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22
00325 325화
“그 후에는?”
“그게……. 죄송합니다.”
“혈액 샘플 채취해서 CBC(혈액검사)부터 진행하고 Blood clotting factor preparations(혈액응고인자제제)도 추가해야지.”
“알겠습니다!”
성진수가 씩씩하게 대답하고 부리나케 움직였다.
사실 혈우병 환자의 몸에 바늘구멍을 내는 건 위험한 행위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혈액을 보충할 수가 없다.
바늘구멍으로 인한 출혈에 대한 건 지금 생각할 게 아니라 나중에 고민해도 된다.
동성의료원 일 때야 없던 의약품도 지금은 충분히 구비해 둔 상태다. 사실 혈액 보유량도 전과 비교 불가였다.
지난 시간 태수가 발전한 만큼, 동성종합병원도 자체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은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 했다.
박완용 과장이 씨암으로 환부를 살피고 성진수가 조치를 이어가는 중이다.
태수는 정호철과 대화 중이었다.
정호철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태수에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하느라 애썼다.
“……그렇게 돼서 제가 119에 신고했습니다.”
다소 길다면 긴 이야기가 끝났다.
그 이야기를 듣는 사이 태수의 표정은 많이 굳어져 있었다.
왜 이리 아픈 사람들은 사연이 많을까.
정호철의 동생 정호석은 놀랍게도 기혼자다.
하지만 자신의 병을 알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 아이를 갖길 포기했다.
그의 아내가 몇 달을 눈물로 호소했지만 자신과 똑같은 병을 가질지도 모를 두려움에 아이를 갖길 거부했다.
대신 입양을 선택했다.
그러나 입양 조건이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경제적인 환경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정호철은 입양 조건에 도달하기 위해 낮엔 배달 일을 하고, 밤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슴으로 낳은 아이지만 최선을 다해 키우고 싶다는 절실함.
그리고 부모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잠도 쪼개고 먹는 것도 아끼며 정말 열심히 살았다.
문제는 어제 새벽에 발생했다고 한다.
편의점에서 창고를 정리하던 중 잘못 쌓인 상자가 쏟아졌다고 한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가 없어 정호석 환자도 그냥 넘어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낮에 잠깐 형제가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사이 이상을 발견하고 정호철이 119에 신고, 응급실까지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태수의 시선이 스트레쳐카에 누워 있는 정호석 환자에게로 향했다.
인상을 찡그리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순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원해서 얻은 병이 아니다.
아니, 세상에 어떤 병도 원해서 얻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그 병 때문에 그의 인생은 순탄할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졌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런 이야기는 태수의 마음을 아릿하게 했다.
태수가 정호석 환자를 내려다보는 사이였다.
정호철이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물었다.
“선생님, 이번에도 같이 가주실 거죠?”
“네?”
“진짜 염치없는 부탁인 거 아는데요. 제가 아팠을 때 같이, 그때와 같이 선생님이 같이 가주시면 안 됩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정호철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가득했다.
아직 씨암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에 태수는 작은 침음성을 흘렸다.
“음.”
“그때 한길병원 혈관센터 담당 선생님이 그러셨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면 전 죽었을 거라고요.”
“그건 만약이라는 겁니다.”
태수의 말에 정호철은 크게 고개를 저었다.
“저 바보 아닙니다. 그때 제가 얼마나 위험했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때문에 살았잖습니까. 그러니까 제 동생도, 사랑으로 애를 키우고 싶다는 제 동생도 좀…….”
“잠시만요. 일단 결과가 나온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수가 눈짓하자 옆에서 눈시울이 붉어진 조현정 간호사가 나섰다.
“보호자님, 일단 기본적인 서류작성 해주셔야 되거든요. 훌쩍. 그러니까 이쪽으로…….”
조현정 간호사가 여자다운 감성대로 안타깝단 표정으로 정호철을 접수처로 이끌고 갔다.
무거운 얼굴로 태수가 박완용 과장에게로 향했다.
그는 씨암 모니터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결과가 왔습니까?”
“아, 다행히 주요 장기나 중요 혈관의 손상은 없어.”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태수가 재촉해 묻자 박완용 과장이 모니터 화면을 바꾸며 말했다.
