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24
00225 225화
송민규의 보고가 끝난 후 하석준 과장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일정에 여유가 있는 집도의가 없는데…….”
“제가 하겠습니다. 오늘 제 수술과 수술 사이에 비는 시간이 좀 깁니다.”
원채 작은 눈이 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소를 보인 신창용의 말에 하석준 과장이 살짝 심각하게 고민했다.
신창용의 말뜻을 알아차린 탓이다.
“그런가?”
“오전 11시에 한 건이고, 오후 4시에 한 건이니까 나쁘진 않을 거 같습니다만.”
“시간적인 여유가 될까? 오전에 수술할 환자 상태가 그리 좋진 않은데 말이야.”
“그래서 오랜만에 치프와 수술을 하면 어떨까 합니다.”
신창용의 말에 하석준 과장이 멈칫했다.
매일 자신과 수술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 하는 말이다. 아직도 기회만 되면 태수와 수술을 하려고 한 번씩 은근슬쩍 상황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그때마다 태수 또한 묘하게 거부해왔다.
하석준 과장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태수에게로 향했다.
태수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감사하지만 오늘 과장님 수술은 3일 전부터 제가 직접 케어한 환자라서 곤란할 거 같습니다.”
“시간이 겹치지는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언제 끝날지 장담할 수 없는 수술입니다. 제가 들어간다고 했다가 못 들어가게 되면 전체적으로 의국 스케줄이 꼬이게 됩니다.”
태수의 말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허나 하석준 과장과 태수의 조합이라면 그리 오랜 시간 붙들고 있을 수술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일전에 대놓고 까 내려갔던 그 수술 이후 항상 저런 식이었다.
신창용은 이미 태수가 충분히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데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게 문제다.
단순한 치프였다면 강압적으로라도 수술실에 데려가겠지만, 비상사태 이후로 미묘하게 변한 태수의 위치로 그러기도 애매했다.
신창용의 가느다란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불쾌하다고 그걸 그대로 표현할 인물은 아니었다.
속에 구렁이를 잔뜩 키우고 있다는 박수철의 말대로 오히려 미소 띤 얼굴로 태수에게 물었다.
“치프는 내가 그렇게 좋진 않은가 봐?”
“아닙니다.”
“그러면 가끔은 내 수술실에도 들어오고 해 줘야지. 다른 선생들이랑은 계속 교대로 수술하는데 치프랑은 이상하게 기회가 만들어지지 않는 거 같단 말이야.”
돌려서 이야기했지만 하석준 과장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너무 싸고돌지 말라는 의미다.
하석준 과장도 바보가 아닌 이상 바로 알아들었다.
하석준 과장이 순간 눈살을 찌푸렸으나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열면 정말 태수만 감싼단 소문이 돌 판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다만 하석준 과장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런 반면 태수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저도 참 이상하게 신 선생님과는 기회가 만들어지지 않아서 애석합니다.”
“응?”
“다음에는 꼭 스케줄이 맞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죄송합니다.”
태수의 사과로 인해 의국 회의 분위기가 조금은 변했다.
정작 분위기를 묘하게 만든 태수는 태연했다.
각 레지던트들은 오늘 스케줄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확인한 후 신창용에게 말했다.
“중간에 수술을 진행하시게 된다면 김명철 선생이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음.”
“다른 레지던트를 원하십니까?”
“아니야. 김 선생이 준비해 줘.”
신창용이 마지못해 승낙하자 김명철은 얼떨떨한 얼굴로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스케줄에 기입하면서 태수를 향해 남몰래 울상을 지어보였다.
갑자기 수술이 늘어난 상황이다.
아무리 배움에 열정이 있더라도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김명철이었기에 달갑진 않았다.
그 순간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란 사인.
김명철은 더 이상 불편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 일이 정리가 되자 송민규가 빠르게 다음 주제로 이어갔다.
“오늘 퇴원 예정인 환자가…….”
