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59
00262 262화
이틀 후.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 2층에 외출복 차림의 태수가 올라섰다.
누굴 찾는지 좌우로 고개를 돌리던 태수가 이내 누군가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김수진 간호사였다.
며칠 사이 그녀의 얼굴은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식사도 대충하는 건지 안색이 많이 안 좋아진 상태였다.
다가가며 가볍게 인사를 한 태수는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일단 뭐라도 좀 드시죠.”
“괜찮아요.”
“제가 배가 고파서요. 점심을 대충 먹었거든요. 뭐 좀 주문해도 되죠? 당연히 제가 사드리는 겁니다.”
태수가 배까지 문지르며 말했다.
그렇지만 태수의 얼굴은 수척한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건지 뻔히 알고 있는 김수진 간호사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여긴 뭐가 맛있나.”
능청을 떨며 메뉴판을 살피기 시작한 태수와 달리 김수진 간호사는 영혼이 없는 인형처럼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카페에 있는 요깃거리를 잔뜩 주문한 태수가 억지로 김수진 간호사에게 권했다.
몇 번 거절을 했지만 태수의 태도가 워낙 완강해 김수진 간호사는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입을 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에 빈 그릇이 치워지고 음료수만이 테이블에 있었다.
태수는 슬쩍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거 간식으로 배를 채운 것도 오랜만인데 나쁘지는 않은데요?”
“네.”
“제가 너무 많이 먹었나요? 김 간호사님이 좀 더 드셨어야 했는데요.”
“괜찮아요. 그보다…….”
김수진 간호사가 슬쩍 말끝을 흐렸다.
본격적인 용건을 이야기하려는 걸 태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더 이상의 능청은 좋지 않았다.
태수는 표정을 서서히 차분하게 바꾸며 진지하게 물었다.
“알겠습니다. 여기까지만 하죠. 자, 이제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셨는지 이야기를 좀 들어볼까요?”
“수술…… 해 주실 수 있나요?”
“…….”
순간 태수의 입이 다물어졌다.
혹시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 예상이 역시나로 바뀐 순간이다.
하지만 태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물었다.
“제가 다른 병원을 알아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건 어떻게 됐습니까?”
“알아보지 않았어요.”
“왜 그러셨습니까.”
“제가 믿는 선생님이 눈앞에 계시는데 누굴 또 찾아봐야 하죠?”
따지고 드는 김수진 간호사의 모습에 태수가 멈칫했다.
“김 간호사님. 지금 아버지의 병환이…….”
“또 이야기해 주지 않으셔도 잘 알고 있어요.”
“아니요. 심각성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시는 거 같습니다. 제가 수술 했을 경우 수술 성공 확률은 고작 10퍼센트 미만입니다. 더 확실하게 말씀드릴까요? 수술 중에 돌아가실 확률이 90퍼센트가 넘는다는 말입니다.”
태수는 다소 냉정하게 이야기했다.
이 상황을 감성적으로 대하려는 김수진 간호사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 줘야 했다.
하지만 김수진 간호사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알아요.”
“그런데…….”
“제가 선생님 화법대로 이야기해 볼까요? 선생님만이 유일하게 수술에 대해서 정확하게 판단을 내려줬어요. 서울의 다른 의사들은 고개만 저었다고요. 그럼 제가 누굴 믿을 수 있을까요?”
“그분들도 저와 비슷한 생각이라 말하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태수가 차분하게 대꾸했지만 김수진 간호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해도 선생님만 그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간병인으로 혁권 씨를 추천해 주신 것도 사실 선생님이시잖아요.”
“그거야 마침 배건형 환자가 퇴원을 한다고 해서 그랬습니다.”
“혁권 씨는 배건형 환자가 집으로 같이 가자고 했는데 선생님이 이야기해서 마음을 돌렸다던데요.”
날카로운 김수진 간호사의 말에 태수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굳이 알리길 원한 일이 아니었기에 조용히 있었을 뿐이다.
