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97
00300 300화
두 사람의 배려가 훌륭하게 통했다.
잔뜩 긴장한 얼굴이던 임산부의 표정이 약간이나마 환해졌다.
사실 아무리 간이 크다해도 수술에 들어가면 떨리기 마련이다.
더욱이 뱃속에 소중한 아기가 있는 임산부라면 특히 불안감이 커지기 마련이다.
작은 배려.
그건 임산부에게 소중한 위안이 됐다.
아주 약간에 불과하지만 환자의 심리적인 안정을 이뤘다.
그것만으로도 소기의 성과는 달성했다.
더구나 이번 수술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다만 임산부란 조건이 걸릴 뿐 수술 자체는 레지던트 정도라면 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정민수는 태수보다 산부인과 수술에 경험이 많다.
그래서 이런 대화가 얼마나 임산부의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도 알고 있다.
정민수의 생각대로 임산부 바이탈은 안정적이다.
태수도 힐끔 모니터들을 확인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멋진 녀석.’
친구이기 전에 언제나 든든한 동료다.
태수는 미소를 지으며 처치 라인들을 움직였다.
복강경 수술로 진행되는 충수염 수술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대략 30분 내외.
하지만 태수는 20분이 조금 지날 때 즈음 부풀어 오른 충수를 꺼내고 봉합에 들어갔다.
정민수가 제대로 충수를 찾아 보조해 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빠르고도 정확한 손길이다.
부동심을 가지고 임한 수술답게 아무런 변수없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봉합까지 마무리한 후 태수는 임산부에게 다가갔다.
불안에 떨고 있는 임산부를 푸근한 미소로 바라보며 태수가 부드럽게 말했다.
“수술 끝났습니다.”
“벌써요?”
“그리 어려운 수술이 아니었습니다. 태아에겐 전혀 영향이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3일 정도 후면 퇴원하실 수 있을 겁니다. 퇴원 전에 산부인과에서 한 번 더 검사 받아보시고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임산부는 그제야 불안감을 털어버리고 밝아졌다.
태수는 마지막으로 임산부에게 한마디 했다.
“제 소견으론 아무런 후유증 없어보입니다. 이제 몸조리만 잘하시면 머잖아 아기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실 겁니다.”
물론 답을 기다리진 않았다.
기다린다면 공치사를 받을 뿐이다.
가뿐한 마음으로 수술실을 나선 태수에게 정민수가 농담을 던졌다.
“이번 기회에 산부인과 어때?”
“무슨 소리야?”
“임산부 다루는 솜씨가 아주 달인의 경지를 이뤘어.”
“자식.”
태수가 빙그레 웃었다.
수술이란 쉽고 어렵고를 떠나서 매번 긴장된다.
그 후의 상실감을 살짝 풀어주는 정민수의 배려를 알기에 마음이 포근했다.
비록 병원내에선 알력으로 힘든 나날이지만 이 맛에 의사 노릇한단 기분이 들었다.
수술성공후 짜릿한 만족감은 다른 곳에선 찾기 힘든 뿌듯함을 선사했다.
다음 날 아침.
아침 회진이 끝난 태수와 정민수가 마주봤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던 태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야지.”
“그럼요.”
두 사람은 간밤에 입원한 임산부를 다시 한 번 살펴보려 몸을 움직였다.
얼마 전 아침 회진 때 인사를 나눴지만 아무래도 임산부라 신경이 쓰인 탓이다.
밤새 당직을 선 정민수와 김아름이 수시로 체온이나 혈압을 체크했다.
아무래도 같은 여자라 더더욱 신경이 쓰인 눈치다.
그래도 정민수가 한 번 더 확인하고 싶다고 해서 태수도 따라나선 길이었다.
두 사람은 곧 병실 앞에 도착해 막 병실 문을 열려는 찰나였다.
드르륵.
먼저 병실 문이 열리더니 의사 두 명이 모습을 보였다.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다.
산부인과 전문의 김도균과 산부인과 치프 박인국 두 사람이었다.
김도균은 상냥한 인상과 부드러운 저음으로 여자 환자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의사였다.
흠칫.
김도균이 태수를 보곤 몸이 굳었다.
박인국 치프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얼굴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두 사람 모두 태수와 정민수를 보자 부드러웠던 눈매가 대번에 날카롭게 변했다.
산부인과와 외과.
