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26
00227 227화
신창용은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리고 저희도 조금씩은 성의를 표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갑자기 신 선생이……. 이거 참.”
다들 갈피를 못 잡는 표정들이었다.
허나 신창용은 계속 입을 열었다.
“우리야 퇴근하면 따뜻한 집에서 잠이라도 푹 자지 않습니까. 가끔 밖에서 술도 마시고요.”
“그건 그렇지.”
“레지던트들끼리는 그런 자리가 거의 없습니다. 누구라도 당직을 맡아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이번에 그런 기회를 만들어주는 건 좋은 생각 같습니다.”
신창용의 대답에 박수철이 어이없는 목소리로 한 마디 했다.
“난 여태 병원 생활하면서 그런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했어.”
“전통이야 깨지라고 있는 거고, 새로운 룰이 좋으면 또 그것도 전통이 되는 거 아닌가? 난 찬성이야.”
오재욱이 찬성표를 던지자 오히려 박수철이 묘한 입장으로 변했다.
버티고 있으면 왠지 더욱 소외될 거 같은 상황이기에 얼른 말을 바꿨다.
“들어보지 못 했다는 거지, 그러지 말자는 건 아닙니다.”
“그럼 박 선생도 찬성한다는 거지?”
“네. 과장님.”
울며 겨자 먹기지만 애써 웃으며 동조했다.
의외로 순탄하게 결정이 된 상황에 하석준 과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가장 놀라운 건 누구보다 강하게 반대할 줄 알았던 신창용이 먼저 찬성했다는 점이 더더욱 의아했다.
게다가 금일봉에 보태주자는 말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요즘 들어 태수를 귀찮게 하지도 않고.
너무도 이상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하석준 과장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태수와 모종의 이야기가 오갔다고 해도 외과에 도움이 될 일이면 모를까, 해가 되진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던 터였다.
하석준 과장은 그만큼 태수를 믿고 있었다.
탁.
가볍게 팔걸이를 내리친 하석준 과장이 힘차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고. 이 이야기는 내가 치프에게 직접 전달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세 명의 전문의들은 깔끔하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후, 전문의들에게 성의를 받아 하나로 합치니 봉투가 꽤나 두툼했다.
하석준 과장은 그 봉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신 선생이 무슨 바람이 불은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똑똑.
노크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태수가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그래. 일단 앉지.”
하석준 과장이 권하자 태수가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일단 이거부터. 이사장님께서 이번 일 수고했다고 내려주신 거야.”
하석준 과장이 준비해 놓은 봉투를 내밀자 태수는 눈을 키웠다.
“어째 전보다 너무 두툼해진 거 같습니다.”
“다들 조금씩 보탰어.”
“다들이라고 하시면?”
“누구겠어?”
하석준 과장이 웃으며 반문하자 태수가 직감했다.
전문의들이다.
그게 조금은 태수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이미 손에 들어온 돈인데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아주 유용하게 쓰겠습니다.”
“어떻게 유용하게 쓸 생각인가?”
“일단 먹어야죠. 배달 음식으로만 한 달은 끄떡없겠는데요.”
태수가 활짝 웃으며 하석준 과장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다른 의견을 냈다.
“그러지 말고 다 같이 나갔다가 와.”
“나갔다가 오라고 하시면?”
“근시일 내로 일정 잡아서 레지던트들 모두 오프 다녀오라고.”
하석준 과장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정 그러길 원하신다면 반반 나눠서 나갔다가 오겠습니다.”
“일정이 정해지면 나와 다른 선생들이 병원에 남아있을 거야.”
순간 태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과장과 전문의들이 밤을 새워 외과를 지킨다?
아주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웬만하면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는 태수도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이십니까?”
“그렇다니까. 나가서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고, 먹고 싶은 것도 좀 먹고. 그리고 돌아와.”
“죄송합니다만 갑자기 왜…….”
태수가 슬쩍 말꼬리를 흐렸지만 하석준 과장은 태연하게 이야기 했다.
“한 번쯤은 같이 술 한 잔 하고 싶지 않아?”
“그거야 그렇긴 합니다만.”
“우리가 선심 쓸 때 얼른 나가.”
하석준 과장이 호기를 부리는 틈을 보고 태수가 슬쩍 물었다.
“그보다 오프 나가는 거 말입니다. 오늘 나가도 됩니까?”