“여기. 복근이 짓눌려서 모세혈관 손상이 조금 커. 가장 문제는 장이야. 대장이 5센티미터 정도 찢어졌어. 아니, 짓눌렸다는 표현이 맞겠지.”
“내출혈이 심각한 건 12시간 이상 방치해서 그런 모양이네요.”
“복근도 그렇고 대장도 왜 짓눌린 거야? 도대체 자기 병에 대한 자각이 있는 사람이냐고.”
박완용 과장이 버럭 성질을 내자 태수가 간단하게 히스토리를 이야기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거랍니다.”
“푸우…….”
탁!
한숨을 길게 내쉰 박완용 과장은 괜히 애꿎은 씨암을 내려쳤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참 정이 많은 사람이다.
가끔 가장 냉정하게 환자를 봐야 할 응급의학과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했다.
한데 그 정을 환자 앞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환자에게는 냉정하게 대했다.
그런 강한 정신력이 없었다면 응급실에 가장 어울리지 않은 과장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타까워하는 박완용 과장을 뒤로한 태수는 씨암 모니터를 확인했다.
예전에 경험한 정호철과는 경우가 너무 달랐다.
찢어진 대장도 5센티미터 남짓이다.
수술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
하나 이건 외과에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내과와 순환기내과.
두 곳의 힘을 빌려야 한다.
치료에 필요한 약들이 갖춰졌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만약 수술과 치료를 동성종합병원에서 할 수 있다면 다른 병원으로 이송할 이유가 없다.
아니, 이송한다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생각은 그렇지만 무턱대고 수술실로 밀고 들어가긴 싫었다.
이 환자의 경우 다른 의과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아차 하면 기껏 수술해 놓고도 환자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시간부터 벌고 이 일을 하석준 과장과 상의해 봐야 할 거 같았다.
태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박완용 과장에게 말했다.
“일단 혈액검사로 어떤 타입인지부터 확인하고…….”
태수의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타다닥!
뒤에서 날 듯이 도착한 성진수가 빠르게 보고했다.
“CBC(혈액검사) 결과 혈우병 A로 확인됐습니다. 우선 hemostatic(지혈제) 가져왔고요. 혈액응고인자제제는 녹이는 중입니다.”
영하 20도씨에서 최장 1년 동안 보관할 수 있는 혈액응고인자제제였기에 해동에 시간이 필요했다.
성진수의 말에 태수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 모습을 봤는지 박완용 과장이 한마디 했다.
“다들 조금씩 성장하고 있어. 최 선생처럼 눈에 띄는 발전을 보이는 경우가 거의 없을 뿐이지.”
“이번에는 제가 실례한 거 같습니다.”
“알면 앞으로는 좀 더 신경 쓰라고. 그보다 지금 그런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어떻게 할 거야?”
다시 심각해진 박완용의 질문에 태수는 자기 생각을 밝혔다.
“이송보다는 치료 쪽으로 방향을 잡고 싶습니다.”
“수술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잖아.”
“그렇다고 치료할 수 있는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이송할 필요는 없죠.”
태수의 강직한 대답에 박완용 과장이 쓴 미소를 지었다.
“그건 옳은 생각이긴 하지.”
“우선 혈액응고인자제제로 효과를 확인하면 그때 과장님과 이야기하고 보호자에게 동의를 구해보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동안에 환자는 어떻게 할까?”
“지금은……. 재우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드레인 삽입해서 죽은피들은 먼저 뽑아내고요.”
태수도 어쩔 수 없었다.
맨 정신으로 괴로움을 견디는 건 한계가 있다.
이송으로 결정이 났더라도 같은 조치를 취했을 터였다.
그게 잠깐이라도 환자의 괴로움을 잊게 해줄 최선의 조치였다.
혈우병 환자의 배에 드레인을 삽입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출혈을 일으키면 멈추지 않기에 상처를 내는 자체가 위험한 행동이었다.
태수는 이미 짓이겨진 복근을 이용했다.
어차피 출혈을 일으키고 있는 환부였기에 짓이겨진 복근을 통해 드레인을 삽입했다.
