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126
03130 3130화
밖에서 고생할 다른 기자들이란 전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태수도 마찬가지였다.
의사들 사정이라면 조금 신경이 쓰였겠지만 기자들 사정이라 무심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다만, 기자들을 막아선 이곳 주민들에겐 고마움과 미안함이 진하게 들었다.
그 생각에 태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른 팀원들도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표정들이 묘해졌다.
“나가야 되나?”
“그게 아무래도 모두에게 좋겠죠?”
“호텔로 가면 거긴 좀 괜찮지 않을까요?”
상황이 이렇지만 이대로 헤어질 수 없단 의지가 곳곳에서 풍겨 왔다.
그렇게 의논이 깊어질 무렵이었다.
뚜벅뚜벅.
나무 바닥을 디디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다.
고개를 들어보니 펍의 주인이었다.
음식을 직접 조리한다더니 그 풍족한 맛이 그의 넉넉한 풍채에서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가 가까워지자 다들 대화를 멈추고 바라봤다.
다가선 펍 주인이 먼저 말했다.
“%#%#$%#”
알아듣지 못할 그리스어라 이소클라스가 통역해 줬다.
“경찰을 불렀다네요. 곧 올 거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십니다.”
“괜히 찾아와서 복잡하게 만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태수는 카테리아나와 대화할 때처럼 편하게 말했다.
이소클라스도 한 번 해 봐서 그런지 더 유연하게 통역해 줬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또 가게를 찾아와 줘서 감사하다고 하네요. 음식이 입에 맞는지도 궁금해하고요.”
그 질문엔 태수가 아닌 의료진들이 앞을 다퉈 나섰다.
“굿굿, 베리베리 쌍 굿!”
“콩글리쉬를 어떻게 알아들어요……. 모든 음식이 아주 맛있습니다.”
박성민을 면박 준 김혁권이 정중한 어투로 답했다.
그 외에 다른 의료진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맛있어요!”
“그리스 음식 최고.”
“크레타 섬에 가 보고 싶을 정도예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엄지를 내밀며 환한 얼굴로 답했다.
이소클라스가 그 말을 그대로 통역했다.
그때 펍 주인이 빙긋 웃으며 품에 안고 온 와인 한 병을 내밀며 뭐라고 말했다.
“@%@#$%@”
이소클라스는 바로 모두에게 영어로 말해 줬다.
“이 와인은 서비스라고, 가볍게 맛 좀 보시라고 가져왔답니다.”
“무슨 서비스를 다…….”
“그럼 사인이라도 해 달라고 하시는데요? 벽에다가 크게 붙여 놓고 자랑 좀 하겠다고요.”
이소클라스가 전한 순간이었다.
태수는 모두를 둘러보며 물었다.
“어쩌실래요?”
“우리야 콜.”
“사인 한 번에 공짜 와인이면 무조건 해야지.”
“이소클라스, 사진은 필요 없냐고 물어보세요.”
와인이란 선물의 위력이었다.
아무리 술을 줄이고 있다고 해도 한 잔 더 마실 순 있었다.
그 정도로 외과 계열은 의사와 간호사, 할 거 없이 술고래들이었다.
펍 주인은 당연히 승낙했다.
그리고 바로 사인과 사진 촬영이 릴레이로 이어졌다.
그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겸사겸사 손님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이 자리를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줬으니 그 정도는 얼마든지 서비스할 수 있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손발이 좀 고생하면 된다.
다들 여러 나라를 전전한 경력이 있어 보디랭귀지엔 달인들이었다.
유일하게 닥터 보스만은 조금 버벅거렸지만 다들 알게 모르게 도와줘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고마움을 조금이나마 갚은 후 다들 제자리로 돌아왔다.
박성민이 한결 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후, 속이 좀 개운하다. 계속 뭔가 찝찝한 느낌이었단 말이지. 하지만 이젠 아니란 걸 청량한 내 속이 신호를 주고 있지.”
“맞습니다.”
끄덕.
다들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의 짐이 한결 덜어져 표정들도 밝았다.
그때 박성민이 펍 주인이 선물한 와인을 떡하니 집어 들었다.
“그럼 이제, 따라란, 따라란, 슬슬 맛을 볼……. 그런데 이거 먼지가 좀 있는데요?”