“그래도 돼.”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요새 애들이 너무 피곤해 하던데 좋은 반전이 될 거 같습니다.”
“이쪽은 걱정 말고. 재밌게 놀다 오도록.”
“감사합니다!”
태수가 진심을 담아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과장실을 나선 태수는 휴대폰을 들어 전문의들에게 단체 문자를 보냈다.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더욱 열심히 보필하겠습니다.
문구에 이런 기회를 준 데 대한 감사함은 충분히 담았다.
한편 태수의 문자를 받은 전문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오재욱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이미지가 개선되어 가고 있을까?”
신창용은 약간은 기대어린 눈빛이었다.
그런 반면.
턱.
박수철은 휴대폰을 그대로 뒤집어 태수의 문자를 무시했다.
신창용까지 마음이 변해 고립된 처지였다. 그래서 그런지 태수를 향한 시선이 더더욱 곱지 않게 변해 갔다.
전문의들에게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태수는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 손에 들고 있는 봉투가 너무도 두툼했다.
레지던트들을 모두 데리고 나간다고 해도 충분할 정도였다.
태수는 자연스럽게 여러 인물들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석정현 이사장이 외과에 수고했다고 내려준 금일봉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태수는 바로 몸을 움직였다.
잠시 후 태수는 간호사실에 도착했다.
수간호사가 먼저 태수를 반겼다.
“선생님.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니요. 이거부터 받으세요.”
“무슨 봉투에요?”
느닷없이 내민 봉투에 한 번 놀라고, 그리 얇지 않은 봉투의 두께에 또 한 번 놀랐다.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사정을 이야기 했다.
“이사장님이 금일봉 내려주신 거랍니다.”
“어머, 그걸 왜…….”
“외과에 내려주신 거라니까 다 같이 써야죠. 저희도 챙겼으니까 걱정 마시고요.”
“선생님.”
수간호사의 얼굴에 감동이 가득 떠올랐다.
태수는 그런 수간호사에게 마주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거 앞으로도 저희 좀 신경 써 달라는 성의인데요.”
“그럼 얼른 받아야죠. 성의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리고 치프는 이런 거 안 줘도 우리들이 많이 생각하는 거 아시죠?”
“물론입니다.”
태수와 수간호사는 서로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태수가 레지던트 1년차 일 때부터 이어온 인연이다.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지만 서로의 관계는 숙성된 된장과 같이 깊이를 더해갔다.
간호사실을 벗어난 태수는 곧장 옥상으로 올라갔다.
끼익.
옥상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건 김혁권의 따가운 목소리였다.
“거, 사람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겁니까?”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3분 정도요!”
소리치는 목소리가 너무도 당당했다.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김혁권의 옆으로 다가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기껏 뽑아 놓은 커피 다 식었네. 그래도 마셔요.”
다시 뽑을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짠돌이 기질은 여전했다.
태수는 기꺼운 마음으로 식은 커피를 받아들고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받으세요.”
“갑자기 이런 건 왜 줘요? 과장님이 며칠 전에 추가수당 계산해 주셨는데.”
“더 받으실 자격 있습니다.”
“이걸 닥터 최가 준비한 거 같진 않고.”
예리한 김혁권의 눈초리에 태수는 이실직고 했다.
“이사장님이 준비해주신 거랍니다.”
“그 분이 나 같은 간병인들까지 신경 쓴답니까?”
“외과 소속이잖습니까.”
태수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은 김혁권이 봉투를 힘차게 손바닥으로 때렸다.
착!
“접수했어요. 물리기 없기입니다.”
“물론입니다.”
“좋아요. 그런데 커피가 너무 식은 거 같은데, 다시 뽑아드릴까?”
“그냥 드시죠.”
“아, 이거 속 보이네.”
김혁권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지만 기분은 매우 좋은 모양이었다.
태수에게 일전에 차별한다고 쏘아붙였던 섭섭함도 어느새 풀려가고 있는 느낌이다.
바쁘게 돌아다닌 태수는 외래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전 레지던트를 소환했다.
의국에 모여 있는 그들은 묘한 기대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간호사들에게 이미 금일봉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그러니 당연히 전과 같이 배달음식이 도착하리라고 눈을 반짝이는 중이었다.
“저번에 먹었던 거 중에서 난자완스하고 깐풍기 맛있던데, 그거 한 번 더 시키셨나 몰라.”
