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057
03061 3061화
태수는 완강하게 입장을 밝힌 후 망부석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백성현 병원장이 말없이 바라만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선이 아무리 부담스러워도 절대 마음 약해지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시간이 지나갔다.
조용한 집무실 속에서 두 사람은 여전히 대치 중이었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띠리릭.
“백성현입니다……. 음, 그래.”
너무 간단하게 통화를 마친 백성현 병원장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태수에게 물었다.
“안 일어나나?”
“입장 정리해 주셔야죠.”
“일어나서 나가야 뭐가 될 거 아닌가.”
“진짜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앙케이트 하란 말씀이십니까?”
태수가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본 백성현 병원장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과장단 회의 준비됐으니까 가자고.”
“……아, 과장단 회의.”
“설마 진짜 병원을 돌아다니라고 할까. 가끔 참 이상한 생각을 한단 말이지.”
백성현 병원장은 태수를 한껏 놀리고는 느긋하게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태수는 뚱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은근히 즐기신다니까.”
몇 번 당했는데도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항상 진지한 대화 끝에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반전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런 반전이 자연스럽게 오간다는 건 집중된 여론에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단 증거였다.
2시간 후.
과장단 회의를 끝낸 태수가 병원 현관에 자리했다.
기자들은 긴 기다림에도 큰 불만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태수는 그 이유를 대번에 눈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도시락은 기본이고 빵, 우유, 과자, 과일까지.
병원 앞마당이 먹자판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작정하고 먹였으니 다들 인자해진 게 분명했다.
파악을 마친 태수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저희 희망병원의 입장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짜 기다리다가 배 터지는 줄…… 아니, 숨넘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나름 분위기 잡고 따지려는지 시작이 살벌했다. 그런데 스스로 꼬여 버린 말을 정정하느라 차가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다른 기자들이 째려보며 눈치를 줄 정도였다.
태수는 더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복사용지에 적어 온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저희 희망병원은 닥터 조나단의 의견과 같음을 우선 말씀드립니다.”
“…….”
기자들이 조용했다.
지금 태수의 말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범위였다.
태수도 알기에 바로 다음 내용으로 넘어갔다.
“어제 진상조사위원회의 1차 발표 중 희망병원과 관련한 모든 내용들이 심각하게 와전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내용입니까?”
“그 와전된 내용 중에 첫 번째는…….”
태수는 하나하나 꼬집어 반박했다.
그중에서 가장 강조한 부분은 당연히 EMR 내용 누락에 관한 건이었다.
“……그렇게 중요 내용이 누락된 EMR을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해당 자료들과 비교, 분석한 결과는 이메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럼 진짜 처음엔 EMR이 부분만 왔단 겁니까?”
“제 백 마디 말보다 기자님이 한 번 눈으로 확인하시는 게 더 확실할 겁니다. 다음으로…….”
태수는 길어질 대화는 유연하게 넘기고 반박을 계속 이어 갔다.
기자들은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예상은 했는데…….”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이추명 부원장은 제대로 알아본 게 맞는 거야?”
“눈 가리고 아웅도 아니고…….”
기자들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빈정거렸다.
그건 곧 태수의 발언을 신뢰하고 있단 의미와 같았다.
기자들, 특히 오랫동안 태수를 봐 온 기자들은 그 신뢰도가 높았다.
그건 태수와 직간접적인 인연으로 끼워 맞춘 신뢰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일관되게 살아 온 태수의 발자취가 증거였고, 자신들이 그걸 취재하고 또 함께 기쁨과 슬픔을 느꼈기에 믿을 수 있었다.
반대로 연성대학병원의 의사와는 그렇게 공유한 기억이 없다시피 했다.
때 되면 불러서 사진 찍자고 하고, 연구 성과 발표하는 용도로 기자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던 탓이다.
물론 뒤로 몰래 들어오는 물질적인 건 연성대학병원 쪽이 월등히 많았다.
하지만 사람 됨됨이는 물질로 평가되지 않는다.
진정성은 태수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것만큼은 모든 기자들이 똑같이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기자들은 역시 빨랐다.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각.