요즘 들어 서로 감정이 좋을 리 없다.
김도균이 그 날카로운 눈빛 그대로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태수와 정민수를 직시하며 등 뒤로 병실 문을 닫았다.
탁.
병실 문이 닫히고야 김도균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얼굴 보기 싫은 두 사람을 이렇게 마주하게 되다니, 오늘은 참 일진이 사나울 거 같네.”
“…….”
“기왕 이렇게 된 거 잠깐 얘기 좀 할까?”
“혹시 태아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태수가 반문하자 김도균이 한쪽 입꼬리를 진하게 들어 올렸다.
“있었다면 따로 이야기할 이유도 없겠지.”
“…….”
“그보다 병실 앞에서 떠드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자리부터 옮기지.”
툭.
김도균은 의도적으로 태수와 정민수의 어깨를 부딪치곤 이내 멀어져 갔다.
감정이 잔뜩 실린 제스처임은 금방 알아챌만 했다.
어느새 박인국이 떡하니 병실 앞에 서서 태수와 정민수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순간 태수는 불쾌함을 느꼈다.
한마디 하려는 찰나 정민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나 보자.”
“가봐야 별로 고운 말이 안 나올 거 같은데.”
“나도 그렇기는 한데, 지금 반발하면 꼴이 더 우스워질 거 같아서.”
“하긴.”
태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가볍게 대화를 마친 태수와 정민수는 김도균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 걸어갔다.
그제야 박인국도 뒤를 따라왔다.
한데 박인국의 눈빛이 미묘하게 떨려왔다.
“하.”
그도 아직 피가 뜨거운 레지던트 4년차다.
이게 정말 잘하는 행동인지에 대한 망설임이다.
그도 눈과 귀가 있기에 이번 사태를 이성적으로 봤다.
물론 정민수와 태수에게 약간의 문제가 있다하나 결국 환자를 위한 일이다.
아직 젊고 패기로 뭉쳐진 박인국 치프 입장에선 정말 마주치기 싫은 장면이다.
“늦게 태어난 게 죄지.”
박인국 치프가 아주 작게 중얼거릴 뿐이다.
하지만 전문의가 지시한 일이니 일단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거기엔 자신을 아껴주던 산부인과장의 사직도 한몫했다.
박인국 치프 입장에서는 이성과 감정이 살짝 부딪친 순간이다.
이내 네 사람이 도착한 곳은 간호사실 앞이었다.
다들 일과 시간이라 멀리 가진 못했다.
마주 선 김도균은 눈을 살짝 올려 뜨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살다 살다 전문의를 이리 개무시하는 레지던트는 처음이야.”
“…….”
“어제 응급실에서도 한건 하셨다며? 대단해.”
“…….”
김도균이 초장부터 신경 건드리게 신랄하게 비꽜지만 태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당장 뭐라고 해봐야 피차 감정만 상할 뿐이란 걸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도균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 좀 시원한가?”
“무슨 말씀이신지요.”
“조희성 선생님에 이어서 과장님까지 밀어내니까 이제 마음이 좀 편안해지냐고.”
대놓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김도균의 모습에 태수가 얼른 한마디 했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아, 물론 아니겠지. 그렇다면 정말 인간 쓰레기일 테니까 말이야.”
“말씀이 심하십니다.”
태수가 욱하는 심정에 한마디 했으나 김도균은 개의치 않고 이번엔 정민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정민수 선생은 그렇게 잘났나?”
“…….”
“왜 대답이 없지? 나 정도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정민수의 대답을 들은 김도균은 싸늘한 눈빛으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런데 말이야. 위아래도 몰라보는 그런 인성으로 환자를 계속 진료하는 게 옳을까?”
“무슨 뜻입니까?”
“스스로 병원을 나가라고. 너 따위 레지던트 때문에 병원 분위기가 개판 됐으니까, 그건 책임져야지.”
김도균의 말도 안 되는 비난에 정민수의 표정도 서서히 굳어져 갔다.
옆에서 듣고 있던 태수의 얼굴은 그보다 더했다.
이런 식의 대화.
이런 대우.
특히나 정민수를 얕잡아 보는 시선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예 그를 표적으로 잡았는지 태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정민수만 비난했다.
태수는 김도균 입장에서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이미 병원 경영층에서 밀어준단 소문을 들은 후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나마 건드리기 편한 정민수에게 타깃이 돌아갔다.
