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141
03145 3145화
누나는 살짝 흘겨봤지만 더 뭐라고 하지 않고 답부터 말했다.
“응. 열심히 달리고 있어.”
“아직도?”
“오랜만에 눈치 안 보고 마신다고 좋아하던데.”
“하긴. 어머님들도 바쁘시니까.”
“민수 어머니네 접시 다 깨질지도 몰라. 호호.”
누나는 현실이 될 수 있는 상상이라 그런지 가볍게 웃음 지었다.
어머니들의 수다 파티.
얼마나 대단할까?
태수는 절로 어색한 미소가 감돌았다.
다행히 김은영은 이선정 간호사의 집으로 간다고 했다.
실력 좋은 간호사가 곁에 있어 더 이상 생각은 하지 않았다.
거실에 잠깐 침묵이 찾아왔다.
태수는 그 고요함에도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누나랑 함께 있는데 고요함이 어색하다는 게 더 이상했다.
그렇게 소화에 집중할 때였다.
스윽.
누나의 손이 다가와 태수 손등을 부드럽게 덮었다.
의아한 태수가 고개 돌려 바라봤다.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던 누나가 잔잔한 목소리로 물었다.
“태수야, 예전에 르완다에서 전화로 나한테 했던 약속 기억해?”
“갑자기 왜?”
“기억하냐고.”
누나의 목소리가 살짝 내려갔다.
눈빛도 약간 날카로워졌다.
그저 콧김만으로도 태수를 긴장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태수는 그렇게 변한 누나의 분위기를 직감하고 재빨리 대답했다.
“물론 기억하지. 최고가 되겠다고 했어.”
“넌 꼭 내가 꼭 인상 써야 순순히 답하더라?”
“살기 위해서.”
태수가 나지막이 읊조린 순간이었다.
꽈악.
부드럽게 손등을 덮은 누나의 손이 바로 꼬집기로 돌변했다.
찌릿한 아픔에 태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찌푸려졌다.
“크윽!”
그러거나 말거나 누나는 조용히 따졌다.
“나 귀 밝은 거 몰라?”
“으으…… 누, 누나…… 진짜 아파. 아프다고.”
“내가 진짜 너하고만 있으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거 같아.”
“그, 그런 걸로 합시다……. 윽! 아니야. 누나 말이 맞아. 완전 맞아.”
태수는 더 큰 아픔이 찾아오자 얼른 백기를 들었다.
그제야 누나가 손을 놓으며 말했다.
“한 번만 더 까불어 봐.”
“……조용히 경청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누나의 굳은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틈만 나면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 모습은 평생 제자리걸음일 것 같았다.
태수는 아픈 손등을 가볍게 비비며 원래 주제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약속이 왜?”
“됐어.”
“그럼 시작을 말든가, 아니면 꼬집지를 말든가.”
태수가 불만을 토로한 순간 누나가 다시 날카롭게 흘겨봤다.
“뭐라고?”
“너무 뜬금없이 물어본 건 누나였어.”
“그래서 대답했잖아.”
“뭘?”
“됐다고.”
누나가 퉁명한 목소리로 재차 같은 말을 했다.
심드렁하게 듣던 태수는 뭔가 이상한 느낌에 누나를 슬쩍 바라봤다.
“됐…… 다고?”
“그래. 이제 됐다고. 그 약속 지켰으니까 됐다고.”
“아직 최고 아닌데? 갈 길 먼데?”
태수가 의아한 얼굴로 갸웃거렸다.
그때 누나의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야. 내 눈엔 최고야.”
“……어떤 면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알아주잖아. 그리고 가족들도 같이.”
“…….”
“아빠가 아까 차 타기 전에 아저씨들이랑 나눈 얘기를 좀 들었어.”
누나가 여운을 남기자 태수가 슬쩍 물었다.
“뭐라고 하셨는데?”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데 어떻게 태수 같은 의사가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흠.”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건 자랑스럽지 않다고 하셨어. 귀찮은 거지, 좋은 게 아니라고 말이야.”
“아버지도 참.”
태수는 아버지의 딱딱한 화법을 알기에 쓴 미소를 지었다.
그때 누나가 이어서 말했다.
“정말 자랑스러운 건 이렇게 가족들까지 함께 격 없이 만날 수 있는 오늘 같은 순간이래.”
“…….”
“아저씨들도 다 그렇다고 하셨어. 애들 빼놓고 가끔 모여서 식사도 하고 그러자고 하시더라.”
“흠.”
“그런 아빠도, 또 엄마도 너무 행복해 보였어.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그렇고.”
누나의 말에 태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즐거우셨다면 더 바랄 게 없지.”
“그거면 약속 지킨 거 아니야?”
“…….”
“아니. 약속 지킨 거야.”
누나는 다시 입을 열어 스스로 답을 말했다.
그때 태수가 잠깐 생각한 후 물었다.
“이러다가 또 어딘가로 날아가야 한다면?”
“걱정 안 해.”
“왜?”
“다 같이 갈 거니까.”
그 말을 한 누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런 누나의 눈빛엔 어떤 걱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팀원들이 아닌, 또 다른 형제자매와 같단 믿음이 확고했다.
태수도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게 가족에게 인정받는 거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 일로 확실히 신뢰받고 있단 걸 알았다.
잠시 후.
누나와 대화를 마친 태수는 방으로 들어왔다.
꿀렁.
침대에 누운 태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누나, 고마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어서 한 번 더 작게 읊조렸다.
“그럼 이제 딱 한 걸음 남았네.”
싱긋.
진하게 미소 지은 태수는 천천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태수와 팀원들은 출근길에 올랐다.