“공짜 술에 뭔 먼지 타령입니까.”
“뎃츠 그레이트. 바로 그거죠. 먼지는 닦으면 된단 말씀.”
“빨리 따 봐요.”
“기다려 봐요. 하여간 성격은 나보다 급해…….”
박성민은 쌜쭉한 얼굴로 와인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뽕!
맑은 소리와 함께 은은한 향이 테이블 전역으로 퍼져 갔다.
조금 전까지 마셨던 와인과 그 깊이부터 달랐다.
다들 신기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야, 이거 냄새 죽이는데?”
“시음부터 살짝 해 볼까요?”
“시음이 끝이겠는데요?”
“아무튼 얼른 합시다.”
다들 한 목소리를 냈다.
의료 외에 이렇게까지 일치단결한 건 처음이지 않을까 싶었다.
쪼르륵.
인원이 많으니 한 사람 앞에 반 잔 정도밖에 돌아가지 않았다.
향도 좋겠다, 입가심하기 딱 좋은 정도?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쭉 들이켰다.
그와 동시였다.
“음? 음!”
탁.
와인잔을 내려놓은 모두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해 있었다.
“이, 이거 뭐야?”
“왜 이렇게 맛있어?”
“과일 향이 진짜 입안에 가득한 거 같아요!”
다들 칭찬하기 바빴다.
태수 또한 같은 입장이었다.
“와, 이거 뭐지? 이거…… 진짜 좋은데?”
말뿐만이 아니라 빈 와인 잔을 다시 기울여 남은 한 방울까지 입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그 정도로 여태 먹어 본 와인과 차이가 상당했다.
모두 같은 호기심을 품은 순간이다.
“제가 얼른 찾아볼게요!”
인터넷과 가장 친한 노지연 간호사가 얼른 나섰다.
토도독!
와인 병에 두 눈을 고정한 채 양손으로 액정을 두드리는 타이핑 속도가 어마무시했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뚝 멈추더니 고개를 들었다.
“저, 저기…….”
“왜 그래?”
“저거요, 그러니까 저 와인이요…….”
노지연 간호사가 시간을 끌자 답답했는지 이선정 간호사가 보챘다.
“그냥 쭉 말하면 안 될까?”
“산토리니에서만 만드는 스페셜 와인이래요. 포도도 특별한 거라서 1년에 몇 병 만들지 못한다고 하는데요?”
“……뭐?”
“거기다가 지금 저 와인 생산 연도를 기준으로 가격을 책정하면…….”
노지연 간호사는 슬쩍 뒷말을 작게 숨겼다.
그래도 테이블을 둘러싼 모두에겐 들릴 소리였다.
그 추정 가격을 듣는 순간 다들 크게 놀랐다.
“이, 이게……. 헙!”
“서비스라며. 무슨 서비스가…….”
“어쩐지 마, 맛이 좋긴 좋더라.”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이럴 때가 아니었다.
벌떡!
태수는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이소클라스를 찾았다.
“이소클라스, 저랑 같이 좀!”
“아, 네.”
그도 재빨리 일어났다.
같이 맛을 본 입장이라 태수의 말뜻을 바로 알아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둘러 주방 앞에 도착했다.
나무 벽에 가로막혔지만 접시를 주고받는 널찍한 구멍이 있었다.
“!@#$!#$%.”
이소클라스가 그 속에 대고 뭐라 외쳤다.
그러자 곧 펍 주인이 손의 물기를 닦으며 나타났다.
둘 사이에 몇 마디가 높다란 목소리로 오갔다.
이소클라스는 답답한 얼굴로 태수에게 대화를 전해 줬다.
“내가 주고 싶어서 준 건데 왜 호들갑이냐고 뭐라고 하는데요?”
“이게 그럴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저도 지금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 분 고집이 엄청납니다.”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그때 태수가 진지하게 생각한 후 말했다.
“최대한 같은 와인을, 아니라면 비슷한 와인을 구해 오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잠시만요.”
이소클라스의 시선이 바로 주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또 몇 번 언성 높은 소리가 오갔다.
태수는 주인에게 집중했다. 그도 태수를 향해 단호하고 강렬한 눈빛을 보내며 뭐라고 말했다.
굳이 통역을 듣지 않아도 입장이 바뀌지 않았음을 알아챘다.
