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021
03025 3025화
그때 반대편에서 정민수의 사나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연성.”
그 욕이 너무도 시기적절했다.
남에게 떠미는 걸 싫어하는 태수도 이번엔 아니었다.
연성대학병원에서 낭비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는 병들을 이렇게나 키워 버렸다.
“지랄하네.”
욕이 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욕해서 해결될 상황이면 얼마나 좋을까?
진심 어린 바람이다.
하지만 현 상황은 욕을 한다고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시간만 허비하는 꼴이었다.
다들 알고 있어 절대 환부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어떤 상황에서도 응급처치를 우선시하는 건 좋은 일이다.
문제는 태수 본인이었다.
지금만큼은 태수도 막막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엡시디 차관은 이미 심정지가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간당간당한 상황이 유지되고 있었다.
모두의 노력과 화합이 이뤄 낸 작은 기적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태수의 굳어진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길어야 5분?’
그게 한계로 보였다.
이런 소모적인 응급처치가 언제까지 계속될 순 없었다.
그 안에 타개책을 마련하거나, 아니면…….
“…….”
태수는 순간 떠오른 생각을 빠르게 지웠다.
어떤 경우에도 먼저 생각하면 안 될 단어였다.
그 단어를 지우면?
남는 건 정반대되는 단어밖에 없었다.
-삶.
그걸 위해 이 난리 중이다.
그럼 그 단어를 안정적으로 말할 상황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어떻게?
“어떻게든.”
태수가 스산한 목소리로 자그맣게 읊조렸다.
그런데 그 말을 중얼거린 순간 수술실에 정적이 흘렀다.
끼워 맞추기도 힘든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그래서 태수의 목소리가 수술대에 둘러선 모두에게 전달됐다.
“…….”
“…….”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미미하게 움찔거렸다.
태수는 수술실에서 이따금 ‘어떻게든’이란 표현을 쓴다. 그건 어떻게 해도 답이 보이지 않을 때였다.
그 말을 그렇게까지 결연하게 할 만큼 환자 상태가 안 좋단 의미였다.
그리고 반드시 이 순간을 벗어나겠단 각오이기도 했다.
다들 이미 굳힌 마음을 한 번씩 다잡았다.
그 이유를 김혁권이 슬쩍 말했다.
“당연히 끝장 봐야지. 물론 좋은 의미로 끝장입니다.”
혹시 오해할까 김혁권이 먼저 부연 설명을 했다. 그건 천하의 김혁권이 말조심이란 걸 한단 의미였다.
태수의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 있단 뜻이기도 했다.
태수는 개의치 않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김혁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몰랐다.
오히려 홍진만과 황경석을 따갑게 나무랐다.
“홍, 황, 정신 챙겨!”
뜬금없는 질책이었다.
하지만 억지가 아니란 건 당사자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전에 없을 태수의 각오에 잠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건 인정하나, 눈과 손은 계속 환부에 고정되어 있었다.
억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건 위치가 살짝 틀어져 있어서였다.
아주 작은 차이다.
각도기로 재 봐도 5도 안팎이나 될까 싶다. 그런데 그 안일한 생각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단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둘 다 얼른 미미하게 틀어진 수술 도구들을 바로 잡았다.
그것도 경험치 순서인지 홍진만이 약간 더 빨랐다.
“……잘 잡았습니다.”
“끙, 됐습니다.”
콰륵콰륵.
황경석이 디버로 환부를 더 벌리고, 썩션으로 세세하게 흡입하며 덧붙여 말했다.
그렇게 정돈되자 태수가 다시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슥, 슥.
자주색 빛깔이 감돌고 있는 간을 피해야 했고, 계속 밀려나오는 출혈도 헤쳐 나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빨간 어둠을 밀어내며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그러길 1분 정도 지난 후였다.
턱.
환부 깊숙이 들어간 믹스터 끝이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태수는 신중하게 몇 번 눌러 봤다. 그 느낌은 딱딱하지 않은 대신 부드럽고 약간의 반탄력이 전달됐다.