‘이 인간이.’
괜스레 김혁권에게 속으로 투덜거렸다.
사실 병원 내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던 김혁권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기도 했다.
태수는 바로 마음을 추스르고 김수진 간호사를 바라봤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죠.”
그 말에 김수진 간호사는 확고한 눈빛으로 태수를 응시했다.
“선생님이 수술해 주세요.”
“전 아직 레지던트입니다.”
“그럼 김민성 환자를 수술하셨을 때는요? 배건형 환자 심장 멈췄을 때는요? 그때는 레지던트가 아니셨나요?”
“…….”
“계속할까요?”
“아닙니다.”
태수가 고개를 저었지만 김수진 간호사는 계속 몰아붙였다.
“저는요. 우리 병원의 모든 의사 선생님하고 수술해 봤어요. 레지던트들부터 과장님들까지 모두요.”
“알죠.”
“그분들 실력도 다 알아요. 그런데 그분들보다 최 선생님 수술 실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도 알아요.”
“그건…….”
태수의 입이 열리려했으나 김수진 간호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혁권 씨가 그랬어요. 혁권 씨가 알고 있는 최 선생님의 본 실력은 아직 한국에서 한 번도 드러나지 않았을 거라고요. 분명히 모든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지만 선생님의 베스트 실력을 끌어낸 환자는 아직 없다고 했어요.”
“…….”
“혁권 씨 생각뿐이 아니에요. 선생님 수술하는 걸 모두 곁에서 보조한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그래서 저에게 맡기시겠다는 겁니까? 아버지가 수술대에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데요?”
태수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 눈빛에 한 점의 감정도 묻어 있지 않았다.
김수진은 그런 태수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최선을 다해 주실 거잖아요. 꼭 그렇게 해 주실 거잖아요.”
“그거야 그렇죠.”
“그러니까 해 주세요. 후회하지 않을게요. 원망하지도 않을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선생님이 해 주세요. 꼭이요.”
김수진 간호사는 어렵사리 말을 끝마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미 결정했으니 태수보고 선택하라는 의미다.
김수진 간호사는 아예 결판을 지으려 불러낸 모양이다.
태수는 그런 사정을 눈치채자 더더욱 고민했다.
김덕현을 동성종합병원에서 내보내지 않으면 결국 수술은 태수의 몫이다.
그렇다고 아픈 환자를 이대로 내보내는 건 태수에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따지니 결국 답은 정해져 있고 태수는 대답만 하면 될 상황이 됐다.
하지만 태수는 쉽게 수락하기 어려웠다.
이미 태수의 머릿속에 눈앞에 펼쳐질 여러 상황이 스쳐 갔다.
다른 보호자도 아니고 병원 간호사가 과장이 아닌 레지던트를 집도의로 선택한다.
그게 가져올 파장은 너무도 크다.
지금도 곳곳에서 전문의들이 태수의 흠을 잡으려 한다.
이런 상황에 집도를 맡는다는 건 불에게 달려드는 불나방과 같다.
하지만 보호자가 집도의 선정을 마친 이상, 태수가 거부할 권리는 없다.
거부한다는 건 환자를 방치하는 일과 같다.
태수는 속으로 쓴 미소를 지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태수는 고민하는 자신이 어이없었다.
무엇을 위해 고민해야 하는가.
그건 환자다.
지금도 앞으로도 환자를 위한 고민이 최우선이 되어야 했다.
일신의 안녕?
물론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눈앞에 도움을 청하는 김수진 간호사가 애처로웠다.
만약 외면하고 편안함을 추구한다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 같았다.
결정을 내린 태수가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탁.
빈 음료수 잔을 내려놓은 태수가 김수진 간호사에게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제가 수술하겠습니다.”
“정…… 정말이요?”
“네. 대신에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만 하세요. 뭐든지요.”
김수진 간호사의 각오 어린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제야 태수는 요구사항을 침착하게 말했다.
