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7
00027 27화
그러나 태수의 생각처럼 상황은 단순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요란한 발걸음소리.
그리고 병실문이 벌컥 열렸다.
모습을 보인 건 수간호사와 간호사 두명.
먼저 입을 연 건 수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죠?”
“……”
말문이 굳게 닫힌 태수와 정민수 눈에 아찔한 절망감이 보였다.
수간호사가 답답하단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고요?”
“조금 이따가 간호사실에 가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수가 겨우 입을 열자 수간호사가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환자 상태는 어때요?”
“지금은 정상입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간호사실에서 기다리죠.”
수간호사 목소리가 싸늘했다. 사실 수간호사도 어느 정도 짐작한 눈치였다. 하긴 병원 시스템상 간호사실에서 환자 상태를 모를리 없었다.
그렇게 수간호사가 돌아갔다.
여기까지 왔다면?
수습하기 어렵단 의미였다.
수간호사는 물론 간호사들도 봤다.
그건 소문이 돈단 의미였다. 아무리 간호사들에게 입단속을 부탁해도 이런 경우는 어려움을 잘 알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태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
결국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한단 뜻이다.
태수 시선이 정민수에게 향했다.
정민수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몸을 덜덜 떨었다.
그도 연성대학 출신이 아닌 타 대학 출신이다. 이번 일이 그의 레지던트 면접에 커다란 걸림돌이 될 건 뻔했다.
평소 하던 말.
자기는 연성대학병원에서 뼈를 묻겠다고 아예 읊고 다닌 녀석이다.
게다가 그간 들었던 이야기만 생각해도 집안 사정도 그리 안 좋았다.
태수도 이런 경우는 실로 난감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규정대로라면 이 일을 있는 그대로 보고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민수는 아주 곤란해진다. 태수의 마음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갈등이 충돌했다.
나와 남.
중요한 건 나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하지만 그건 도리가 아니다.
자신이 힘들까봐 졸린 눈을 부벼뜨고 억지로 일어나 찾아온 동기를 헌신짝처럼 버릴 순 없다.
또한 태수 머리엔 한가지가 더 떠올랐다.
차트.
다른 환자 차트를 가져온 후 자리를 비운 건 자신 실수였다.
정민수 입장에서 눈앞에 보인 차트가 설마 다른 환자 것이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그 말은 태수가 책임을 피해가진 못한 단 의미였다.
결론은 하나였다.
둘이 다 깨지느냐 아니면 혼자 당하고 마느냐.
‘돌겠네.’
고민을 이어가던 태수가 문득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엄밀히 말해 정민수보다 자신이 병실을 비워서 일어난 사고였다. 자신이 정민수 입장이라도 실수하기 안성맞춤인 상황이기도 했다.
‘인생 뭐 있냐?’
의사라는 직업을 택했으면 생명에 대한 책임도 함께였다. 치프가 맡기고 간 건 자신이니 그 책임 또한 자신에게 있었다.
게다가 자신은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다.
기왕 찍힌거라면?
연성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를 한다손치더라도 제대로 의술을 펼칠 기회가 없단 의미였다. 어떤 전문의도 미운 레지던트에게 기회를 줄 리없다.
풍부한 임상경험이 누구보다 필요한 태수의 머리가 정신없이 돌아갔다.
최악이 온다면?
거기까지 생각해야했다.
얼마후 어느정도 정리가 되자 태수가 정민수를 바라봤다.
결정을 내린 태수가 정민수 어깨에 떡하니 손을 얹으며 말했다.
“민수야.”
“어?”
“다른 환자 차트를 가져온 내 실수야.”
“태수야.”
“진짜 진하게 사라.”
태수의 말뜻을 눈치 챈 정민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인마.”
“어차피 한 번 찍힌 몸인데, 두 번 찍힌다고 뭐 달라져?”
“그래도 인마.”
정민수 목소리가 떨렸지만 태수는 외려 태연하게 말했다.
“공연히 공부한다고 다른 환자 차트 가져온 내 실수가 커. 세수하러 가기전에 말해야 했는데 말이야.”
“환자 이름 안 본 내 실수도 크잖아.”
“웃기고 있네. 너나 나나 병원 생활 하루 이틀이냐? 환자 담당은 나였고 책임은 못 피해. 됐어. 넌 아예 모르는 거야.”
“태수야.”
“시끄러우니까 술이나 사라고.”
태수가 살짝 윽박지르자 정민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너 이번에 찍히면 진짜 힘들어져. 인마.”
“그냥 그렇게 해.”
뻔히 그려지는 미래를 태수는 애써 부정했다. 아니,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게 정답이다.
정민수는 그런 태수를 바라보며 계속 고개를 털었다.
“아니야. 이건 진짜 아니라고.”
“빨리 가. 안가면 나 흔들릴지도 몰라.”
태수의 말에 정민수가 움찔했다.
책임을 지자니 그 뒤가 무섭고, 이대로 자신만 빠져나가자니 갈등이 생기는 모양이다.