‘혹시?’
씰룩.
눈썹을 순간 크게 들썩인 태수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드레인을 믹스터를 따라 밀어 넣었다.
드레인 끝에는 굵은 바늘이 달려 있었다.
스르륵.
그 바늘 끝이 믹스터를 스쳐 지나가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그러고 난 후였다.
투명한 드레인 안에 피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닥으로 향해 있는 반대쪽으로 이동하더니 한 방울씩 떨어졌다.
뚝. 뚝.
그 피의 색은 확실히 붉고 진한 빛이 많이 감돌았다.
황경석이 흡입 중인 검붉은 피와 확연히 달랐다.
드레인 바늘이 오른쪽 폐 속으로 정확히 파고들어갔단 의미였다.
그걸 확인함과 동시였다.
휙!
태수의 시선이 ECG로 향했다.
현재 산소 포화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눈으로 확인하는 것보다 서영우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어…… 20…… 25…… 점점 올라오고……. 정정. 30 안쪽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어.”
분명 좋은 소식이다.
그런데 전달하는 서영우는 썩 기쁜 목소리가 아니었다.
안정적인 산소 포화도 수치는 90 이상이다. 30이란 수치는 모자라단 표현도 아까울 정도로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태수의 표정엔 실망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게 끝이 아니다.
정민수가 남았다.
“…….”
스윽.
다시 고개를 돌려 정민수와 유병태, 김명철을 바라봤다. 다들 말도 없을 정도로 집중한 상태로 응급처치 중이다.
태수는 절대 재촉하지 않았다.
얼마 안 남았다.
곧 좋은 소식을 전해 줄 터였다.
그렇게 정민수를 향한 두 눈에 신뢰만이 가득했다.
한편, 홍진만과 황경석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흠…….”
“오…….”
뜻 모를 탄성도 흘리듯 내뱉었다.
배출되는 출혈과 흡입하는 출혈이 다르단 걸 직접 눈에 담고 있었다. 그래서 태수가 뭘 했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드레인의 바늘이 파고 들어간 건 그냥 폐가 아니다.
결핵으로 만들어진 폐 공동이었다. 새빨간 동맥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으니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폐 공동의 위치가 어딘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이런 응급처치가 가능했다.
폐는 지금도 흉부 속에 꽁꽁 숨어 있었다.
그렇다면 CT 검사 화면이 태수 머릿속에 그대로 각인되어 있단 의미였다.
태수라서 가능하다?
‘웃기지 말고.’
홍진만이 스스로 생각을 부정했다.
이건 태수라서 가능한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같은 검사 결과가 앞에 놓였을 때, 무엇을 더 중점적으로 기억에 담아 두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또 관심과 집중력의 차이였다.
자신과 동기들도 허투루 검사 결과를 살피지 않았다.
그건 맹세할 수 있었다.
그런데 태수는 깊이가 달랐다.
이 순간 절절하게 실감한 홍진만은 문득 쓴 미소를 지었다.
이젠 기억 속에서만 미소를 볼 수 있는 송민규의 말이 아련하게 떠오른 탓이었다.
-왜 수많은 명의 놔두고 최태수만 보냐고? 세상 제일 무심하지만, 반대로 제일 섬세한 사람이니까……. 하하, 이해가 안 돼? 그래서 넌 멀었어, 자식아.
사고 나기 얼마 전에 들은 말이었다.
결국, 호기심을 풀지 못했다.
하지만 세상을 전전하며 깨달았다.
송민규의 말이 옳았다.
평소 태수는 까칠한 동네 형과 같았다. 그가 건네는 짓궂은 농담과 장난에 토라진 적도 많았다.
그런데 환자에 관해선 절대 빈틈이 없었다.
그걸 의미한 말이었다.
‘진짜 멀었네.’
그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이만큼 성장했는데도 태수의 등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좋았다.
이 막막한 순간 그 등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을 생각하면?
눈에 불이 번쩍였다.