송민규의 보고를 들으며 모두 다시 한 번 스케줄을 확인하는 시간이 계속됐다.
그 와중 신창용은 태수를 향해 한번씩 시선을 던졌다.
‘이게 아닌데.’
하지만 태수가 교묘하게 자신과의 수술을 피하니 답답한 현실이다.
그렇게 의국 회의가 끝난 후였다.
하석준 과장과 전문의들이 의국을 나가니 긴장된 분위기가 대번에 풀어졌다.
태수의 원칙.
쉴때는 선후배 가리지말란 지시대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홍진만이 괜스레 가운 속에 입고 있는 라운드 티의 목을 잡아당기며 투덜거렸다.
“후우. 요즘 아침마다 긴장의 연속이네.”
“어째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은데?”
태수의 반응에 홍지만이 펄쩍 뛰었다.
“제가 어떻게 그렇게 말합니까. 이건 오해도 너무 단단히 오해하시는 겁니다.”
“그럼?”
“신 선생님 말하는 거였습니다. 계속 치프, 치프 하니까 치프께서 부담되시는 거 아닙니까.”
“별로 부담 안 돼.”
태연한 태수의 대답에 외려 홍진만이 입맛을 다셨다.
“아니면 제가 오해한 거네요.”
“오해는 안 좋은 거야. 아, 그리고 김명철.”
태수의 부름에 김명철이 빠르게 대답했다.
“네, 치프.”
“양해도 없이 수술 스케줄 잡아서 기분 나쁜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야 한 번이라도 더 수술실 들어가니까 당연히 좋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리고 다들,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 즐겨라. 겁나게 열심히 하는 인간도 말이야, 결국 즐길줄 아는 인간에겐 못 당해.”
태수의 한 마디에 전 외과 레지던트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네, 치프.”
“자, 그럼 다들 아침 먹고 일과 시작해. ICU에 있는 인턴들은 식사 후에 교대해 주고.”
“수고하십시오!”
그릉.
레지던트들이 힘차게 일어나 각자 몸을 움직였다.
그 사이 정민수가 슬쩍 다가와 태수에게 나지막이 질문을 던졌다. 물론 주위에 아무도 없기에 자연스런 반말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거야?”
“아마도.”
“그것도 우리같이 취미가 있어야 즐기지. 아닌 놈들은 고역이라고.”
“그럼 거기까지가 한계겠지.”
태수의 담담한 말에 정민수는 어깨를 들썩였다.
영 틀린 말은 아닌 탓이다.
두 사람은 대화를 마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스케줄대로 정신없이 일과가 이어졌다.
“조금 힘드네.”
일과가 끝날 무렵 태수는 수술실에서 나서는 중이었다.
세 번째 수술이자 오늘의 마지막 수술이 드디어 끝이 났다.
수술가운과 마스크, 헤어캡을 벗어 폐기물수거함에 던진 태수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힘이 들어서?
그건 아니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다.
일종의 안도감이었다.
사실 태수가 수술을 어시스던트하고 받는 수당은 그리 많지 않다.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수는 단 한 사람의 환자도 허투루 보지않았다.
돈을 버는 건 나중 문제다.
의사기에, 또 의사로써 해야 할 일에 충실한 나날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리고.
‘한가해서 탈이지.’
외국에서 보낸 시간과 비교하면 아쉬운 소리를 내뱉을 생각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태수가 무작정 한가한 시간만 보내는 건 아니었다.
같은 수술을 보조하더라도 조금씩 방법을 바꿨다.
전에는 엄두를 내지 못한 카프레네의 수술 방법들이다.
이유는 하나.
벌써 4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정말 난해한 수술은 아직 확신이 없었다.
좀 더 갈고 닦아야 할 수 있는 수술이다.
그걸 수도 없이 진행한 카프레네의 기억만 봐도 아직 갈 길이 너무도 멀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허나 태수는 조급하지 않았다.
이제 레지던트 4년차다.
