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62
00265 265화
하석준 과장에게 이야기한 후로 만 하루가 지난 상황이다.
그런 두 사람의 수면시간은 고작 네 시간뿐이다. 그 외에 시간은 테이블에 가득 펼쳐진 프린트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육체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한계가 오려면 멀었다.
그걸 증명하듯이 두 사람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프린트한 임상사례를 살피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
정민수가 김덕현을 살펴보러 간 사이였다.
혼자 남은 태수는 프린트물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엄청나게 많은 분량이다.
그 모든 프린트물이 모두 너덜너덜했다.
며칠 사이 몇 번을 봤는지 몰랐다.
그럼에도 아직 수술에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만큼 수술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상황이 전개될지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눈 주위에 다크 서클이 생긴 건 이미 오래전이다.
피로 누적에 눈도 충혈된 상태였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씻는 것도 대충이라 푸석푸석한 모습이다.
뻐근한 눈을 느낀 태수가 잠시 프린트물에서 시선을 뗐다.
“조금만 쉴까?”
솔직히 쉴 시간도 아까웠지만 사람의 체력과 집중력은 유한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결심한 태수가 잠깐 쉬려던 찰나였다.
띠리릭.
휴대폰이 울려 바라보니 박성민이었다.
태수는 바로 통화를 연결시켰다.
“네. 선배님.”
“결국 나보고 심장 째라고?”
“그러게요.”
태수가 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박성민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진짜 막막하니 좋다.”
“막막하다니요?”
“Mitral stenosis(승모판막 협착증)은 무조건 펌프 수술이라는 거 몰라?”
“압니다.”
“아는데 왜 나야. 인마. 나 펌프 수술 다시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 승모판막이라든지 대동맥판막을 건드려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고.”
박성민이 하소연을 하자 태수가 차분하게 말했다.
“저도 크론병은 이제 두 번째 경험하는 겁니다.”
“그래서 너도 그러니까 나도 그래야 된다는 거냐? 너 지금 이게 환자한테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몰라?”
“그럼 제 뒤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다른 흉부외과 전문의들에게 부탁해야 합니까? 그들이 성공률이 희박한 수술에 순순히 참여해 줄까요?”
태수의 물음에 박성민이 찔끔했다.
“그건…… 아니지.”
“흉부외과 과장님께 부탁드리려고도 했습니다만 심장전문이 아니라 폐와 중격동 전문이시잖습니까.”
“진짜 이거 미치고 팔딱팔딱 뛰겠네. 그래그래. 네 말이 다 맞아. 아주 옳아. 그런데 왜 내 입장은 생각해 주지 않냐고.”
“진짜 못하시겠습니까?”
태수가 묻자 박성민은 외려 움츠러들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만약 정 못 하시겠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김기훈 과장님에게 심장전문의 한 명 추천해 달라고 하겠습니다.”
“야, 넌 또 왜 그러냐. 이 상황에 외부에서 의사를 데려오면 다들 참 널 어여쁘게 보겠다, 안 그래?”
걱정과 비꼼이 뒤섞인 박성민의 목소리에 차분한 태수도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김수진 간호사는 수술해 달라고 그러지, 저도 이번 수술은 자신이 없으니까 그냥 시간만 보내야 합니까?”
“태수야. 진정해 인마.”
박성민이 타이르자 태수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후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감정이 좀 격해졌습니다.”
“아니다. 정말 너는 오죽하겠냐. 한숨이 아주 그냥 푹푹푹 쉬어지네.”
“그래도 제가 먼저 포기하진 않을 겁니다. 제게 수술을 맡긴다고 했던 김수진 간호사의 그 간절한 눈빛은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어서요.”
다시 차분하게 감정을 가라앉힌 태수가 결심을 보였다.
잠시 박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 또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모양이었다.
태수는 재촉하지도 않았고 전화를 끊지도 않았다.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3분 정도 침묵이 흐른 뒤였다.
박성민의 심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심장 잡고 있으면 성공 확률은 올릴 수 있어? 수술보다 수술 과정에서 일어나는 돌발 상황이 문제라며.”
