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623
02626 2626화
무전기에선 활기찬 목소리들 속에 비통한 목소리가 섞여 나오고 있었다.
-지하 9층입니다. 사망자…… 5명 발견. 일가…… 일가족으로 추정됩니다.
-지하 11층입니다. 사망자 2명 발견……. 후우우. 연인 같습니다.
-지하 11층입니다. 사망자 추가 3명 발견……. 가족인데 애가…… 이 쬐금한 녀석이……. 에라이!
태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었지만 무전을 끌 수 없었다.
듣기 싫어도 들어야 했다.
이곳에서도 결국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 비통한 마음을 어디에 풀 수 없어 하늘에 화풀이했다.
‘꼭 이랬어야만…… 이렇게 했어야 했습니까.’
물론 방화범 소행이란 건 알고 있다.
알면서도 원망할 상대는 하늘 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주말 나들이 나온 게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죄가 있다면 어렵게 시간을 낸 죄밖에 없다.
주중 내내 일에 치여 힘든 몸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추억을 남기고 싶었던 욕심이 전부였다.
그 대가가 참담한 사고라니.
원망을 토해 내도 하늘은 묵묵부답이었다.
아침보다 한층 더 어두워진 하늘이 답일지도 모른다.
“젠장. 차라리 비나 쏟아져라.”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렇다면 조금이나마 이 짜증이 가라앉을 것 같기도 했다.
태수가 그렇게 원망하던 중이었다.
띠릭.
“최 팀장.”
엄수찬 차관의 호출이다.
태수는 무거운 손을 들어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최태수입니다.”
“이쪽으로 좀 와야겠어.”
“네. 지금 가겠습니다.”
툭.
무전기를 떨구듯 내린 태수는 몸을 돌려 지휘 텐트로 향했다.
곧 태수는 지휘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못 보던 게 있었다.
종합 상황판과 똑같은 사이즈의 화이트보드였다.
또 다른 화이트보드는 가로가 아닌 세로로 세워져 있었다.
선이 여러 개 그어져 있고, 그 사이에 빨간색과 파란색이 규칙성 없이 칠해져 있었다.
엄수찬 차관은 그 화이트보드를 향해 서서 턱을 쓸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태수가 다가가 물었다.
“저 왔습니다. 그런데 뭡니까?”
“불이 난 층과 나지 않은 층을 색으로 표시한 거야.”
그 소리에 태수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파악이 됐습니까? 어떻게요?”
“확실하진 않아.”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태수는 얼떨떨한 목소리를 낼 정도로 혼란스러워했다.
화재가 일어난 층과 아닌 층을 구분했는데, 확실하지 않단 말은 어떻게 생각해 봐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때 엄수찬 차관이 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각 헬기들을 활용해 그랜드 타워를 돌며 확인하게 했어.”
“아! 그런 방법이……. 그런데 왜 확실하지 않습니까? 눈으로 봤으면 신뢰해도 되는 거 아닙니까?”
“한 바퀴 돌아본다고 내부 깊숙한 곳까지 확인할 순 없잖아. 연기가 보이는 층을 화재가 났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고.”
그의 핵심을 찌르는 말에 태수가 아차 했다.
“그러네요. 20층 이상은 면적이 반으로 줄었다고 해도 한눈에 파악할 수 없죠.”
“그래. 그래도 어쨌든 내부에 연기가 없는 층들은 화재가 없다고 가정하고 색칠한 거야.”
“음, 그 층수가…….”
태수는 아래에서부터 눈으로 훑었다.
그렇게라도 확인하려는 사이 엄수찬 차관이 말했다.
“총 105개 층 중에 가장 고층부 화재가 확인된 건 83층, 22개 층은 화재 미발생 구역이라고 구분해 놨어.”
“22개 층이나요?”
“다행이지. 박 부장인가? 그 사람이 말하기를, 건물 전층에 불이 붙었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 타들어 가지 않는다고 했어.”
박해용 부장이 지휘 텐트에 다녀간 모양이다.
태수의 표정도 약간은 밝아졌다.
“그렇습니까?”
“거기다 소방대장도 같이 있었는데, 의견이 똑같았어. 어떤 화재도 전 층이 동시에 불 탈 순 없다고 말이야.”
“그 두 분이 같은 의견을 내셨다면 그건 백 퍼센트입니다.”
