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94
00297 297화
병원장에게 간병인이야 보잘것없는 위치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말투 하나로도 병원장의 인성을 충분히 알게 했다.
김혁권도 내과장을 대할 때와는 조금 달리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 마디 말보다 확실한 건 증거 아닙니까? 한국은 증거 우선 주위라면서요.”
“그렇습니다.”
“그럼 증거를 보여드려야죠.”
김혁권은 그 말을 끝으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곧 봉투들을 꺼내 병원장에게 다가갔다.
탁.
“자, 여기 증거들입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시죠.”
김혁권의 말이 들려왔지만 병원장의 시선은 이미 봉투들로 향해 있었다.
최태수, 정민수, 박성민.
나란히 펼쳐진 봉투들 겉면에 적힌 이름들이다.
봉투에 고정되어 있는 병원장의 시선을 지켜본 김혁권이 이어서 말했다.
“그 노인네가 각자 이름까지 적어서 준 봉투들입니다. 그 속에 돈도 그대로 들어 있고요.”
“그렇군요. 그런데 이 봉투들을 왜 지금까지 보관하고 계셨습니까?”
“왜냐고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김혁권의 짜증 가득한 물음에 산부인과장이 얼른 나섰다.
“병원장님에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당신, 조용히 해. 어디서 이상한 소리 듣고 괜한 사람 오해하는 당신 같은 사람은 얼굴도 보기 싫으니까.”
“뭐라고? 저 사람이 진짜.”
“왜, 이 자리에서 멱살 한 번 잡혀 볼래? 나야 병원 나가면 그만이야. 그런데 당신은 아주 쪽팔리고 좋을 텐데. 안 그래?”
김혁권의 눈빛에 싸늘함이 가득했다.
태수와 정민수에 대한 일로 이미 심기가 극도로 불편한 상태였다.
게다가 이미 오래전에 끝난 일까지 들먹였다는 게 산부인과장을 향한 감정을 더욱 좋지 않게 했다.
솔직히 태수는 속이 시원했다.
허나 이 자리에서 계속 이런 분위기로 이어지면 김혁권이 병원에 계속 있기가 힘들었다.
그걸 알기에 어쩔 수 없이 태수가 나섰다.
“혁권 씨.”
“알았어. 알았다고요.”
김혁권은 태수에게 크게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리고 다시 병원장의 바라보며 질문에 답을 이어갔다.
“환자의 간곡한 부탁에다가 혹시나 수술 부위가 잘못될까봐 받으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받은 봉투랍니다. 그리고 절 줬습니다. 최태수 선생이 그러더군요. 우리는 못 받아도 간병인인 전 받아도 된다고요.”
“…….”
“또 하나, 인도에서 저 사람들만 믿고 온 내가 고마웠답니다. 내 꿈이 인도에 건물 하나 살 돈 모으는 거라니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답니다. 그래서 받았습니다. 염치없는 거 알지만 나도 돈이 궁한 놈이라서 그냥 받았다고요. 이제 됐습니까?”
“그랬군요.”
병원장은 봉투들을 추려서 다시 김혁권에게 돌려줬다.
탁!
김혁권이 빼앗듯이 받아들고 태수에게로 향했다.
그 사이 병원장은 생각했다.
이건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받은 돈 중에 극히 일부라도 사용했다면 문제가 될 소지가 크다.
하지만 한 푼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김혁권의 발언에 힘이 실렸다.
간병인에게 환자가 보너스를 준다.
충분히 가능하고 병원 입장에선 간섭할 이유도 없다.
조용해진 회의실에 속삭이는 소리가 오갔다.
“아예 쓰지 않았으면 문제가 없는 거 아니야?”
“그래도 환자에게 돈을 받은 건 받은 거잖아. 그건 사실이지.”
“환자의 재발을 염려했으니까 일단 받아둔 거지.”
“수술 마친 지 얼마 안 된 환자랑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한데.”
의과장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했다.
그만큼 문제화시키기에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의과장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온도 차이가 극명히 갈린 두 부류가 있었다.
먼저 활활 타오르는 쪽은 하석준 과장과 박완용 과장, 흉부외과장이다.