첫 일과는 어제 김성국 기자와 약속한 대로 공식 인터뷰로 시작했다.
그리스와 핀란드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들이 주된 질문이었다.
전체 인터뷰에 이어 개별적인 인터뷰도 진행됐다.
그 인터뷰 내용은 곧바로 각 신문과 잡지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진료와 수술 문의가 빗발쳤다.
태수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국내 환자뿐만이 아니었다.
해외에서, 특히 유럽에서 수술 문의가 급증했다.
아파서 찾아온단 사람들을 거부할 순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더욱 눈코 뜰 새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그렇게 보름 정도 지난 후였다.
오전 시간.
태수가 진료실에서 오늘 일정에 대해 살피고 있었다.
“오늘 수술이 몇 건…….”
탈칵, 탈칵.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이 바빴다.
그러던 중이었다.
따르릉.
진료실 전화가 울리자 태수는 손만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최태수입니다.”
“이번엔 또 뭔 사고를 친 겁니까?”
김혁권의 엉뚱한 물음에 태수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사고를 치다니요?”
“외교통상부에서 전화 좀 바꿔 달랍니다.”
“……거기서 절 왜 찾습니까?”
태수가 반대로 묻자 김혁권의 황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저도 모르니까요.”
“그럼 전화한 사람이 알겠네요.”
“그러게요. 바꿔 주십시오.”
“그럽시다.”
따라란.
전화 바뀌는 소리가 잠시 들려왔다.
곧 그 소리가 멈추자 태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희망병원 수술팀장 최태수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외교통상부 동북아시아국장 정치한입니다.”
“동북아시아국장님이요?”
태수는 눈을 끔뻑거렸다.
부서 이름만 들어도 관련 나라가 머릿속에 쭉 떠올랐다.
딱히 연관점이 없어 더욱 의아했다.
그때 정치한 국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소하진 않으실 텐데요.”
“네. 동북아시아라고 하시니까 대충 감이 오긴 합니다.”
태수는 덤덤하게 답했다.
딱히 긴장할 이유는 없었다.
정치한 국장은 태수 반응을 어느 정도 짐작한 듯이 말했다.
“공무원과 인연이 좀 있으시다더니요.”
“응급의료대 팀장이기도 하고, 외교부와도 몇 번 만난 적이 있으니까요.”
“그러네요. 르완다 사건 때 저희 쪽에서도 말이 좀 많았습니다.”
슬쩍 그때 일을 들추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태수가 곤란한 입장은 아니었다.
“그때 신세 좀 졌었죠. 그나저나 편찮으신 분이 계셔서 연락 주신 겁니까?”
“역시 그 질문이 먼저네요.”
“보통 의사를 찾는 이유가 비슷비슷해서요.”
“직업적인 애환이 가득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정치한 국장이 이해하는 듯 말했지만 태수는 사실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시간을 한 번 확인한 태수가 조금 빠르게 말했다.
“실례지만 제가 곧 수술이라서 무슨 일인지 먼저 들어도 되겠습니까?”
“중국에서 수술 한 번 하시는 게 어떤가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중국이요?”
“네. VWD 환자입니다.”
그 소리에 태수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VWD 환자인데, 수술 한 번 하자?
태수는 정치한 국장의 그 말에 기분이 확 다운됐다.
VWD.
폰빌레브란트병(Von Willebrand’s Disease).
얼마 전 다녀온 핀란드의 내과 의사가 처음 발견한 병이다.
다시 말해 원래 VWD병은 내과 질환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대략 세계 인구의 1퍼센트로 추측된다는 게 학계 정설이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외과적 수술이 필요한 경우는 단 10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심장과 신장, 소화 계통의 극심한 합병증을 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VWD 환자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수술이 가능했다.
그런데 정치한 국장은 가볍게 수술 한 번 하자고 한다.
그 말투가 태수의 신경을 자극했다.
어느새 태수는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참을 생각도,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국장님, 실례지만 VWD란 병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잘 모릅니다.”
“용건이 있어 전화를 하셨으면 어느 정도는 알고 계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태수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순간 정치한 국장의 목소리에서 작은 당혹감이 느껴졌다.
“제가 의사가 아닌데…….”
“그럼 전 정치에 대해 모르니까 동북아 정세에 대해서 제 마음대로 말해도 됩니까?”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정치한 국장은 의외로 한발 물러섰다.
그 사과에 어쩔 수 없단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태수의 사나운 눈빛이 더욱 강해졌다.
“사과 이전에 보건복지부와 상의하고 연락 주신 겁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응급의료대 팀장입니다.”
태수가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다.
지금껏 한 번도 그 직책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수학여행 사고 케이스 출동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었다.
박성민을 포함한 모두가 지원팀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일깨워 주자 정치한 국장의 목소리가 어색하게 변했다.
“아니 그게…….”
“이제 아셨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제가 수술이 있어서 이만.”
뚝.
태수는 전화를 바로 끊어 버렸다.
상대에 대한 배려?
없었다.
이건 태수 개인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가 생명을 다루는 일을 경시하고 있었다.
그건 참을 수 없었다.
생각하던 태수가 쓴 미소를 지었다.
“나이를 먹어도 성질은 안 죽네.”
그런 혼잣말도 잠깐이었다.
태수는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고 몸을 움직였다.
수술이 잡혀 있단 말은 핑계가 아닌 사실이었다.
수술 준비를 마친 태수가 개수대에 섰다.
촤악.
손을 씻는 사이 김혁권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이랍니까?”
“가볍게 VWD 수술 한 번 하랍니다.”
태수는 핵심만 딱 잘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