태수의 목소리에 좀 더 힘이 실렸다.
그런 태수를 보며 엄수찬 차관이 의미심장하게 한 마디 더했다.
“더 좋은 소식 알려 줄까?”
“또 있습니까? 아니, 뭡니까?”
“이렇게 눈빛이 초롱초롱할 때가 있나. 처음 보는 거 같아.”
“지금 그런 말씀이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태수가 재촉하자 엄수찬 차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좌우간 동성건설에서 전기 기술자가 같이 왔나 봐. 지금 비상 전력을 다시 살릴 수 있는지 확인 중이고.”
“가능성이 있답니까?”
“없진 않다고 했어. 화재 영향을 받았지만 모든 게 불타진 않았으니까.”
“제발, 제발!”
꽈악.
태수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거칠게 흔들며 성공을 갈망했다.
그런 태수 모습에 엄수찬 차관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성공할 거야. 그게 성공해서 비상 엘리베이터만 가동해도 구조는 몇 배로 수월해질 거고.”
“저희도 올라갈 수 있고요.”
“그건…….”
더듬거리는 엄수찬 차관에게 태수가 재빨리 본대로 설명했다.
“각 비상계단을 확인해 봤습니다. 열기도 열기지만, 콘크리트가 떨어지고 손잡이가 휘어서 아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동 가능한 건 중앙 에스컬레이터밖에 없고요.”
“그건 또 언제 확인했어?”
엄수찬 차관이 황당한 얼굴로 묻자 태수는 외려 반문했다.
“차관님은 언제 그렇게 진행하셨습니까?”
“뭐? 이 사람……. 그래. 지금 누가 수단과 방법을 신경 쓰겠어.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하려고 안달인데.”
“중장비가 많은 일을 해 주고 있습니다.”
태수가 덧붙여 말하자 엄수찬 차관이 뒷짐을 지며 답했다.
“그래. 정말 적시에 와 줬어. 그래서 부상자들 구조에 탄력이 붙은 상태고.”
“네. 그보다 22개 층에 화재가 발견되지 않았단 사실이 더 마음을 편하게 합니다.”
“그래서 불렀어. 혹시 찬물 뒤집어쓰고 뛰어 올라가지 않을까 싶어서.”
“설마요. 제가……. 장담 못 드리겠네요.”
태수가 쓰게 웃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그럴 확률이 높던 탓이다.
엄수찬 차관은 그런 태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성급한 건 안 돼.”
“네. 알겠습니다. 그보다 국장님은…… 안 보이시네요.”
“브리핑 중이야. 저기.”
스윽.
엄수찬 차관이 손을 들어 TV 쪽을 가리켰다.
나란히 설치된 TV에 똑같이 김석준 국장 얼굴만이 가득했다.
폴리스 라인 근처인지 뒤쪽에 하얀 천막들과 그 너머로 불타는 그랜드 타워를 같이 담고 있었다.
그 밑에 문구는 다르지만 같은 뜻의 자막이 보였다.
-그랜드 타워 화재, 첫 브리핑.
태수는 리모컨을 들어 음소거를 해제했다.
그러자 김석준 국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현재까지 확인된 사상자는 총…….
김석준 국장의 입에서 각 현장에서 취합된 환자, 구조자, 그리고 사망자 수가 차례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집계 자료인지 손에 쥔 종이를 보며 이어서 말했다.
-현재까지 지상은 10층, 지하는 11층까지 화재 진압과 구조자 수색이 진행 중에…….
내부 상황이 어떤지에 대한 발표가 먼저였고, 구조에 난항이 계속된 이유도 말했다.
-첫 발화 장소가 EPS실이었으며, 비상 전력 장치도 타격을 입어 방화벽 및 스프링클러가 작동 오류를…….
그 발표는 경직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오랜 시간 봐 온 태수도 김석준 국장의 얼굴에서 표정을 하나도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엄수찬 차관이 슬쩍 그 이유를 말해 줬다.
“김 국장의 대외적인 모습이야. 휴머노이드 국장이란 별명도 있을 정도로 말이지.”
“로봇이라. 딱딱하긴 하네요.”
“최 팀장은 처음 보는 모습이겠지. 김 국장은 최 팀장 얘기만 나오면 웃음꽃이 피는 사람이니까.”