태수가 희망병원의 입장을 발표하고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기사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었다.
-희망병원, 드디어 입을 열다.
-최태수 팀장, 직접 현안에 대해 낱낱이 밝혀.
-누락된 EMR. 진상조사위원회의는 정말 모를까?
-무엇을 위한 진상조사인가.
제목만 들어도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그 내용도 태수의 발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약간씩 차이가 있는 건 서로 그간 알아본 내용들이 다른 모양이었다.
그렇게 연성대학병원에 향한 비난의 수위는 높아져갔다.
하지만 그건 일면에 불과했다.
반대되는 여론도 비등하게 자라나 있었다.
-희망병원, 한국 의료계의 정통성을 위협.
-희망병원에서 공표한 EMR과 미 국무부의 EMR 내용이 달라.
-유명세를 앞세운 최태수와 희망병원.
태수가 입장표명하길 기다렸단 듯이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내용을 뜯어보면 태수의 발언 모두 미국 의료진들 공동성명을 카피해 구미에 맞게 바꿨다고 쓰여 있었다.
그러면서 미국 의료진들에 대한 공격적 발언은 하나도 없었다.
누구의 생각인지 희망병원과 연성대학병원이 서로 헐뜯는 느낌으로 기사가 전개됐다.
태수는 그 내용을 병원이 아닌 집 앞마당 야외테이블에 앉아 휴대폰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부터 내일, 모래까지 오프였다.
이 갑작스러운 오프는 과장단 회의 결정사항이었다. 태수와 함께 노력한 모두에게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편안하게 기사를 내용까지 쭉 살필 수 있었다.
“음, 음.”
중간중간 태수의 입에서 씁쓸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생각의 자유와 너무도 동떨어진 기사들이다. 그저 조회수 상승을 위해 자극적인 내용들로 꽉 채워 넣고 있었다.
진실과 거짓에 대한 고찰조차 없었다.
“참, 기자들 중에서도 한결 같은 분들이 계시다니까.”
항상 그랬다.
모든 의견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표현의 다양성은 태수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사실 관계조차 파악하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머리 굴려 작성한 기사는 볼 때 마다 어이가 없었다.
이런 억지 기사들은 태수에게 어떤 정신적인 충격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기사를 접한 사람들은 혼란만 가중되고 있었다.
어지러운 댓글들이 증거였다.
중심이 전혀 없었다.
댓글끼리 날을 바짝 새우며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데 바빴다. 나름 일리 있는 분석도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핵심에 접근하기에 그들이 가진 정보는 너무도 적었다.
태수는 그 댓글들도 웬만하면 살펴봤다.
이건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희망병원에 대한 믿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태수는 이렇게 모리터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계속 기사를 살피며 보던 중이었다.
하도 같은 기사만 보니 이제 눈이 뻐근해 왔다.
게다가 목이 말라왔다.
태수는 테이블에 놓아둔 아이스커피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달그락.
얼음 소리가 들렸는데 입으로 들어오는 건 맹맹한 물 몇 방울이 전부였다.
그제야 휴대폰에서 시선을 뗀 태수가 얼음만 든 잔을 확인했다.
“없네.”
쓴 미소를 지은 태수가 크게 둘러봤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조카들은 오늘 아침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요즘 계속 함께 있어서 그런지 그 빈자리가 조금 크게 느껴졌다.
턱.
태수는 휴대폰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더 확인해봐야 신경만 쓰일 터였다. 그 시간에 좀 더 쉬고, 휴식을 즐기는 게 스스로에게 도움이 될 터였다.
그리고 이번 오프가 끝나면 제자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더 이상 여기에 신경 쓰며 다른 환자에게 소홀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시선을 멀리 두고 사색에 잠겨 있을 때였다.
띠링.
휴대폰 문자 소리에 태수가 바로 메시지를 바로 확인했다. 그 순간 굳었던 태수의 일자 입술이 서서히 부드럽게 변해갔다.
