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626
02629 2629화
그때였다.
턱.
종이 상자를 집은 태수가 그대로 멈춰 섰다. 그런데 그냥 멈춰 선 게 아니라 점점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태수의 입에서 억눌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큭, 크극…… 하하하!”
태수가 갑자기 시원하게 웃어젖힌 순간이다. 서로 노려보던 정민수와 이기준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건 또 왜 저래?”
“확실히 정상은 아니야.”
그때 태수가 조금 진정됐는지 돌아서며 이기준에게 엄지를 내밀었다.
“아, 진짜. 너 때문에 웃는다. 방금 그 말 아주 좋았어.”
“정상이 아니라고 해서?”
“그거 말고.”
“뚱땡이? 이거?”
스윽.
이기준이 손가락으로 정민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태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바로 회심의 농담이지.”
“음, 농담이 이런 식인 건가?”
이기준은 태수의 반응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그런 반면 계속 놀림 받는 정민수의 얼굴은 어느새 구겨졌다.
“이 새끼들이 진짜…….”
정민수가 아무리 으르렁거려도 반응할 사람은 없었다.
웃고 떠드는 건 잠깐이었다.
정민수도 대형 구급상자를 찾아 자기 몫으로 가져갈 걸 담기 시작했다.
태수는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알고 있는 걸 보면 예종혁 구조대장과 만난 모양이었다.
정민수는 태수가 챙긴 걸 힐끔 보고 자신이 챙길 걸 바로바로 수정하기도 했다.
“저 새끼 입 꿰맬 봉합 세트는 꼭 챙기고……. 입 막을 인튜베이션과 엠부백은 무조건이고…….”
중얼거리며 태수를 향한 뒤끝도 부리고 있었다.
반면 태수와 이기준은 그런 정민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도착한 지 꽤 됐지만 제대로 얼굴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이기준도 그래서 지친 몸을 이끌고 일부러 뒤쫓아 온 거였다. 태수도 이렇게야 만난 이기준에게 먼저 말했다.
“와 줘서 고맙다.”
“훗. 착각은 자유니까 알아서 하고.”
이기준이 냉소적으로 말했지만 태수는 개의치 않았다.
“나 때문에 온 거 아닌 거 알아. 어쨌든 이 자리에 왔단 것 자체가 고맙다고. 연성 애들도 이번엔 덜 헤매는 거 같던데.”
“뼈 저리는 교훈을 얻었으면 발전하는 게 사람이니까.”
“그렇게 발전한 오늘, 더 멋있어진 자신을 보면서 짜릿해하는 것도 사람이지.”
뜬금없는 심오한 대화였지만 이기준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역시 낙천적인 성격이야.”
“그렇게 보이려 노력하는 중이야. 지금도 애간장이 녹는데 어째, 한 번이라도 웃어는 봐야지.”
“어떻게 참았어?”
“웃을 일이 있었을까?”
태수가 반문하자 이기준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질문했다.
“지금까지 올라가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냐고.”
“아, 그거……. 뭐, 올라가고 싶다고 자리 비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니까.”
“역시 감투는…….”
이기준의 말이 끝나기 전에 태수가 먼저 끼어들었다.
“귀찮지?”
“……쓸 수 있을 때 써야 해.”
“뭐?”
“만년 평의사는 오자마자 수술실에 떠밀려 들어가서 이제야 햇빛 보는 중이거든. 햇빛도 없지만.”
이기준이 또 한 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태수는 이번에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변했다.
“제발 농담은 하지 말자니까.”
“음, 레지던트들은 잘 웃던데…….”
“웃을 수밖에 없는 애들 괴롭히지 말고. 그보다 놀아줄 시간이 많이 없을 거 같은데.”
태수가 적당한 선에서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밤새 수다 떨 수 있는 상대지만 지금은 반가운 정도로 끝내는 게 옳았다.
그건 이기준도 마찬가지인지 바로 수긍했다.
“나도 뭐 좀 먹고 수술 대기해야 해.”
“그래. 고생하자.”
“너도. 아, 저기 뚱땡이도 잘 챙겨. 여기저기 굴러다니면 곤란하니까.”
“훗! 그래.”
태수가 실소를 터트리며 대답한 순간, 정민수의 발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기준, 너 그러다가 내가 끌고 올라가는 수가 있다.”