“…….”
“아버님 생명의 은인이라 각별하겠지. 그런데 지금은 개인적으로 더 팬이 된 거 같아.”
엄수찬 차관은 그쯤에서 말을 멈췄다.
할 말이야 많지만 어떤 대화도 지금은 말하는 입장도, 듣는 입장도 달갑지 않은 탓이다.
태수도 마찬가지라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총체적 브리핑이 끝나고 기자들의 질문이 시작됐다.
-구조 종료는 언제로 예상하십니까?
-그건 예측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혹시 구상 중인 다른 구조 방법은 없습니까?
-아직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귀를 열고 적극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그런 질문과 대답이 오가던 중 누군가 불쑥 손을 들어 질문했다.
-동성건설이 광장 내 시설물을 무단으로 철거하던데, 그래도 문제없는 겁니까?
-구조자들의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럼 시행사와 조율이 안 된 부분이란 거네요. 그럼 동성건설을 출입시킨 것도 전혀 조율되지 않은 독단적 결정이었단 겁니까?
-…….
김석준 국장의 대답이 순간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기자를 향한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런 시선에도 기자는 전혀 개의치 않은 표정이었다.
보고 있는 태수가 짜증이 솟구쳤다.
“뭐 저딴 질문이 다 있어?”
“저 정도 질문에 발끈하면 어쩌나.”
“화 안 나십니까?”
태수의 얼굴 곳곳이 붉게 변했다. 그 어색한 얼굴색은 끓는 짜증을 억지로 죽이고 있단 증거였다.
엄수찬 차관도 알기에 태수를 진정시켰다.
“저쪽 뜻대로 따라 줄 이유가 없으니까 화를 낼 이유도 없지.”
“…….”
“그냥 봐. 역시 김 국장 보내길 잘했어.”
엄수찬 차관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태수는 신경질 가득한 눈빛으로 TV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TV 속에서 김석준 국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행사와 조율해야 하는 부분은 맞습니다. 하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아 조율할 담당자가 없었습니다.
-통화를 해 보실 수도 있었을 텐데요.
-기자님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5층 난간에 매달린 구조자를 구조하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연락은 안 하셨고요.
상대 기자는 계속 김석준 국장을 자극했다.
김석준 국장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지켜보는 태수가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저게 질문이야? 저게 질문이냐고. 저 새끼를 진짜…….”
“흥분하지 말라니까.”
“저딴 질문을 하는데 화가 안 납니까?”
“저쪽이야 이유가 있으니까.”
“이유요?”
태수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엄수찬 차관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돌변했다.
“저기 내신 기자만 있나? 외신 기자들도 같이 있어.”
“저도 보입니다.”
“그 정도로 큰 재난 사건이니까.”
크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엄청난 재난이었다.
그것도 인재로 발생한 일이다.
국내 체류 중인 외국 방송사 기자들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지금 그랜드 타워의 상공은 소방, 구조, 경찰 헬기 외에 각 방송국 헬기들도 상당했다.
국내 방송사도 있지만 해외 방송사들도 다수였다.
또 화면 곳곳에 다양한 인종들이 앉아 있는 걸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태수는 오히려 그게 더 불만이었다.
“그런데 저런 질문을 하는 게 말이 됩니까? 아주 세계적으로 망신살 뻗치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저 기자가 국내 기자라면 그렇겠지.”
“네?”
“저 인간, 중국 기자야.”
그 말에 태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중국 기자가 난리랍니까?”
“그랜드 타워에 중국 자본이 들어갔단 건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었나?”
“중국 자본이요?”
태수가 의아한 얼굴로 반문하자 엄수찬 차관이 오히려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거 때문에 한창 신문방송에서 난리였는데 몰랐어?”
“아마 헬기 타고 바다로 산으로 정신없이 날아다닐 무렵이었을 겁니다.”
“무심했다고 하면 되지, 핑계는. 좌우간 중국 대기업에서 제대로 작정하고 투자해서 세운 거야.”
“그걸……. 차라리 지들 나라에 세우지.”
“더 정확하겐 기술을 빼앗고 싶은데 방법이 없으니까 건물 짓는단 핑계로 설계도부터 건축 공법까지 싹 가져간 모양이야.”
엄수찬 차관도 썩 달가운 표정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