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
00003 3화
이른 오후에 잠이 든 태수는 다음날 오전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태수가 처음으로 느낀 건 창가로 비추는 햇살이다.
“회진!”
훌렁!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난 태수가 손부터 뻗었다.
뭔가 허전했다.
매일 가운을 놔두는 자리가 정해져있기에 언제나 손을 뻗으면 잡혔다.
그런데 가운이 전혀 잡히지 않자 몇 번이나 더듬거리며 헛손질을 했다.
그제야 약간 정신이 들었다.
병원이 아니라는 걸 다시 떠올리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이 지나간 후에야 태수가 정신을 차렸다.
“아, 오프지.”
급작스러운 환경 변화가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절레절레 털며 나른한 몸을 달랬다. 많이 잤지만 아직 더 침대에 눕고싶엇다.
고달픈 인턴생활.
겪어보지않은 사람은 절대 모른다.
“휴.”
태수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결혼한 누나의 집에 도착해 죽은 듯이 잠들었다는 것까지 모두 기억났다.
자신은 잠에서 깨자마자 회진준비부터 신경 썼다. 너무도 오랜만에 받는 오프라 병원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이어진 탓이다.
순간 태수는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anxiety disorder야?”
불안장애를 지칭하는 의학용어다. 이비인후과 실습 전에 정신과에서 실습할 때 얻어들은 지식들의 일부다.
털썩.
태수는 다시 침대에 걸터앉아 잠깐 그대로 멍하니 있었다.
인턴에게는 눈을 뜨고 있는 그 시간 자체가 전쟁이다. 이렇게 잠깐의 여유라도 즐기고 있는 자체로도 편안함을 느꼈다.
병원에서 절실하게 필요했던 딱 1분간의 여유였다.
그 시간을 즐기고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사람의 욕심이 이렇게 소소해 질 수도 있나?
문득 든 생각에 어이가 없어진 태수의 한쪽 입꼬리가 진하게 올라갔다.
헌데 여유도 잠깐이었다.
스멀스멀 불안감이 떠올랐다.
24시간이 부족하도록 뛰어다닌 지난날의 일과가 이미 뇌에 각인된 모양이다.
잠깐의 편안함 뒤에 찾아오는 불안감이 그 증거다. 한번 깨어난 정신은 다시 잠을 청하는 건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멀쩡했다.
이대로 멍하니 있다는 게 스스로를 더욱 옥죄이는 느낌이다.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바로 일어난 태수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던 누나가 태수를 보고 얼른 다가와 걱정부터 내비췄다.
“너 괜찮니?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나 얼마나 잤어?”
“15시간.”
“좀 피곤했나 보네.”
태수가 피식거렸지만 누나는 더욱 안색을 살폈다.
“진짜 괜찮아? 병원 가봐야 되는 거 아니야?”
“의사가 걱정 없데.”
태수가 스스로를 가리키며 넉살을 부리자 누나가 피식거렸다.
“너 아직 돌팔이 아니야?”
“그래도 의사잖아.”
“그래. 앞으로 멋진 의사가 될 내 동생이 하는 말인데 오죽하겠어? 그보다 진짜 괜찮은 거지?”
“괜찮다니까. 너무 잤더니 배고프다.”
태수가 슬쩍 말을 돌리자 누나도 푸근한 미소로 답했다.
“기다려. 곧 밥 해줄게.”
“땡큐.”
태수는 누나를 향해 똑같이 푸근한 미소를 내보였다.
식사를 마친 태수는 모처럼 산행을 가기위해 집을 나섰다.
누나가 틈만 나면 다가와 필요한 게 없는지 물어온 탓이다.
“마지막으로 하길 잘 했지.”
1년이란 인턴 기간 중 마지막 3개월을 흉부외과에서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2개월이 지난 지금이다.
혼도 많이 나고 잔소리도 많이 들었다.
성인 권고 수면시간인 8시간?
턱도 없었다.
흉부외과는 24시간이 전쟁터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평소에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다.
그런 덕분인지 흉부외과에서 실습한 2개월 동안 태수 몸무게도 9킬로그램 가까이 빠진 상태였다.
적정체중보다 왜소해진 덕분에 더더욱 체력을 키워야 했다.
흉부외과에서 버티기 위해서다.
남들은 가끔 묻는다.
그렇게 뛰어다니면 체력이 좋아지지 않냐고.
말짱 개소리였다.
오히려 약해질 뿐이다.
그건 운동과 노동의 차이였다.
또한 산행에는 좋은 점이 하나 더 있다. 불규칙한 생활로 엉망이 된 바이오리듬을 진정시키기에 최적의 운동이다.