“그건 사양. 수술이 밀려서.”
“저 자식이 진짜!”
정민수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그러나 이기준은 끄덕도 하지 않고 태수를 바라봤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느껴지는 눈빛이다.
그걸 간파한 태수가 먼저 물었다.
“할 말 있어?”
“건강은 알아서 잘 챙기라고.”
“그럴게.”
“그리고…… 선배 잘 모시고. 그럼 간다.”
이기준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바로 텐트 밖으로 나갔다.
태수는 그 뒷모습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나가던 자신을 발견하고 뒤쫓아 온 정확한 이유도 이제야 알았다.
박성민이 걱정된 모양이었다.
대표로 그를 언급한 거지, 한때 함께 지냈던 이들이 모두 걱정되어 온 게 분명했다.
저 성격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었다.
그때 정민수가 옆으로 다가와 퉁명하게 한마디 했다.
“좀 솔직하게 살면 어디 덧나?”
“고양이 같은 녀석이잖아.”
“저런 건방진 고양이 새끼. 부뚜막이 아니라 툇마루에 디비져 잘 놈.”
“없는 고양이 험담 그만하고, 챙길 거나 챙겨.”
태수가 먼저 돌아서 다시 상자 쪽으로 향했다.
일부러 찾아와 준 이기준의 마음 씀씀이가 삭막해진 마음을 조금이나마 따스하게 했다.
그때 김혁권이 공사장에서 쓰는 노란 안전모를 가득 들고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뒤를 힐끔거린 김혁권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닥터 리가 여기까진 어쩐 일이랍니까?”
“지나가다 들렀답니다. 시시콜콜한 얘기 하다가 한마디 툭 던지고 가네요.”
“좀 솔직해도 될 법한데 아직도 그러네. 그보다 여기.”
턱.
내려놓은 안전모를 본 태수가 김혁권을 바라봤다. 어떻게 알고 있는지보다 더 중요한 걸 먼저 물었다.
“송 간호사님은 별말씀 없으셨습니까?”
“안전제일.”
“의외네요.”
“자기 때문에 진 빼게 하고 싶지 않답니다. 여긴 걱정 말라고, 그리고…… 이번엔 다치면 잔소리로 안 끝날 거랍니다.”
“어후!”
태수는 순간 몸을 바르르 떨었다.
송현미 간호사의 화를 온몸으로 받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결심하듯 강하게 말했다.
“절대 안전.”
“당연한 거고.”
“그보다 어떻게 여기 있는 줄 아셨습니까?”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닙니까?”
김혁권의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유병태가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들어오며 같이 동조했다.
“그러니까요. 쟤는 지 혼자만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라고요.”
그런데 유병태뿐만이 아니었다.
“닥터 유의 말에 나도 한 표 던집니다.”
“저도 투표권 있는 거면 한 표 행사해야지요.”
“기왕이면 나도 투표하게 해 주세요.”
브레드 김, 윤주성 조장, 추강익 간호사까지 한 마디씩 보태며 들어왔다.
다들 함께 올라가겠단 의미다.
저들이라면 걱정할 이들이 아니기에 태수는 어깨를 들썩였다.
“뭐, 투표는 의무니까 당연히 행사하시는 게 좋겠죠. 그나저나 개표 안 해도 몰표 나올 거 같은데.”
태수가 뻔한 결과에 투덜거리면서도 진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들이 끝이 아니었다. 바로 뒤를 이어 황경석과 설국진, 이성혁이 들어왔다.
그중 황경석이 슬쩍 눈치를 보더니 손을 들며 말했다.
“저도 한 표…….”
“그 투표권이 너한테까지 가진 않을 거 같지 않아?”
“그럼 마음으로 한 표 행사하겠습니다.”
황경석이 뺀질거리며 말하자 태수가 어이없는 얼굴로 변했다.
그건 잠깐이었다.
웃고 떠들 시간은 이제 없다.
어느새 진지해진 태수가 나란히 선 이들을 둘러보며 간결하게 물었다.
“같이 가려고?”
“네!”
대답 소리가 얼마나 큰지 텐트가 휘청거리는 느낌이었다.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단 강렬한 눈빛도 내보였다.
태수는 그런 그들에게 나지막이 경고했다.