태수는 아예 결정하기 쉽게 등을 떠밀었다.
“이건 잊고 가서 쉬어.”
태수가 재차 등을 떠밀자 정민수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망설이며 병실을 나갔다.
탁.
아예 병실 문까지 닫아버린 태수가 그대로 문에 등을 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당장 간호사실로 갈 힘조차 없었다.
그래도 태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게 맞아.”
다음날.
이변은 없었다.
회진 직전 박성민 치프가 차트를 확인함으로써 그 사실이 병원 전체로 번졌다.
결국 태수는 약을 잘못 사용한 인턴으로 찍혔다.
물론 후속조치를 훌륭하게 해서 환자에게 후유증을 일으키지 않은 점은 인정됐다.
허나 주변에서 보는 눈빛이 싸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날 오후 호출을 받아 간 이추명 과장의 방에서 나온 태수가 씁쓸한 미소를 띠우며 몸을 움직였다.
각오했던 결과였지만 어이없는 건 미달된 흉부외과에서도 탈락이라니.
기가 막혀 온몸에 맥이 풀렸다.
“무슨 운이 이러냐?”
태수 입에서 절로 넋두리가 나왔다.
그때 저 멀리 서 있던 서강재가 얼른 다가와 태수 눈치를 살폈다. 그도 어젯밤 있었던 일에 대해 소문으로 이미 알고있었다.
“어떻게 됐어?”
“이비인후과 한가해?”
“인턴 마지막이라 크게 터치 안 해. 아니, 그보다 어떻게 됐냐니까”
“하루 동안 푹 쉬다가 나가래.”
태수의 말에 서강재가 안색이 돌변해 급히 물었다.
“그럼 인턴 수료는?”
“인정해 준다던데.”
“그래? 하아. 다행이다.”
서강재가 깊게 숨을 내뿜으며 안도하자 태수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뭘 그렇게 좋아해?”
“인마. 연성대학 병원에서 인턴 수료했다면 다른 대학병원에서도 쌍수 들고 환영해.”
“그건 그렇지.”
“그런데 나쁠 게 뭐야. 하루 남겨두고 인턴 짤리면 하소연 할 데도 없는데.”
서강재 말은 옳았지만 태수 생각은 달랐다.
“오점 남기기 싫었겠지. 어차피 인턴들이 자주 하는 실수 중에 하나고.”
“그거야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너한테 좋은 일이잖아.”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태수가 씁쓸한 미소를 흘리자 서강재가 슬쩍 물었다.
“너, 그 일에 대해서 나한테 말 안한 거 있지?”
“이쯤에서 서로 헤어지는 게 좋지 않을까?”
태수가 얼른 말을 돌리자 서강재 얼굴이 묘하게 흔들렸다.
“왜?”
“지금 나랑 붙어 있어봐야 좋을 거 없어.”
태수의 말에 서강재가 멈칫했다.
병원의 소문은 빛보다 빨랐다.
이미 간호사들을 통해 병원 전역으로 태수의 일이 알려졌다.
그런 상황인데 태수와 친하게 지낸다는 소문까지 돌아버리면 서강재에게 악영향을 끼칠게 분명했다.
태수도 알고 서강재도 알고 있는 일이다.
서강재가 잠시 고민하다 신경질을 냈다.
“에라, 몰라. 그래도 잘려서 낙향할 동기 버렸단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널 위해서야. 그만 가 봐.”
“인마. 태수야.”
“진짜 괜찮다니까.”
태수가 외려 위로하며 등을 떠밀자 서강재가 우물쭈물하면서도 슬슬 몸을 움직였다.
“야, 수료증 받으면 바로 술 마시러 가는 거다!”
“약속 많은데, 대기표 줄까?”
“이 새끼가 지금 농담이 나오나. 됐다. 간다!”
휙!
크게 손을 휘저으며 서강재가 멀어져갔다.
억지 미소를 띠우고는 있지만 서강재 표정도 좋지 않았다.
외려 태수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서강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태수가 흔들던 손을 내리며 돌아섰다.
“여기까지인가?”
허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동안 연성대학병원에서 인턴으로 죽기살기로 일했던 공이 그야말로 물거품처럼 사라진 순간이다.
다음날.
인턴 당직실에 난데없는 정장 차림의 청춘남녀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인턴들.
늘 힘들고 시간에 쫓겨 세수조차 하지못했던 그들.
당연히 평소엔 꼬질꼬질한 얼굴과 피곤에 찌든 군상들이었만 오늘만은 달랐다.
각자 멋들어진 양복을 입고 약간은 상기된 표정들이다.
인턴 수료식을 마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각 의과의 레지던트 면접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태다.
“야야, 나 어떠냐?”
“나는? 이 넥타이, 크. 색깔부터 다르지?”
“그거 나 좀 빌려줘라. 어차피 면접 시간도 다르잖아.”