“지금 크론병에 대해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찾아서 살펴보는 중입니다. 단 1퍼센트라도 확률을 올리려고요.”
“넌 그럴 놈이니까 새삼스럽지도 않아. 그런데 태수야. 마지막으로 묻자. 너 진짜 나한테 심장 맡길 수 있겠냐?”
박성민의 질문에 태수는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맡길 수 있습니다. 대신 승모판막에 대해서 무지하게 공부하셔야 할 겁니다.”
“……젠장. 너 진짜 가끔 사람 진 빠지게 하는 거 아냐?”
“생긴 게 이래먹어서 죄송합니다.”
“그래. 죄송 좀 해라. 아주 많이 죄송 좀 하라고. 너도 물론 그렇겠지만 나도 이번에 눈 밖에 나면 진짜 머리 아파진단 말이야.”
박성민의 잔소리에 태수 표정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소극적인 모습도 이해가 됐다.
자신 때문에 선배까지 위험에 빠뜨리기는 싫다.
태수는 바로 생각을 바꿨다.
“제가 선배님에게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한 거 같습니다. 김 간호사에게도 이야기해 놓을 테니까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이 새끼가. 잘 나가다가 또 불법 유턴하네.”
“네?”
“헛소리 말고. 끊어. 지금부터 무지하게 바빠질 거 같으니까.”
뚝.
박성민은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휴대폰을 귀에서 뗀 태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결국 박성민의 허락은 받아냈다.
하지만 그 또한 승낙이 쉽지 않았다는 걸 태수도 알고 있었다.
태수는 솔직히 기쁘지 않았다.
이번에는 같이 수술한다는 기쁨보다 두려움이 일었다.
자신과 민수가 어떻게 수술을 진행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지금은 단 십 분이 아쉽다.
태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프린트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그 열정은 레지던트들 또한 질릴 정도였다.
홍진만과 안성훈이 일과 중 잠깐 의국에서 쉬면서도 눈치를 봤다.
태수와 정민수.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모른다는 듯이 여전히 임상사례를 회의 책상에 늘어놓고 펜으로 표시하기에 바빴다.
“합병증으로 발생한 경화성 담관염은 가급적이면…….”
태수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혼잣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태수만 그런 게 아니라 정민수도 마찬가지였다.
“신장 결석은 기존의 생성 위치와 조금 달라지니까…….”
그 열정에 지켜보고 있던 홍진만과 안성훈이 어떤 말도 내뱉지 못했다.
태수와 정민수의 분위기에 의국이 지배당한 느낌 탓이었다.
홍진만이 긴장한 얼굴로 컵을 내려놓다가 소리를 냈다.
탕.
테이블에 부딪힌 머그잔 소리는 은근히 크게 의국을 울렸다.
순간 홍진만과 안성훈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경화성 담관염을 수술할 때는…….”
태수와 정민수는 그 소리를 아예 듣지 못한 듯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짜 다행이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일 뿐 안성훈이 홍진만을 날카롭게 째려봤다.
‘너…….’
‘쏘리.’
홍진만은 손을 비비는 척하며 사과했다.
환자를 위해 열성을 보이는 태수와 정민수였기에 최대한 분위기를 흩트리지 않으려 그들 또한 노력했다.
어떻게?
말 그대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홍진만이 슬쩍 안성훈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아주 작게 물었다.
“우리 쉬는 거 맞지?”
“아마도.”
“젠장. 뭐라도 하자.”
홍진만이 투덜거리며 테이블에 있던 주인 없는 임상사례가 적힌 프린트물에 손을 뻗었다.
끌어당겨서 눈으로 확인한 순간 홍진만 표정이 멍하니 변했다.
매일같이 보는 영어, 의학용어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수준이 너무도 높은 탓이다.
이걸 흔들림 없이 보고 있는 태수와 정민수는?
홍진만 눈빛에 존경심 아니, 반항심이 일어났다.
‘나도 할 수 있어.’
태수를 목표로 삼은 홍진만이었기에 오기를 부리며 또다시 시선을 내렸다.
반면 안성훈은 자신의 수첩을 꺼내 들어 기존에 공부해 놓은 걸 복습할 뿐이었다.
