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651
02654 2654화
그때였다.
“혜영아…… 여보!”
군인들이 열어 준 길로 30대 후반의 여자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렇게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보던 태수는 잠시 좌우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본 후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곧 태수는 손을 슬쩍 내밀어 여자가 접근하려는 걸 막으며 양해를 구했다.
“죄송하지만 실례 좀 하겠습니다.”
“팀장님.”
“지금은 잠깐 아빠와 딸의 눈빛 대화 시간이라서요. 그러고 보니 아! 아까…… 뵀던 거 같습니다.”
태수는 양해를 마저 구하다 말고 여자를 알아봤다.
38층에서 봤다.
그녀가 모포를 들고 어디론가 향할 때 잠깐 스쳤었다.
그때를 태수가 기억하는 건 유독 물에 젖었던 모습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축축했다.
“…….”
태수가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아이를 안았던 팔에서 축축함이 느껴졌다.
휙!
태수가 얼른 환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고 내려왔을 땐 정신이 없어 몰랐지만 그래도 물기가 묻어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모녀와 대비해 보면 뭔가 이상했다.
그리고 이들이 처음부터 38층에 있었다면 이렇게 물기가 많을 리가 없었다.
태수가 의문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길이 막힌 여자는 태수에게 조심스러우면서도 다급히 물어 왔다.
“혜영이 아빠 괜찮은 거예요? 도대체 왜 저러고 있는 거예요. 뭐가 문제인데요?”
뭔가 독특한 분위기에 세련미를 풍겼지만 그게 무색할 정도로 안절부절못했다.
태수는 양손으로 가볍게 내리는 행동을 하며 말했다.
“설명드릴 테니까 조금만 진정해 주세요.”
“네, 네. 말씀하세요. 말씀…….”
꽈악.
여자는 가슴에 두 손을 포개 얹고 초조함과 불안함을 애써 억눌렀다.
태수는 그런 그녀에게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부군, 아니 환자분께서는……. 이거 참.”
환자였지만 무조건 호칭을 통일하긴 애매했다. 그렇다고 이름을 아는 것도 아니라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걸 여자가 눈치채고 재빨리 가족을 소개했다.
“남편 이름이 김태형이에요. 딸은 김혜영, 저는 정주은이고요. 그래서 우리 태형 씨가 어떤데요?”
“김태형 씨는 지금 기관지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불을 들이키거나 뜨거운 곳에서 반복적으로 숨을 쉬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고요.”
“네? 하아아.”
털썩.
깜짝 놀란 정주은의 다리가 갑자기 풀리며 주저앉았다. 그 속에 너무 복잡한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태수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조용하지만 서둘러 물었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불이 막 번지는데…… 혜영이 아빠가, 아니 태형 씨가 소화전으로 데려갔어요.”
“38층 소화전이요?”
“아니요. 46층에 있었어요. 그리고 예전에 연애할 때 남편이 소방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었다고 말했었어요.”
“음, 어느 정도 지식이 있으셨네요. 좌우간 그래서 어떻게 하셨죠?”
태수가 차분하게 묻자 정주은은 그때를 떠올리는지 흔들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호스를 빼서 저하고 혜영이한테 물을 흠뻑 쏟고…… 그리고 불을 막았어요.”
“불을 막았다면…….”
“그때…… 그때 그런 거예요. 혜영이하고 저 지켜 주느라고……. 불이 막 밀려오는데 그걸 혼자서 막고 싸우고……. 흐윽!”
그때의 아찔함이 다시 가슴을 저미는지 정주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태수의 시선도 순간 갈 길을 잃었다.
불을 막았다.
그것도 혼자서.
그때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소방대원이 믿기지 않는단 듯이 말해 왔다.
“들고 일어난 불을 아무런 보호 장구도 없이 막아 냈다고? 그게 도대체……”
“그 열기는 어쩌고……. 계속 물을 뒤집어써도 공기는 이미 엄청 달아올랐을 텐데…….”
“그나마 뒤에서 입하고 코를 막고 있으면 괜찮지. 그런데 앞에선 소방 호스 압력을 버티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거라고.”
다른 구조대원들과 구급대원들이 경험을 더해 말해 줬다.
태수의 시선이 어느새 김태형에게 향해 있었다. 처음부터 옷이 타고, 머리카락이 바스러진 모습이 이상하다 싶었다.
그 이유를 알게 되니 이해가 됐다.
모두의 의견대로 터무니없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일지 모른다.