잠시나마 의심한 자신들이 부끄러웠는지 눈빛이 더욱 단단해졌다.
그런 반면 내과장과 산부인과장의 주변 온도는 급격히 내려간 상태였다.
문제를 만들어야 되는데 오히려 역으로 한 방 먹은 느낌인 탓이다.
의과장들의 수군거림이 가라앉을 무렵이었다.
병원장이 의과장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 일이 저 의사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
모두 입을 열지 못했다.
산부인과장은 그 순간 내과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미 내과장은 시선을 피한 상태였다.
순간 머리가 아찔했다.
고립이다.
이대로라면 오히려 쓸데없는 문제를 만들어냈단 질책이 돌아올지도 몰랐다.
산부인과장이 얼른 입을 열었다.
“병원장님.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소문을 돌게 한 건 잘못입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궁금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만, 산부인과장님은 그 소문을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간호사들이요. 흉부외과 간호사들이 하는 말을 우연히 저희 레지던트가 듣고 저에게까지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빠른 대답에 병원장 시선이 조금은 싸늘해졌다.
“그럼 직접 알아본 건 없다는 이야기시네요.”
“그건…….”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병원장이 몰아치자 산부인과장은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아닙니다.”
“이번 일은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그 전에 사과하십시오.”
“사, 사과요?”
“박성민 선생, 최태수 선생, 정민수 선생, 그리고 김혁권 씨까지.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 때문에 이 자리에 불려온 저들에게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을 생각이셨습니까?”
병원장의 날카로운 질책에 산부인과장은 안면이 절로 꿈틀거렸다.
박성민이나 김혁권에게 사과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문의나 간병인에게는 그저 조금 자존심 상하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태수와 정민수는 달랐다.
과장이 레지던트들에게 사과를 해야 할 상황이다.
이건 자신의 생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워 놓고 사과를 하지 않기도 애매했다.
정말 이젠 얼굴조차 마주하기 싫은 느낌뿐이다.
몇 번이나 울컥하는 속을 억지로 진정 시킨 산부인과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박 선생. 그리고 김혁권 씨…… 다른 두 의사에게도 유감입니다.”
태수와 정민수는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는 걸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병원장이 한마디 하려 할 때 태수가 박성민에게 눈짓했다.
사과 들을 생각도 없으니 빨리 받아주라는 눈빛이다.
알아들은 박성민이 얼른 입을 열었다.
“살다 보면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이해합니다만, 다음에는 먼저 자세히 알아보고 말씀하셨으면 합니다.”
사과를 받는 척하면서도 묘하게 비꼬는 말투다.
박성민도 이미 불쾌함이 가득했기에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그걸 눈치 챈 산부인과장은 회의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강하게 말아 쥐며 쓴소리를 냈다.
“……그렇게 하지요.”
“산부인과장님이 이렇게 먼저 예의 있게 사과해 주시니까 저희도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비꼬는 박성민을 산부인과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박성민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에 없을 정도로 싸늘한 표정만 보일 뿐이었다.
태수를 비롯한 박성민을 알고 있는 모든 의사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저런 모습이.’
평소에는 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하게, 의사로서는 냉정하면서도 진중하게.
그게 박성민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보다 싸늘할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 했다.
산부인과장의 사과가 일단락되자 병원장이 말했다.
김혁권이 함께였기에 반말보다 존대했다.
“그럼 네 분은 바쁜 시간 빼앗아서 미안합니다. 이만 각자 일터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실례하겠습니다.”
박성민이 대표로 인사하자 태수와 정민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끝까지 딱딱하게 서 있는 사람은 김혁권뿐이었다.
인사를 마친 후 네 사람은 차례로 회의실을 나갔다.
회의실 밖으로 나온 태수가 먼저 김혁권에게 사과했다.
“이런 일까지 말려들게 해서 죄송합니다.”
“됐어요.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김혁권은 애매한 말을 한 후 그대로 멀어져 갔다.
평소 모습이라면 태수에게 한마디 했을 법도 했기에 더욱 이상한 느낌이다.