그 점이 태수를 더욱 울화통 터지게 했다.
꽈악.
태수가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차라리 자신을 욕했다면 묵묵히 견뎠을 일이다.
하나 이건 아니다.
참고 싶지도 않기에 그 화를 풀어내야 속이 풀릴 거 같았다.
‘이젠 끝내자.’
태수의 눈빛이 번뜩였다.
뒤를 이어 강하게 쥔 주먹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 뒤 김도균의 턱을 바라봤다.
딱 한 대만.
한 방 날리고 깔끔하게 나가자.
결심과 동시에 태수의 주먹이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스윽.
태수의 주먹을 부드럽게 감싸 쥔 손길이 느껴졌다.
멈칫한 태수가 옆을 바라봤다.
거기엔 정민수가 눈으로 말했다.
‘참아.’
순간 태수는 맥이 빠져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슬쩍 풀었다.
김도균도 눈치는 있다.
“지금 뭐하잔 거야?”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김도균이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시선을 보낼 무렵이다.
“무슨 일입니까?”
굵직한 목소리가 등뒤에서 느닷없이 들렸다.
다들 엉겁결에 시선을 돌려보니 김혁권이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김혁권은 가까이 오자마자 김도균에게 물었다.
“왜 다른 의국에 와서 시끄럽게 하십니까?”
“뭐라고?”
김도균 말투가 거칠어졌다.
그러나 상대를 잘못 만났다.
“뭐라고라니? 이 사람이 왜이리 혀가 짧아?”
“아니 이 사람이.”
“이 사람이. 나이도 어린 사람이 주둥이 하곤.”
“당신 뭐야?”
김도균이 화가 치밀어 올라 달려들 듯이 말하자 김혁권이 가소롭단 듯 웃었다.
“왜 옥상에서 한판 붙어보려고?”
“…….”
김혁권 말에 김도균이 찔끔했다.
첫눈에 봐도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다.
힘으로 한다면?
결과는 너무도 뻔했다.
그도 김혁권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안다.
병원장 앞에서도 할 말 다하는 인간이다.
하물며 일개 전문의에 불과한 자신에게는……
수틀리면 주먹이 날아올지도 모른단 불안감이 엄습했다.
김혁권은 태수와 전혀 다르단 걸 뒤늦게 깨달았다.
김도균이 침묵하는 사이 김혁권이 날카롭게 쏘았다.
“이야기 들어봤는데 그렇게 아니꼽거나 억울하면 병원장에게 가서 말해. 왜 여기서 설쳐.”
거친 말에 입술을 살짝 깨물던 김도균이 겨우 시선을 돌렸다.
“좌우간 두고보자고. 외과 이 자식들.”
끝까지 욕 비슷한 말투를 퍼부어대던 김도균이 독기 어린 시선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뒤를 따라가던 박인국 산부인과 치프의 얼굴이 참담하게 보인 건 착각이었을까.
김혁권은 그들이 멀리 사라지는 걸 확인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잘못 온건가요?”
“아뇨.”
“그럼 바빠서.”
김혁권이 총총히 발걸음을 재촉해 사라졌다.
너무도 갑작스런 등장에 이은 퇴장에 태수와 정민수가 어리벙벙할 뿐이다.
정말 고마웠다.
왜 김혁권이 나섰는지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았다.
혹시 모를 태수의 폭발을 김혁권이 막은 셈이다.
어쩌면 태수 성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행동이기도 했다.
“괜찮은 사람이야. 성격이 가끔 삐딱해서 그렇지.”
정민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태수가 그제야 정민수에게 한마디 했다.
“왜 말렸어?”
“멱살 잡는 것보다 면상 후려치는 건 더 일이 커.”
“눈치챘어?”
“내가 바보냐?”
“빌어먹을.”
태수가 온몸을 부르르 떨자 정민수가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너 오늘 오프잖아.”
“그래서.”
“기분 좋게 가.”
정민수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였다.
그걸 본 태수는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민수가 왜 자신을 말렸는지 안다. 알기에 더더욱 미안했다.
“민수야.”
“왜?”
“너 사고 칠 때 못 말렸는데.”
“내가 행동이 조금 빨라. 어서 할 일이나 마무리 짓고 이 지긋지긋한 동성이란 병원에서 잠시라도 해방되라.”
“고맙다.”
태수가 진심으로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