평생을 입기로 한 하얀 가운이기에 조급함 보다는 여유를, 그리고 남은 치프 생활도 조금 더 즐길 예정이다.
그래야 전문의를 취득한 후 다시 힘을 내어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다.
태수의 목표는 언제나 한결 같다.
카프레네를 넘어선다.
존경하기에 뛰어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앞서 수술실에서 나온 하석준 과장이 개수대에서 손을 한 번 더 씻는 중이었다.
촤악.
태수가 그 옆 개수대 물을 틀고 손을 씻기 시작했다.
하석준 과장이 태수에게 말했다.
“지치지 않아?”
“괜찮습니다.”
“나만 지치는 건가?”
“하루에 수술 세 건 집도하시는 게 쉽지는 않죠. 저야 어시스던트라 그나마 버틸만 합니다.”
태수의 부드러운 대답에 하석준 과장도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도 치프가 계속 어시스던트 해주니까 수술 시간도 짧아지고 성공도도 높아지던데.”
“무슨 겸손의 말씀을 다하십니까? 과장님이 남몰래 연습하고 계시는 거 알고 있습니다.”
“알아?”
“sutura(봉합)만 봐도 어느 정도 연습하시는지 짐작이 갑니다.”
태수의 대답에 하석준 과장이 피식 웃었다.
“이거 들킨건가.”
“저도 높아진 건 눈 밖에 없는 거 같습니다.”
“그 폭넓은 시야가 의사에게 중요한 거야. 하하. 그보다 오늘은 수고했어.”
하석준 과장이 만족한 얼굴로 말하자 태수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요즘 다들 안색이 좋지 않아.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고. 내 조만간 시간 한 번 만들지.”
“그럼 애들은 더 열심히 일할 겁니다.”
“늘 그러면 곤란한데 말이야. 하하. 그럼 먼저 실례하지.”
툭툭.
하석준 과장은 태수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고는 멀어져갔다.
태수는 그런 하석준 과장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분명 태수는 하석준 과장보다 한참이나 어린 후배였다. 그럼에도 언제나 존중하고 함부로 대한 적이 없었다.
술을 진탕 마신 그날 이후 특히나 더 했다.
과장이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 낮추면서 발전하고 있었다.
그건 계속 같이 수술실에 들어가고 있는 태수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남을 존중하면서도 스스로 노력하는 타입이다.
태수가 레지던트 1년차 때 의욕이 없던 모습은 도무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비상사태 사건 이후로 병원 내에서도 입지가 점점 올라가고 있다는 것도 스스로 알고 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하석준 과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모두 씻은 태수도 몸을 움직였다.
의국에 도착한 태수가 수술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있던 중이었다.
끼익.
의국 문이 열리더니 김명철이 슬쩍 고개를 내밀다 태수를 발견하고 바로 들어왔다.
“치프, 여기 계셨습니까?”
“음. 무슨 일인데?”
“신창용 선생님이 잠깐 방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수술이 벌써 끝났어?”
태수의 물음에 김명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수술 끝난 지 30분 정도 됐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다.”
태수가 먼저 격려하자 김명철이 아차하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치프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자식. 그럼 다녀올게.”
“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김명철은 그 사이 옷을 모두 갈아입고 몸을 움직이던 태수를 향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저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사였다.
의국을 나선 태수는 조금은 의아했다.
전문의들이 퇴근할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자신을 찾는 경우가 거의 없기에 더더욱 의아함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상대였기에 발걸음이 썩 가볍지도 않았다.
이내 태수는 신창용의 방에 들어섰다.
“찾으셨습니까?”
“식사나 같이 할까 하고 말이야. 혹시 같이 식사할 시간도 없나?”
선수를 치는 신창용의 눈매가 부드러웠다.
마치 태수의 스케줄을 미리 확인한 느낌이다.
여기서 대놓고 거부한다면 그나마 뜨뜻미지근한 사이가 더욱 뒤틀어질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정도에 흔들거릴 태수가 아니었지만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지는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