5분이나 지났을까?
슬쩍.
프린트물을 슬며시 내려놓은 홍진만의 얼굴에 벌겋게 변해 있었다.
단시간에 너무 급격하게 머리를 회전시킨 탓이다.
‘언제 따라잡아.’
속으로 투덜거리는 한편, 이걸 이토록 집중해서 보고 있는 태수와 정민수가 존경스럽기도 했다.
조금은 불편한 쉬는 시간이 모두 지나갔다.
홍진만과 안성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태수 앞에 섰다. 하지만 태수도 정민수도 여전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시선을 마주치기를 기다리던 두 사람 중 안성훈이 홍진만에게 눈짓했다.
‘그냥 가자.’
안성훈의 눈빛을 읽은 홍진만은 조금은 멍한 얼굴로 몸을 움직였다.
조용히 의국 문을 닫고 나온 두 사람이 동시에 길게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후아. 이제 숨이 제대로 쉬어지네.”
“와. 진짜 위압감이라는 걸 제대로 느껴본 거 같아.”
“누가 아니라냐? 치프도 민수 형도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집중할 수가 있어?”
“우리가 공부하는 건 명함도 못 내밀겠던데.”
안성훈의 고개를 흔들자 홍진만은 한 술 더 떴다.
“진짜 질린다. 공부하는 것도 질리는데, 그 내용은 더 질린다니까. 아주 그냥 너무 멋져서 질려 보이는 건 또 처음이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편안하게 있으면 안 되겠지?”
“그럼! 인턴들 불러. 오늘 환자들 한번 제대로 둘러보자.”
홍진만과 안성훈은 뭔지 모를 압박감을 느꼈다.
항상 여유로웠던 태수가 한 번 공부를 시작하니 너무도 무섭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정민수에 대한 기존의 평가도 달라졌다.
태수의 뒤를 받쳐 주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자신들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깊이가 있는 의사였다.
솔직히 그동안 태수와 정민수가 자신들의 수준에 맞춰줬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도 수준이 엄청 벌어져 있다고 느꼈다.
더구나 이대로 가다가는 평생 따라잡지도 못할지 모른다는 조급함이 들기도 했다.
홍진만과 안성훈만이 아니었다.
다른 레지던트도 태수와 정민수의 모습에 자극을 받았다.
심지어는 하석준 과장도 마찬가지였다.
외래 시간 중 하석준 과장이 송민규를 불러서 물었다.
“두 사람 뭐 하고 있어?”
“의국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벌써 며칠째야? 그러다가 몸 상할 텐데 말이야.”
“잠도 거의 안 자는 거 같아서 걱정입니다.”
송민규의 말에 하석준 과장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언제 밥 한 번 사줘야겠어.”
“좀 그렇게 해 주십시오. 저희 말은 아예 안 듣지만 과장님 말씀까지 무시하진 않을 거 아닙니까.”
“그래. 알았어. 그럼 진료 이어가지.”
“다음 환자 들여보내겠습니다.”
송민규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텅.
문소리가 들린 후에야 하석준 과장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거 자리 지키려면 좀 더 공부해야겠어.”
얼마 전에는 GIST 환자, 이번에는 크론병 환자.
점점 공부해야 하는 병들이 늘어갔다.
그러나 그게 싫지 않았다.
최태수.
대단한 놈이다.
하석준 과장이 마음으로 솔직히 인정했다.
실력?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전부는 아니다.
열정이다.
환자를 위해 죽음과 싸우겠다는 그 열정 말이다.
그런 태수를 부리려면 최소한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지시만 하는 과장은 되기 싫었다.
“어허.”
즐거운 한숨을 내쉬며 하석준 과장이 두꺼운 의학서적을 펼쳤다.
“합병증이라.”
하석준 과장뿐만이 아니다.
전문의들 또한 자극을 받았는지 외과에 때 아닌 공부 열풍이 불었다.
레지던트에게 밀리는 전문의?
그 꼴은 죽어도 싫었던 모양이다.
***
태수와 정민수가 의국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던 중 적막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띠리릭.
태수는 휴대폰이 울리자 발신자를 확인했다.
외과 간호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