“또 후라이드만 시키신 건 아니겠지? 치킨은 양념반 후라이드반, 무 많이 인데.”
“족발하고 보쌈보다는 파스타나 피자도 좋은데.”
다양한 인원들인 만큼 입맛도 달랐다.
군침이 입에 가득 차오를 무렵이다.
끼익.
의국 문이 열리는 순간 레지던트들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왔다!”
“뭐가 먼저냐!”
의국 문으로 향한 시선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그러나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온 건 모두의 기대와 달리 태수의 모습이었다.
순간 다들 멈칫하더니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변했다.
웬만하면 나서지 않는 정민수가 자신도 모르게 태수를 향해 한 마디 했다.
“치프가 먼저 들어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무슨 소리야?”
“아직 배달 음식들 안 왔단 말입니다.”
정민수기에 이런 이야기들이 가능했다.
아니, 다른 레지던트들은 정민수의 항의에 눈빛으로 힘을 실어줬다.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바뀌자 의국이 착 가라앉았다. 그제야 무슨 이야긴지 직감한 태수 얼굴에 어이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얘들이 정신 못 차렸네.”
“네?”
“동작 봐라.”
태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의국에 흘렀다.
‘뭔가 잘못 됐다.’
공통된 생각이다.
얼른 서로 눈치를 보며 사고 친 레지던트들을 색출했다. 하지만 모두 고개를 흔들며 모르겠다는 표정들뿐이었다.
어느새 레지던트들은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 흘렀다.
뭐 때문에 태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태수가 레지던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니들 왜 그러고 서 있냐?”
“네?”
“옷 안 갈아입어?”
태수의 물음에 레지던트들이 또 한 번 서로를 바라봤다.
옷을 갈아입으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혹시 가운을 벗으라는 소리는 아닐까?
곰곰이 생각하던 송민규가 태수에게 얼른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겠습니다.”
“정신 차리겠습니다.”
레지던트들이 엉겁결에 후창했다.
태수 얼굴이 더더욱 황당하게 물들어갔다.
“얘들이 왜 이래? 가운 입고 오프 나갈래?”
“오……. 프요?”
“이야기 못 들었어?”
“전혀요.”
송민규가 혹시나 싶은 얼굴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역시나 다들 모르는 눈치였다.
태수는 오히려 어이가 없었다.
“송 선생. 과장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
“말씀은 없으셨고 외래가 끝났는데도 아직 병원에 계시긴 합니다.”
송민규의 말에 각 전문의들의 외래 전담 레지던트들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오재욱 선생님도 집에 안 가셨는데.”
“신창용 선생님도.”
“박수철 선생님은 ICU에 들어가신다고 가셨어.”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변할 때였다.
끼익.
의국 문이 한 번 더 열리더니 하석준 과장이 들어왔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나? 오늘은 그냥 나가라니까.”
“지금 나가려던 참입니다.”
“오랜만에 같이 오프 나가는 건데 얼른 나가. 시간 아깝잖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난 환자들 한 번 둘러보고 다시 와야겠어.”
“수고하십시오.”
태수의 인사를 받은 하석준 과장이 손을 크게 한번 휘젓고는 다시 의국을 나갔다.
반면 레지던트들은 지금 하석준 과장과 태수의 대화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같이 나가는 오프?
과장님이 외래 후에 직접 환자들을 보러 간다?
머릿속에 혼란만 가중됐다.
그때 태수가 시간을 슬쩍 확인하며 말했다.
“더 설명해봐야 시간만 아까우니까 다들 옷부터 갈아입어. 어서.”
“네? 아, 네.”
“외과 인턴들도 부르고. 자자, 움직여.”
태수는 지시를 내림과 동시에 앞서서 숙직실로 들어갔다.
다른 레지던트들도 일단 태수를 따라 몸을 움직이고 봤다.
잠시 후 동성종합병원 정문에서 한 무리의 젊은 남자들이 걸어 나왔다.
태수와 송민규, 그리고 정민수를 포함한 레지던트들과 인턴들이었다.
옷을 갈아입는 사이 이야기가 다 되었는지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다.
홍진만은 펑퍼짐한 옷차림으로 좌우에 있는 동기들에게 한껏 기쁨을 표출했다.
“이야. 이렇게 같이 오프 나가는 게 처음 아니야?”
“진짜 처음이네.”
“오늘 아주 놀다가 죽어보자고. 음하하!”
홍진만의 우렁찬 웃음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