“우선 저도 정말 피터지게 공부해야 합니다. 그 시간을 최대한 줄이겠지만 수술 날짜가 미뤄지는 건 양해해 주십시오.”
“제가 감사할 일이에요. 그리고 또요?”
“어시스턴트로 정민수를 지목해 주시고요. 심장 집도는…….”
“박성민 선생님인가요?”
김수진 간호사가 먼저 말하자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흉부외과 최고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와 호흡을 맞추기에는 최적의 흉부외과 의사입니다.”
“그건 제가 직접 과장님들에게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마취는 서영우 선생님이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어요.”
“서 선생님이요?”
태수가 조금 의아하게 바라봤지만 김수진 간호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병원에서 수술하게 된다면 서 선생님도 어떻게든 숨을 붙들고 있을 수 있게 죽어라 공부하시겠다고 했어요. 괜찮나요?”
“그건 제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아버지 수술 어떻게…… 돼도 선생님 원망하지 않을게요.”
김수진 간호사는 힘겹게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만큼 그녀로서도 커다란 결심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에 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고개 숙였다.
“믿어주신 만큼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태수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이거뿐이었다.
***
병원에 들어오고 얼마 후.
하석준 과장이 태수를 호출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간 태수는 이미 바라보고 있던 하석준 과장과 시선이 마주쳤다.
손짓으로 하석준 과장은 소파를 가리켰다.
태수가 자리하자 하석준 과장도 상석에 앉았다.
서로 오가는 말은 없었다.
하석준 과장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 뿐이었다.
좀 더 침묵이 이어진 후였다.
하석준 과장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결국 원래 김 간호사 뜻대로 치프가 집도하게 됐군. 그보다 이제 어떻게 준비할 생각인가?”
“죽어라 공부해서 단 1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높일 겁니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고. 내일 컨퍼런스에서 이 이야기가 나올 텐데 그 파장을 어떻게 하냐는 거야.”
“뭘 어쩝니까. 그냥 밀고 나가야죠.”
“그냥 밀고 나간다라. 그게 가장 자네다운 방법이기는 하지.”
하석준 과장 얼굴에 묘한 씁쓸함이 걸렸다.
태수는 그런 그에게 말했다.
“이번 수술이 끝날 때까지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
하석준 과장의 말에 태수가 깜짝 놀랐다.
“네?”
“뒤는 걱정하지 말고 준비하라고. 조금 속마음을 털어놓자면 정말 기분이 묘해. 내가 지목되지 않아서 한편으로는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말이야.”
하석준 과장이 마음을 툭 털어놓았다.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들은 말 그대로 진솔했다.
실패할 확률이 90퍼센트 이상.
이런 수술을 집도하고 싶은 의사는 없다.
태수는 그 마음만으로도 감사했다.
“지금부터 실패란 단어는 제 머릿속에서 지울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리고 부탁이 있습니다만…….”
“무슨 부탁?”
하석준 과장의 물음에 태수는 차분하게 요구사항을 말했다.
“지금 이 시간부터 정 선생과 함께 모든 의국 일에서 빠졌으면 합니다. 대신에 김덕현 환자는 저하고 정 선생이 24시간 전담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그건 그렇게 하고, 또 도와줄 건?”
“당장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짓자 하석준 과장도 푸근한 미소를 보였다.
“언제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이야기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 그럼 가 봐. 1분도 아쉬울 텐데 말이야.”
“감사합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태수는 눈빛을 굳히며 하석준 과장의 방을 나섰다.
태수가 정민수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건넸다.
대략 알고 있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자세히 듣게 된 정민수의 눈빛이 착잡하게 내려앉았다.
태수는 그런 정민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래?”
“인마. 뭘 어떻게 해. 달려들어야지.”
“그렇지?”
“당연한 걸 뭘 물어.”
정민수는 역시나 화끈했다.
‘저 자식.’
연성대학병원에서 봤던 정민수는 지금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정말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