“이거 전해주러 내과에서 이비인후과까지 달려가라고? 내가 미쳤냐?”
여기저기 치장에 바쁜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모두가 정신없는 사이 인턴 당직실 문이 열렸다.
끼익.
열린 문 사이로 태수의 모습이 보였다. 손에는 인턴 수료증이 그저 둘둘 말려 들린 모습이다.
태수의 등장과 동시에 인턴 당직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모두들 슬쩍 시선을 돌리며 자신의 치장을 이어갈 뿐이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지만 태수는 개의치 않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들 멋진데.”
“하하.”
어색한 웃음소리만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그 후 묘한 침묵이 인턴 당직실을 무겁게 만들었다.
한때 병원동기였던 인턴들은 일부러 태수의 시선을 피했다.
태수와 친한 서강재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안과가 가장 먼저 레지던트 면접을 시작한 터라 거기 간 모양이다.
흉부외과에서 같이 인턴생활을 한 이기준과 정민수는 한 자리에 있었다.
이기준은 아예 태수를 없는 사람 취급했고, 정민수는 한없이 난처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할 뿐이다.
그래도 태수는 별다른 표정 변화없이 묵묵히 서 있었다. 사실 딱히 할 말도 없는 처지기도 했다.
묘한 기류가 이어질 때였다.
슬쩍 손목시계를 확인한 인턴 한 명이 일부러 크게 목소리를 냈다.
“아차차. 시간 다 됐네. 나 먼저 갈게.”
“야, 같이 가.”
두 명의 인턴이 얼른 몸을 움직이자 다른 인턴들도 슬쩍 부산을 떨었다.
“우리도 좀 일찍 갈까?”
“그러자고. 예쁨 받고 좋지 뭐.”
다른 인턴들도 슬금슬금 인턴 당직실을 나섰다.
정민수가 그런 그들에겐 뭐라고 한 마디 하려했지만 태수가 고개를 저으며 앞을 막았다. 이야기해봐야 구차해질 뿐이다.
머뭇거리던 정민수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인턴 당직실을 벗어났다.
인턴들이 썰물과 같이 빠져나간 인턴 당직실에는 태수 혼자 덜렁 남았다.
인턴동기들.
그 동안 살 부비며 지내온 사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정한 모습이다.
그래도 태수는 덤덤했다.
“그래. 그래야지.”
사고뭉치로 낙인찍힌 자신과 얘기해서 득 될 건 없었다. 그걸 알기에 태수는 동기들을 이해했다.
그러는 사이 빈 당직실을 둘러본 태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체취가 많이 묻어있는 장소다.
울고, 웃고, 가슴 아프고, 즐거웠던 그 시간이 모두 담긴 곳이기도 했다.
그 시간을 추억할만한 물건이라고는 손에 들린 수료증 하나뿐이다.
탁.
수료증을 가볍게 손바닥에 부딪친 태수 얼굴이 살짝 변했다.
미련?
없다면 거짓말이다.
사고?
없었다면 짐을 싸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때 만약 다시 그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더라도 정민수 잘못을 덮어줄 것이다.
그건 최소한 밤잠 설쳐가며 자신을 도와주러 온 사람에 대한 예의였다. 그 결과가 이런 참담함으로 나왔지만 후회는 없다.
은혜를 모르고 사는 인생?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 한켠은 찬바람이 휭하니 부는 걸 막기 힘들었다.
“젠장.”
아무리 마음은 옳은 일이라고 해도 현실적으론 씁쓸했다.
그렇다고 이제와 뒤집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걸 알기에 태수는 무거운 몸을 움직여 천천히 짐을 꾸렸다.
말이 짐이지 속옷과 세면도구, 그리고 몇 개의 옷가지가 전부다.
커다란 가방에 쓸 듯이 모두 담아버렸다.
미련까지도 쓸어버린 듯 가방을 어깨에 멘 태수 얼굴이 조금은 편안하게 변했다.
태수는 다시금 빈 인턴 당직실을 둘러봤다.
이 속에 있었던 많은 추억들이 떠오르던 찰나였다.
휙휙!
태수는 머리를 거칠게 털었다.
“가자.”
지체해 봐야 가슴만 쓰리다.
남자라면 가야할 때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는 용기도 필요했다.
태수는 미련을 털어내듯이 더욱 씩씩하게 당직실을 나섰다.
인턴 당직실을 나선 태수가 복도를 거닐 때였다.
“어이, 최. 거기 딱 멈춰.”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멈춘 태수가 고개를 돌려봤다.
박성민 치프가 특유의 짓궂은 표정으로 건들건들 다가왔다.
“치프님.”
“가냐?”
뻔한 질문에 태수는 어깨에 멘 가방을 툭 건드렸다.
“네, 갑니다.”
“어째 홀가분한 그 표정이 내 신경을 콕콕 자극할까?”
“아쉽죠. 아주 가슴이 찢어집니다.”
태수의 씁쓸한 목소리를 들으며 가까이 선 박성민 치프가 시선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