“죽을 수도 있어.”
“팀장님이 그러셨잖아요. 한번 죽지 두 번 죽냐고?”
“웃기고 있네. ……뭐 하냐? 내가 짐까지 챙겨서 안겨 줘야 해?”
태수가 시큰둥하게 묻는 순간이었다.
허락이 떨어지자 황경석, 설국진, 이성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간다!”
긴장이 기쁨으로 돌변해 크게 입 밖으로 토해졌다.
그러나 그 기쁨은 바로 이어진 태수의 싸늘한 목소리에 산산이 깨졌다.
“시간 많아?”
“아닙니다! 가자.”
황경석이 먼저 움직이자 설국진과 이성혁이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우당탕!
“이거 더 챙기고…….”
“아니, 제가 보기엔 이걸 먼저…….”
소란스러운 그들의 모습에 정민수가 결국 한마디 했다.
“아직도 헤매면 어쩌자는 거냐. 됐어. 스톱. 일단 손 떼.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 거 위주로 챙겨, 이 온실 안 화초들아.”
“넵!”
“대답은. 우선…….”
정민수가 의약품 명을 말하자 그들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잽싸게 움직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태수의 눈빛이 약간 그윽해졌다.
홍진만, 안성훈, 김명철. 이석현, 강선호.
그 녀석들이 문득 생각난 탓이다.
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들의 활약이 도드라져 환자들 응급처치가 훨씬 순탄하게 이뤄졌을 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저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현장에 뛰어들겠다고 난리를 쳤을 게 분명했다.
분명 그랬을 거라 확신했다.
문득 그리워진 후배들이지만 다시 마음속 깊이 담았다.
보고싶다.
어쩌면?
불길한 생각을 고개를 흔들며 애써 지웠다.
잠시 후.
물품 텐트 앞에 별동대가 모두 모였다.
예종혁 구조대장 주변엔 20여 명의 소방대원과 구조대원들이 서 있었다.
소방대원들은 방화복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고, 구조대원들은 하얀 헬멧을 착용 중이었다.
다들 자원했단 걸 알고 있었다.
올라가면?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다들 의연하게 이 자리에 섰다.
가슴이 뭉클했다.
이런 사람들이 옆에 있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태수는 행복했다.
앞에 선 예종혁 구조대장이 태수에게 말했다.
“잘 이끌어 주십시오.”
“그건 아닙니다. 별동대 지휘자는 제가 아니라 예 대장님입니다.”
태수는 관계를 명확하게 구분 지었다.
그건 태수 말이 옳았다.
불과 연기를 뚫고 생존자 수색을 하는데 태수의 의료 경험은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예종혁 구조대장이 딱 적격이었다.
태수가 한 번 더 눈짓하자 예종혁 구조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요구조자들 수색이 우선이고 응급환자 처치가 먼저지만, 우리의 안전도 중요합니다.”
“…….”
“통제에 잘 따라 주시고, 각자 일에 최선을 다하면 별 문제없을 거라 확신합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태수를 포함한 모두가 목소리를 높이며 서로를 바라봤다.
오늘 처음 만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모르는 곳으로 함께 향하는 만큼 등을 맡길 전우였다.
모두 똑같은 마음인지 마주치는 눈빛들이 따뜻했다. 믿음이 절로 생겨날 정도로 강인하기까지 했다.
그러고 난 후였다.
예종혁 구조대장이 무전기를 들어 지휘 텐트에 보고했다.
“차관님, 구조대 예종혁입니다. 최태수 포함 별동대 전원, 현장 투입하겠습니다.”
“모두 듣고 있습니까?”
“네, 듣고 있습니다.”
“그럼 볼륨 좀 올려 주세요.”
부탁하는 엄수찬 차관의 목소리가 낮고 무거웠다.
지잉.
예종혁 구조대장이 무전기 볼륨을 올리고 버튼을 눌러 말했다.
“말씀하시면 됩니다.”
“…….”
모두 무전기에 집중했다.
곧 엄수찬 차관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도 이게 옳은 건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원해 준 별동대 여러분들이 먼저 가신다면 이후 구조에 많은 도움이 될 건 확실합니다.
엄수찬 차관의 목소리가 점점 비장해졌다.
그에 전염되듯 다들 눈빛이 강하게 번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