혼자 힘으로 몰아치는 불길을 막아 내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하지만 김태형은 해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소방대원들도 왜 그 일이 가능했는지 이미 알고 있다.
그 증거로 어린 딸인 김혜영은 아빠의 손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고, 아내인 정주은 또한 어느새 다가가 계속 김태형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김태형도 웃고 있다.
이들이 함께 지옥에서 탈출한 이 순간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왜 이제 문제가 됐을까.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이치였다.
식구들의 몫까지 더해진 긴장감과 압박을 이겨 내느라 자신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탈출이 시작되자 긴장이 풀어졌을 거다.
사람의 정신력은 그만큼이나 무섭고 대단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들에게 기쁨이 허락되지 않을 상황이 문제였다. 그 증거로 김태형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태수는 더 지체하지 않고 다가가 말했다.
“이제 모시고 가야 합니다.”
“안 돼요! 아빠! 아앙!”
보다 못한 정주은이 나섰다.
“혜영아.”
“싫어. 안 돼. 아빠랑 같이 있을래!”
김혜영은 더욱 아빠의 손을 꽉 붙들며 헤어지길 거부했다. 그건 치료를 방해하는 게 아니라 공포를 느끼는 거였다.
이대로 떠나가면 아빠를 다시 볼 수 없을 거란 막연한 불안감에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그건 김태형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반사적으로 딸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태수가 봤다.
때마침 정주은가 힘으로 끌어내려던 찰나였다.
스윽.
태수가 손으로 가볍게 막아섰다. 그리고 눈빛으로 정주은에게 양해를 구한 후 천천히 자세를 낮춰 김혜영과 눈을 마주쳤다.
“혜영아.”
“싫어! 아빠랑 안 떨어질래! 아빠랑 같이 있을래!”
“혜영아, 아빠가 많이 아프잖아. 그렇지?”
“으앙!”
김혜영은 대놓고 울며 태수의 말을 듣길 거부했다. 그래도 태수는 개의치 않고 이어서 차분하게 말했다.
“아빠가 지금 나랑 같이 가지 않으면 정말 많이 아파하실 거야. 그래도 좋아?”
“아앙……. 흑! 흑! 그건…….”
“그래. 그건 싫지? 그런데 혜영이는 내가 누군지 알아?”
“…….”
끄덕.
답 대신 고갯짓으로 대신했다.
태수는 그런 김혜영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지금 아빠랑 잠깐 헤어지고, 병원에서 다시 만나는 거야. 약속.”
“진…… 짜요? 흑!”
“당연하지. 선생님은 지키지 않을 약속은 절대로 안 해.”
“……흑.”
“그래. 울지 말고. 그런데 빨리 약속해 줘야 할 거 같은데.”
태수의 미소가 점점 어색하게 변했다.
그 이유는 김태형의 신음소리가 설명해 줬다.
“흐으, 흐으으.”
“아, 아빠!”
김혜영이 다시 격해지려 하자 태수가 먼저 말했다.
“혜영아, 약속. 빨리 해야 아빠가 빨리 안 아파져.”
“야, 약속이요. 약속!”
김혜영은 얼마나 급했는지 태수의 새끼손가락을 아예 붙잡았다.
태수는 김혜영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선생님은 약속 지키러 아빠랑 같이 갈게. 그래도 돼?”
“네. 아빠…… 빨리 안 아프게 해 주….세요.”
“그래. 알았어. 그럼 갈게.”
슥슥.
태수는 김혜영의 등을 쓸어 주고 정주은에게 눈빛을 보냈다. 정주은은 얼른 김혜영을 안아 들어 올렸다.
김태형의 주변이 한산해지자 태수가 구조대원을 힐끔거렸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는 법이다.
그 눈빛을 받은 순간 들것을 든 구조대원들이 얼른 다가왔다.
“이송 시작하겠습니다.”
“전 준비 때문에 먼저 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럼요. 바로 뒤따라가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조 선생, 서포터 부탁해.”
태수의 오더에 조태성은 손을 들어 ‘OK’ 사인을 보냈다.
그걸 본 순간 태수는 뒤돌아 옥상 문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타다닥.
번개같이 달려가던 태수는 자신의 손을 힐끔 내려다봤다. 방금 김혜영의 머리를 쓸었던 손이었다.
울컥했다.
김혜영은 머리카락 한 올도 상하지 않았다.
김태형이 어떤 각오로 불과 맞섰는지 알만 했다.
