉아 체스를 두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 두 사람 모두 태수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한 명은 얼마 전까지 볼티모어에서 많은 대화를 나눴던 스미스 박사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바로 브레드 김이었다.
태수는 그 두 사람을 소리 내 불렀다.
“스미스, 브레드!”
그 소리와 동시였다.
체스의 나이트를 들고 있던 브레드 김이 의도적으로 놀란 척 판을 흩트렸다.
우당탕.
“어이쿠, 놀라라. 이런! 이거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다분히 의도적이던데.”
“절대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스미스 박사님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겠습니까.”
“판은 엎어졌고, 닥터 최도 깨어났으니 일어나 보자고.”
스미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브레드 김이 몰래 주먹을 쥐었다.
“으차.”
“하지만 판을 엎은 페널티는 있어야지. 오늘 술은 자네가 사.”
“네? 이거 술내기 판이었는데요.”
“좌우간 자네가 살 술이었던 모양이야. 흠, 닥터 최, 일어났나?”
스미스가 이쪽으로 느긋하게 다가오며 태수를 불렀다.
그런 반면 브레드 김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젠장. 모아 놓은 돈 다 털리겠네.”
그의 절망을 태수는 공감했다.
스미스와 제임스가 만나는 날이란?
그 술집이 대박 나는 날인 탓이다.
태수가 공감하는 사이 스미스가 가까이 다가섰다.
“찾아오길 기다리다 지친 늙은이를 결국 먼저 움직이게 한 소감부터 좀 들어 볼까?”
“네?”
“아니면 제임스가 미국으로 오고 있단 걸 알고 저지른 일인가?”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그보다 다들 어떻게 여기 모여 계신 겁니까?”
태수의 질문에는 한 박자 늦게 다가온 브레드 김이 대답했다.
“난 닥터 최가 이분들을 움직이게 할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어.”
“브레드, 저 지금 일어나서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야.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브레드 김이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스윽.
제임스가 가볍게 손을 들어 막더니 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 환자에 대한 걱정은 접어 두고 자신부터 추스르도록 해.”
“……혹시?”
“신경 끄래도.”
제임스가 묵직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태수는 그 한마디로 스미스와 제임스가 그 수술들에 참여했음을 바로 눈치챘다.
물론 브레드 김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에 태수의 눈은 더욱 크게 떠졌다.
“어떻게…….”
“나중에. 지금은 다른 생각 하지 말래도.”
“그…… 알겠습니다.”
태수는 궁금한 게 너무도 많았지만 일단 수긍부터 했다.
오랜만에 만난 제임스에게 불쾌함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말이라면 뭐든지 믿을 수 있었다.
그때였다.
제임스가 스미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가 있어. 곧 따라가지.”
“그래. 오랜만에 만났으니 나눌 말이 많겠지. 닥터 김, 앞장서. 자네가 사는 술인데 자네가 안내해야지.”
“에휴. 이쪽입니다. 닥터 최, 내일 개털 돼서 만나러 올게.”
브레드 김은 말만 그렇게 할 뿐, 스미스를 정중하게 안내했다.
스미스도 태수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브레드 김을 따라나섰다.
탁.
문이 닫힌 후였다.
제임스는 태수를 바라보며 또 한 번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고생했어.”
“아닙니다. 아니, 그보다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야. 누워 있어. 지금은 움직이지 않는 게 좋단 걸 알잖아. 그때는 자네가 의사였는지 몰라도 지금은 내가 의사야.”
제임스는 타머의 일을 되뇌며 태수를 압박했다.
그때 자신의 언행을 떠올린 태수는 순순히 따랐다.
“그럼요. 말 잘 들어야죠.”
“난 말을 듣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때 제임스가 어떠셨는지 스스로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뭐라?”
제임스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태수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뭔가 찔리시는 게 있는 거겠죠?”
“음.”
“하하! 그보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아니, 어떻게 여기에 계신 겁니까?”
태수는 궁금한 게 너무도 많았다.