이럴 땐 성미 급한 태수가 뭐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스윽.
이소클라스가 손을 뻗어 태수 앞을 가리고 말했다.
“와인은 그리스인들에게 그저 술이 아닌, 신화부터 전해져 오는 역사 깊은 문화라고 하네요.”
“그건 저도 알죠.”
“그래서 정성 들여 빚은 와인은 주인이 따로 있다고 믿는답니다.”
“…….”
“자신은 보관만 했고, 그간 밀린 보관료 받고 주인에게 돌려준 거라네요.”
이소클라스도 깊이 있는 말이라 조심스럽게 전했다.
태수의 시선은 이미 펍 주인에게 향해 있었다.
그 또한 태수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는 풍채 좋고 마음 넉넉한 펍 주인이었다.
값비싼 와인을 선물한 데 대해 어떤 아쉬움과 미련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선을 마주한 사이 펍 주인의 입이 열렸다.
그의 말은 이소클라스가 바로 전해 줬다.
“그리고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에겐 여러 별칭이 있답니다.”
“그쪽은 잘 몰라서요.”
“네. 아무튼 그중에서 폴리고노스, 리아에수스란 별칭이 닥터 최와 다른 의료진들에게 꼭 어울릴 거 같다고 하네요.”
“그 뜻이…… 뭡니까?”
“폴리고노스는 ‘거듭 태어난 자.’, 그리고 리아에수스는 ‘근심을 덜어 주는 자.’입니다.”
이소클라스가 묵직하게 뜻을 풀어 줬다.
거듭 태어난 자.
근심을 덜어 주는 자.
곱씹을수록 왜 그 별칭을 말해 줬는지 알 거 같았다.
태수는 이름도 모르는 그 펍 주인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도 열심히 째고, 꿰매면서 많은 분들 근심을 덜어 드리겠습니다.”
“알겠다고 고맙다고 하셨고, 언제든 술 마시고 싶으면 오라고 하시네요.”
펍 주인이 가볍게 미소 지어 보였다.
태수는 같이 웃으며 싱거운 말을 건넸다.
“비행기 값 본전 뽑으려면 엄청 마셔야 하는데요.”
“그건 곤란하다고, 앞의 말은 취소하고 그냥 지나는 길에 생각나면 들르라고 하시네요.”
방긋.
펍 주인이 우스갯소리로 받아 줬단 걸 이소클라스가 대신 전해 줬다.
그런 그를 향해 태수가 슬쩍 손을 내밀었다.
그걸 본 펍 주인은 두툼한 손으로 힘차게 붙들었다.
꽈악!
두 사람은 맞잡은 손만큼이나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 순간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서로의 체온이 이렇게 뜨겁단 걸 느끼고 있으면 족했다.
그 속에서 태수는 또 한 번 결심했다.
초심이 정답이다.
인턴 때 마음으로, 또 카슈미르 전역을 활보했던 열정으로 환자를 대하면 못할 건 아무 것도 없다.
그저 가볍게 한 잔 마시며 식사하러 온 자리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장소와 상대에게서 소중한 걸 또 한 번 일깨웠다.
이건 의료가 아닌 인생이다.
자신의 삶에 열정을 가지고 살아온 장인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태수의 가슴에 더 깊이 담겨졌다.
태수는 더 이상 와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자리로 돌아와 펍 주인의 말을 모두에게 전했다.
“……그런 뜻이랍니다.”
디오니소스의 별칭에 대한 풀이를 끝으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
테이블 주변은 고요했다.
“…….”
“…….”
의료진들뿐 아니라 사이먼 기자도 그 말을 곱씹고 있었다.
태수도 마찬가지였다.
디오니소스가 누군지 정확하게 모른다.
다른 별칭은 관심도 없었다.
펍 주인이 그 별칭들만 말해 준 이유를 알기에 그걸로 족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닥터 이작손이 말했다.
“참 뜻 깊은 말씀을 해 주셨어.”
“네.”
“각자 생각이 많은 거 같은데, 슬슬 일어날까? 우리에겐 오늘만 시간이 있는 게 아니니까.”
그의 말대로 내일 또 만날 수 있었다.
지금 기분으로 처음과 같이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 같았다.
다 같은 마음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일을 약속하며 호텔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