꽈악.
태수는 주먹을 쥐었다.
그의 헌신이 가족을 건강하게 지켜냈다.
그럼 이젠 자신의 차례다.
환자가 된 그를 건강하게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건 의사가 해야 할 몫이다.
터더덕!
옥상 계단을 부리나케 내려가는 태수의 눈빛이 불보다 더 활활 타올랐다.
“당신은……. 살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건물을 벗어난 태수는 그랜드 타워 광장으로 내달렸다.
그 주변이 뭔가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일일이 확인할 시간은 없다. 수술 준비부터 서둘러야 했기에 태수는 수술차가 줄지어 주차된 곳으로 향했다.
타다닥!
달려가던 태수가 무전기를 조작해 채널을 맞추고 물었다.
“의료팀, 최태수입니다. 응급수술 배정 차량이 어딥니까?”
“목소리 반가워. 7번 수술차야.”
하석준 팀장의 다소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시간을 지나왔을지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태수는 무전으로 짧게 말했다.
“빨리 마무리 짓고 찾아뵙겠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보고, 일단 응급수술이라며. 빨리 들어가.”
“네. 그럼.”
무전기를 내린 태수는 7번 수술차를 발견 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수술차에 올라선 태수는 너덜너덜해진 가운부터 거칠게 벗어던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뒤쪽에 누가 있단 느낌이 들자 급한 마음에 두서없이 부탁했다.
“죄송한데 수술복 라지 사이즈가 어디 있습니까?”
“…….”
스윽.
말없이 비닐에 싸인 수술복이 내밀어졌다.
받아 든 태수는 바로 웃옷부터 갈아입기 시작했다. 뒤에 있는 상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몰랐다.
아니, 관심 없었다.
당장 숨넘어갈 환자가 오고 있는 중인데 성별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웃옷을 벗은 태수의 상체엔 거친 흔적들이 가득했다.
그때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슈미르에서 하고 싶었던 게 의술이 아니라 전쟁이었나 봐.”
“무슨 그런 오해……. 이기준?”
돌아보니 이기준이 수술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땀에 절어 말라비틀어진 수술복이 아닌 뽀송뽀송한 새 수술복 차림이다. 그건 수술이 끝난 게 아니라 수술에 들어가기 전이란 의미였다.
이기준은 알코올을 가득 머금은 솜으로 팔꿈치까지 길고 꼼꼼하게 소독하며 말했다.
“아까 인사했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어시스던트 들어온다고?”
“뭔 소리야?”
“아, 옆 차에서 수술인가?”
태수가 머리를 굴려 묻자 이기준이 어이없단 표정으로 바라봤다.
“내가 집도고 네가 어시야.”
“……환자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
“그건 어시스던트가 알면 되지. 집도의는 설명 들으면서 수술하면 돼.”
“뭔 똥배짱이야?”
태수는 마저 수술복으로 갈아입으며 날카롭게 물었다. 하지만 이기준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손을 소독하며 답했다.
“그 정도 서포터 받을 자격은 충분하다고 봐.”
“쟤가 왜 저래?”
“싸울 시간 충분해?”
“충분하면 자리 깔고 앉아서 본격적으로 싸웠겠지. 아, 몰라. 집도든 어시든 치고 나가는 놈이 임자야. 소독 끝. 들어가자!”
텅.
소독약이 마르지 않은 두 손을 든 태수가 발로 버튼을 눌러 자동 개폐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르는 이기준의 얼굴엔 차가움과 함께 가벼운 미소가 깔렸다.
수술차 깊숙한 곳.
즉, 수술이 이뤄지는 간이 수술실에 들어선 태수는 또 한 번 놀랐다.
마취의에 여성현, 보조 간호사는 정새롬 간호사, 그리고 수술대 좌우엔 송현미 간호사와 김수진 간호사가 서 있었다.
마스크와 헤어캡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못 알아볼 이들이 아니었다. 딱 보면 척하고 알아보는 사이였다.
“다들 어떻게 여기…….”
“뭐라고요?”
송현미 간호사가 흘겨보며 묻자 태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당연한 포지션이라고 생각하는데……. 송 간호사님이 반대편에 계시네요.”
“오늘 옛 남자친구를 만나서 안 떨어지려고요.”
“이 선생하고 은근히 호흡 잘 맞으시긴 하죠.”
태수는 말만 하는 게 아니라 김수진 간호사의 도움으로 수술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