그건 정민수도 마찬가지였는지 두 사람은 멀어져 가는 김혁권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봤다.
그때 박성민이 나지막이 말했다.
“고맙다. 내가 그때 그 돈 욕심냈으면 진짜 아으! 생각도 하기 싫어.”
“선배님이 자진해서 주신 건데요.”
“뭘 자진해서 줘. 민수가 아주 잡아먹을 듯이 째려 봤었는데.”
박성민의 말에 정민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전혀 그런 적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똑같은 새끼들. 좌우간 니들 때문에 의사 목숨 한 번 건졌다. 이건 내가 언제 크게 보답할 테니까 꼭 기억해 줘.”
“저희 기억력이 아주 죽입니다. 절대 안 잊어버릴 테니까 걱정 말고 외래 보러 가세요.”
“새끼. 일단 간다. 나중에 또 이야기해.”
툭툭.
박성민은 홀가분한 손길로 태수와 정민수를 다독이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둘이 남은 태수와 정민수가 서로를 바라보며 쓴 미소를 지었다.
“이거 참 애매하다.”
“그러게. 뒤집자니 뭔가 찝찝하고, 이대로 그냥 있는 것도 참 뭐하고 말이야. 이럴 때는 뭘 어떻게 해야 해?”
“뭘 어째. 일이나 하러 가야지. 그러고 보니까 오늘 김명철 선생 수술에 어시스던트 들어가라고 하지 않았어?”
태수의 물음에 정민수가 어깨를 들썩였다.
“지금 스톱이지.”
“얼른 가서 진행해. 환자 너무 기다리게 하면 안 좋아.”
“그거야 물론이고. 먼저 간다.”
정민수도 시간을 끌 수 없는 상황이라 얼른 몸을 움직였다.
혼자 남은 태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차라리 돈 봉투를 받아둘 걸 그랬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와 달리 표정은 조금씩 통쾌해져 갔다.
회의실 안에서 곤혹을 치를 산부인과장을 생각하니 절로 떠오르는 웃음이었다.
***
태수의 예상은 벗어나지 않았다.
방금 전의 일로 산부인과장은 다른 의과장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다.
전문의와 레지던트의 문제라면 힘을 실어줄 생각이지만 이건 경우가 달랐다.
아무리 태수와 정민수가 예쁘게 보이지 않더라도 이건 문제가 달랐다.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지도 않고 몰아친 건 같은 의사로서도 상당히 불쾌한 일이었다.
다른 의과장이 등을 돌리자 하석준 과장과 박완용 과장, 그리고 간접적으로 연관이 된 흉부외과장이 몰아쳐왔다.
특히나 박성민을 걸고넘어졌다는 데 흉부외과장이 더욱 감정이 좋지 않았다.
“산부인과장님의 경솔함으로 과장들 위신이 오히려 떨어졌습니다. 이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건 아니죠. 이게 과장의 위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럼 확실한 증거도 증인도 없이 그저 떠도는 소문만으로 그렇게 몰아친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까?”
“그 출처가 흉부외과 간호사라니까요.”
산부인과장이 변명을 하자 흉부외과장은 더욱 강하게 받아쳤다.
“그 간호사는 제가 찾겠습니다. 소문으로 듣지 않고 직접 제 눈으로 보고, 제 입으로 물어서 말입니다. 됐습니까?”
“그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습니까. 조희성 선생이 사표를 낸 건 왜 이대로 넘어가려는 겁니까?”
“먼저 발언하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실 건 아니죠. 그리고 조희성 선생이 사표를 낸 게 꼭 정민수 선생 탓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흉부외과장의 말에 산부인과장이 발끈했다.
“그건 이 문제와 별개 아닙니까?”
“정말 별개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뒷돈 받은 문제를 걸고넘어져서 더 난처하게 하려는 거 아니었습니까?”
“…….”
“참 실망스럽습니다.”
흉부외과장의 쓴소리에 산부인과장은 더 변명도 하지 못했다.
어설프게 벌인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크게 돌아왔다.
산부인과장이 불쾌해 하는 사이 하석준 과장과 박완용 과장은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