그렇게 홍진만이 잠깐 상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옆에 선 황경석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그러다가 또 불벼락 떨어져요.”
그 걱정 어린 경고가 홍진만을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그리고 드레인을 고정하는 봉합사가 삐뚤빼뚤한 걸 알아챘다.
“흡……. 이런.”
“진짜 오늘 왜 그러세요?”
“등이 넓어서.”
엉뚱한 홍진만의 대꾸에 황경석이 눈을 끔뻑거렸다.
“네?”
“아니야. 아직 멀었어. 빨리 마무리하자.”
슥슥.
홍진만은 말을 돌리며 드레인과 살을 안정적으로 꿰어 갔다.
같은 시각.
태수는 그런 홍진만을 곁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황경석이 먼저 말한 터라 태수는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 순간 다른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황당했다.
그렇다고 그 시간이 오래 지난 건 결코 아니었다.
단 몇 초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쪽 응급처치를 마무리하는 중이라서 그나마 이해하는 중이었다.
그때 반대편에서 정민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왼쪽 폐 드레인 연결!”
“출혈 확인했습니다!”
유병태가 덧붙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 보고의 대상인 서영우가 ECG로 등을 돌린 채 한 손을 어깨까지 들어 올렸다.
주먹 쥔 동작은 잠시 기다리란 의미였다.
그런데 그 손짓에 곧 변화가 일어났다.
스스슥.
그 주먹에 서서히 힘이 빠져 공간이 만들어졌다.
어떤 의미인지 서영우가 목소리를 내 빠르게 알려 줬다.
“SO2 40…… 50…… 아니, 45……. 그 정도에서 업다운 되고 있어.”
100의 공기가 들어가도 폐가 받아들이는 건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수치였다.
그것도 인공호흡기를 착용한 상태에서 그 정도였다.
환자의 입에 인공호흡기가 덧씌워져 있는 건 당연히 간호사들의 작품이었다.
태수와 백성현 병원장이 주사기로 혈액을 뽑아낼 때, 간호사들은 환자 입속과 주변을 정리하고 인공호흡기를 씌워 호흡을 밀어 넣어 줬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태수가 물었다.
“호흡 배출량을 늘리면요?”
“처음부터 최고치였어.”
“미친…….”
지금 심정이 절로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 이유를 반대편에서 정민수가 빠르게 말했다.
“양쪽 폐를 갈라서 지혈해야 하고, 횡격막 마비를 풀려면 뇌수막염도 건드려야 하고……. 젠장, 간뿐만 아니라 비장도 끄트머리가 올라왔어.”
“비장도?”
“어. 그것도 엄청 타이트하게. 횡격막 틈으로 비집고 올라오는 거 같아.”
“거기다 간하고 장이 찢어진 채로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난 상황이고…….”
태수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정말 딱 그 심정이었다.
좀 더 풀어서 말하면, 흉부와 복부를 동시에 열어 다발적으로 응급처치를 해야 한다.
그것도 가장 빠른 속도로 신속하게 막힘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 전에 인공심폐기 연결도 해야 한다.
그런 복합적인 응급처치?
제임스와 스미스가 있어도 가능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순 없는 법이다.
그러기엔 시간이 없다.
더 이상 망설이면 환자는 죽는다.
그 하나의 명제가 태수의 머릿속에 가득찼다.
우선적으로 뭔가 체계적인 움직임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태수가 현 상황을 명확하게 다시 짚어 봐야 했다.
무엇보다 침착해야했다.
더불어 빠른 수술이 시급했다.
이율배반적이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빠르게 평정심을 찾은 태수가 우선 정민수에게 말했다.
“민수, 밀려 올라온 간하고 비장을 밀어 넣어 봐.”
“꽉 끼었다니까!”
“누가 혼자 밀어 넣으래?”
태수가 매섭게 다그치자 정민수가 투덜거렸다.
“젠장, 알았다고…….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가자. 우선 홍진만하고 황경석은…….”
막상 오더를 시작하니 정민수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시야도 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