제임스는 두루뭉술하게 대답해 줬다.
“어떻게 여기에 온 게 중요한 건 아닌 거 같아.”
“네, 맞습니다. 지금 이렇게 마주한 게 중요한 거죠.”
“그래. 그리고 아직은 안정이 더 중요할 때란 것도 알 거야.”
“그건…….”
“이번에는 훌쩍 떠나지 않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제임스가 먼저 말하자 태수는 머뭇거리던 표정을 기대감으로 바꿨다.
“그럼 또 뵐 수 있는 겁니까?”
“당연히. 내일은 같이 있도록 하자고.”
“오늘도 같이 있고 싶은데요.”
“스미스의 성화를 닥터 최가 이겨 낼 수 있다면 가능할 거 같은데.”
“그건 좀 힘들 거 같습니다.”
태수가 넉살을 부리며 발을 빼자 제임스가 크게 웃었다.
“하하. 그럼 오늘은 얼굴 봤으니 됐어. 그만 일어나도록 하지.”
“네. 그럼 제가…….”
“어딜 일어나려고.”
“…….”
“아직 피곤함이 남아 있어. 괜히 움직일 생각 말고 다시 자. 지금은 아닌 거 같아도 막상 눈을 감으면 다시 잠들 거야. 그럼.”
제임스는 누워 있는 태수를 향해 또 한 번 부드러운 미소를 내보인 후 병실을 나갔다.
탁.
병실 문이 닫히자 태수는 다시 혼자 남았다.
꿈인가?
솔직히 얼떨떨했다.
제임스와 스미스, 거기에 브레드 김까지 동시에 만났단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꿈은 아니었다.
브레드 김이 실수를 가장해 뒤엎은 체스판이 응접 소파에 어질러져 있었다.
그걸 보며 생각하는 것도 잠시였다.
제임스의 말대로 다시 눈이 감겨 왔다.
태수는 억지로 눈을 뜨려 했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누적된 피로가 터져 나오고 또 내장까지 부어오른 여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태수는 감기 싫은 눈을 결국 감아야 했다.
그리고 방금 병실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마치 거짓처럼 태수는 다시 곤히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밤새 흐드러지게 잔 태수는 안색이 한결 좋아져 있었다.
반면 복부는 약간 부푼 상태였다.
태수는 그런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니 내장이 부은 게 이제야 육안으로 확인됐다.
외부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게 직접적인 원인이었고, 이후 휴식 없이 무리를 한 게 증상을 악화시켰다.
다행히 내출혈은 일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이렇게 투약을 받아 가며 휴식을 취하는 걸로 회복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이럴 때 무리하면 후유증이 상당히 오래 지속된다.
하지만 이현수의 수술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건 미룰 수 없는 약속이다.
이동환 소령의 조카이기에 더더욱 미루기가 쉽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던 태수는 휴대폰을 들어 여성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깨어 있었는지 그의 목소리가 바로 들려왔다.
“벌써 일어났어?”
“어제 계속 잠만 잤습니다.”
“그럴 만했지. 아차, 그리고 고맙단 인사부터 해야지. 팀장 덕분에 아주 조용히 지내고 있어.”
“아, 네. 하하.”
태수는 바로 무슨 뜻인지 알고 멋쩍게 웃었다.
그런데 여성현은 인사로 만족하지 못하겠는지 이어서 말했다.
“코리아종합병원 들렀다가 숙소에 도착했는데 듬직한 분들이 정문 근처에서 서성여서 얼마나 놀랐는지.”
“혹시 위협하진 않았죠?”
태수가 걱정했으나 여성현의 밝은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위협은 무슨. 그때 본 해머란 친구가 그러던데, 자신들도 소식 들었다고. 닥터 최가 할렘가의 친구라는 게 자랑스럽다고 말이야.”
“뭘 그렇게까지.”
“좌우간 그 친구들 덕분에 우리를 아주 끈질기게 쫓아다닌 기자들이 멀찍이 물러났어.”
여성현의 목소리로 상황을 그려 본 태수가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