-지금 집에 도착했어요. 식사 꼭꼭 챙겨 드시고요, 학생회 일만 끝나면 바로 갈 거니까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마시고요. 삼촌, 알랍알랍.
주미성의 애교 가득한 문자였다.
이렇게까지 애교 많은 성격이 아니기에 윤사라가 옆에서 함께 했음이 눈에 훤히 그려졌다.
그 예쁘고 씩씩한 얼굴들이 떠오르자 더욱 미소가 짙어졌다.
스윽.
태수는 아예 휴대폰을 내리고 등받이에 등을 깊게 기댔다.
“훗, 녀석들.”
학교에선 선배 소리를 곧잘 들을 나이들이었다. 그런데 태수에게 하는 언행은 고등학교 시절에 멈춰 있었다.
지금 보내온 문자만 봐도 태수의 느낌이 옳았다.
태수는 천천히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한가했다.
잊고 살았던 여유라서 그런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이 순간에도 세상은 바쁘게 돌아간다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오프라 몸이 적응을 못하는지 근질근질 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엡시디 차관의 회복이 순탄하고, 별도로 지정받은 환자가 없어서 그런지 마음은 편안했다.
그런 한가한 시간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 팀장님, 나와 있었네?”
친근하고 얇은 소리에 태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김은영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갑작스런 등장에 태수는 약간 놀랐다.
“뭐야, 병원에 있는 거 아니었어?”
“오늘 오프.”
“그런데 어떻게 알고 왔어?”
“그게…….”
다가온 김은영이 말하려할 때였다.
한 박자 빠르게 이선정 간호사 목소리가 더 뒤쪽에서 들려왔다.
“제가 데려왔어요. 아니, 오프라면서 방에서 혼자 궁상떨고 있다지 뭐예요.”
가까이 다가선 김은영에게 가려졌는지 이선정 간호사의 모습이 이제야 보였다.
해맑은 얼굴로 손까지 흔드는 그녀를 보며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어머, 언제는 연락하고 찾아왔나요?”
“음. 기억에 없는 거 같네요.”
“호호호. 저도 그냥 오는 게 습관이 됐나봐요……. 자, 김 선생님 앉아요. 어후. 날씨가 계속 덥네요.”
이선정 간호사는 제집처럼 김은영을 이끌었다.
태수에게도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냥 왔다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잠깐 사이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중 이선정 간호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애들이 전화 왔었어요. 집에 돌아간다고요. 삼촌 혼자 있으니까 좀 챙기라던데요?”
“제가 그런 소리 들어야 할 정도입니까?”
“애들 걱정인데 뭘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래요.”
이선정 간호사가 뚱하니 바라보자 태수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일단 그 부분은 대충 넘어가고요. 그래서 제 저녁식사 때문에 오신 겁니까?”
“그건 아니고요.”
“그럼요?”
태수의 깊은 의구심을 내보이기 직전 이선정 간호사가 바로 대답했다.
“여기 이웃사촌이 집에서 뒹굴뒹굴한단 안타까운 소식 듣고, 콧바람 쐬자고 같이 나온 거예요.”
“여기서요?”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물어요? 차로 한 바퀴 돌다가 생각나서 온 건데 너무 각박한 거 아니에요?”
이선정 간호사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태수는 벌집을 건드렸단 걸 그제야 깨닫고 얼른 정정해 말했다.
“두 분 조합이 하도 신선해서 여쭌 겁니다.”“뭐가 신선해요. 우리끼리 영화도 가끔 보고 쇼핑도 하고 그러는데요.”
“처음 듣는 소리네요……. 그보다 이렇게 만나는 건 오랜만이네?”
태수는 더 큰 불똥이 날아올까 슬쩍 시선을 돌려 김은영에게 물었다. 김은영도 가볍게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게. 병원에서 가끔 만나도 바빠서 인사하고 바로 헤어졌는데.”
“그랬지. 그래서 잘 살았어?”
태수가 질문한 순간 이선정 간호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잘 살았어’가 뭐예요?”
“안부 묻는 질문이요.”
“와…….”
이선정 간호사는 황당한 탄성을 내뱉었다.
그런데 김은영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