한가로운 주변 풍경에 시선을 두며 걸어가니 어느덧 삼천사 매표소를 통과했다.
북한산으로 향하는 본격적인 산행에 접어드는 시기기도 했다.
“날씨 죽인다!”
오랜만에 얻는 오프에 산행을 택한 태수지만 가슴을 폈다.
친구와의 유대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레지던트과정을 수료한 후에야 다시 친구들을 돌아봐도 늦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 전화로 연락을 하기에 친구들도 이해했다.
때문에 태수는 힘차게 산으로 올랐다.
그렇게 시작된 산행이 어느덧 두 시간을 넘었다.
“훅. 훅.”
차오른 숨이 폐를 더욱 자극했다. 스펀지 같은 구조로 이뤄진 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숨이 가빠오는 현상이다.
인턴의 뇌구조는 잡학다식의 집합체였다.
실습을 하는 기간 동안 여러 과를 전전한다.
내과, 외과, 정신과 등.
그때마다 얻은 경험에 책으로 쌓은 지식까지 더해졌다.
이론상으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인체 구조가 훤하게 그려져야 했다.
그렇지만 사람이다.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답게 돌아서면 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저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더욱 파고들고, 경험을 통해 습득한 지식만이 남은 상태다.
앞으로 과를 정해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해당 의술에 대한 내용만 파고든다. 인턴 때 익혔던 지식은 어느새 사라져 버릴 휴지조각과 같을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태수는 널찍한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은 상태였다.
표지판을 보니 부왕사라는 절까지 약 1킬로미터 남겨둔 장소다. 북한산 줄기라도 등산객이 많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주변은 한산했다.
멀찌감치 뒤에는 아파트 5층 높이의 절벽이 산바람을 막아주고 있고, 10명 정도가 넉넉하게 쉴 수 있는 공간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오가지 않았다.
북한산 백운대로 향하는 코스 중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곳이다.
“여긴 여전히 한가하네.”
오프 때까지 사람 구경하고 싶지 않은 태수였기에 몇 번의 산행을 경험으로 찾아낸 등산코스기도 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태수는 등에 멘 가방을 풀었다.
입구 매점에서 구매한 스포츠음료와 요깃거리, 그리고 구급상자뿐이 없었다. 빨간색 십자가가 새겨진 구급상자에 시선이 간 태수가 쓴 미소를 지었다.
“이건 또 언제 챙겼어?”
이것도 직업병일까?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구급상자를 뒤로한 태수는 스포츠음료와 요깃거리 몇개 꺼내들었다. 두 시간 정도 산행했으니 허기도 달래고 에너지도 보충해야 했다.
마시고, 먹고.
계속 반복하는 사이였다.
“으으으…….”
어디선가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음료수를 입으로 가져가던 태수의 몸이 흠칫 굳었다.
산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올 이유가 없다.
바람일까?
애써 부정하면서도 슬쩍 귀를 기울여 봤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괜한 환청이리라.
그렇게 판단하니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인공위성 쏘고 나노 단위의 의료기기가 개발되는 상황인데 괜한 생각으로 긴장할 이유가 없다.
조금 더 마음의 여유를 찾을 무렵이었다.
“끄륵……. 으윽.”
또 한 번 환청이 들렸다.
아니, 이번에 들은 건 환청이 아니다.
입에서 피가 토해져 나올 때 들리는 거북한 소리다.
오프 받기 직전 수술실로 급히 이송했던 환자에게서 들었던 소리와 같았다.
벌떡!
반사적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난 태수가 좌우를 둘러봤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당혹감은 저 멀리 날아간 상태였고 그 빈자리를 채운 건 긴장감이다.
태수는 쫑긋 귀를 세우며 다시 그 신음소리를 감지하려 했다.
10초나 지났을까?
“끄으으.”
또다시 기다리던 신음소리가 들렸다.
좌측?
소리의 파장을 역추적한 태수가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30미터 정도 뒤에 존재하는 5층 높이의 절벽뿐이었다.
하지만 태수의 몸은 이미 그쪽으로 뛰어가는 중이다.
사박사박!
잘 마른 낙엽들이 태수의 거친 발길에 짓이겨지는 소리로 가득했다.
아직 선선하다고 생각되는 초봄이기에 파릇파릇한 새싹이 없어 시야 확보는 나쁘지 않았다.
조금 더 뛰어가던 태수가 깜짝 놀라 절로 발을 멈췄다.
노란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화려한 등산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등산복을 입은 사람은 누워 있는 모습이다.
절벽에서 떨어졌다?
가장 확실한 추측이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너무 없었다. 더 자세한 상태파악은 접근해야 알 수 있었다.
태수는 반사적으로 빠르게 그에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