속이 텅 빈 얇은 드레인이 삽입되자 검붉은 피가 밖으로 흘러내렸다.
그 후 태수의 목소리가 조금 다급해졌다.
“니들홀더하고 믹스터 주세요.”
“여기요!”
소독된 수술 도구로 드레인과 복부를 아예 꿰맸다.
살만 가볍게 뜨는 봉합법이라 출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다.
그리고 소독약을 가득 묻힌 거즈로 드레인 주변을 감싸 감염에도 만전을 기했다.
태수가 조치를 마치는 사이 성진수가 다시 다가왔다.
“혈액응고인자제제 준비됐습니다.”
“바로 투여해.”
태수와 함께 조치하던 박완용 과장이 오더를 내리자 성진수는 곧장 혈액응고인자제제를 IV에 추가했다.
이젠 기다리는 일이 남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흘러가는 시간을 넋 놓고 지켜볼 생각은 없다.
“성 선생, 혈액팩 두 개만 더 달자.”
“네, 최 선생님.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올 때 Anti-inflammatory agent(항염증제)도 같이 가져와.”
“네, 과장님. 혈액팩, 항염증제.”
태수와 박완용 과장의 오더를 되뇌면서 성진수는 또다시 재빠르게 움직였다.
이내 혈액팩와 항염증제가 추가됐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반응을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그때 조금 안정이 된 정호철이 다가섰다.
“선생님, 어떻게 됐습니까? 제 동생이 왜 이렇게 조용한 거죠?”
다소 흔들리는 눈빛을 본 태수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우선…….”
태수가 현재까지 상황을 설명하자 정호철의 얼굴에 다소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럼 이제 괜찮은 겁니까?”
“아니요. 조금 더 지켜본 후에 다시 말씀드려야 할 거 같습니다.”
끄덕.
태수가 차분하게 설득하자 정호철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침착하려 애를 썼다.
정호철은 정호석 환자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동질감 때문인지 여느 형제보다 더욱 끈끈한 모습이다.
성진수에게 우선 환자를 킵하라는 오더를 내렸다.
아직 안정이 된 상태는 아니기에 이송하는 건 적절하지 않았다.
시간을 잠시 벌어둔 후 태수와 박완용 과장은 응급실 간호사실 쪽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박완용 과장이 태수에게 말했다.
“이대로 시간을 보낼 수도 없고.”
“제가 우선 과장님께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결정 나는 데 얼마나 걸릴까? 혈액이나 혈장응고인자제제가 무한정 있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태수는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간호사실의 전화를 통해 하석준 과장과 통화를 시도했다.
뚜루루.
신호음이 들린 후 하석준 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과장입니다.”
“과장님, 저 최태수입니다.”
태수의 목소리에 하석준 과장 목소리가 의아하게 변했다.
“응급실……. 아, 방송에서 최 선생을 찾는 거 같더니. 아직 안 올라왔나?”
“네. 의논드릴 일이 있어서요.”
“무슨 일인데?”
하석준 과장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태수도 침착하게 상황을 이야기했다.
“제가 1년차 때 이송한 혈우병 환자, 혹시 기억하십니까?”
“아아, 새벽에 있었던 일이라고 이야기는 들었던 거 같은데. 그 환자?”
“아닙니다. 그 동생입니다만…….”
태수는 이어서 현재까지 조치한 사항을 이야기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태수의 개인적인 의견까지도 말했다.
“……그래서 수술을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내과하고 순환기내과의 협조가 필요하다 이거네.”
“수술만으로 끝낼 일이 아니라서 과장님께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 혈우병이라면 수술만 한다고 끝나는 병이 아니니까. 여기서 전화할 게 아니라, 내려가서 보는 게 더 좋겠어. 잠깐 기다리도록 해.”
하석준 과장은 그렇게 통화를 마쳤다.
태수는 조금 씁쓸했다.
“혼자 오신다고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요.”
하지만 과장이 내려온다는 데 내려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석준 과장이 내려온다고 한 후 5분이 지났다.
그사이 드레인을 통해 흘러나오는 피의 양이 조금 줄어들었다.
ECG(심전도 기계)를 통해 보이는 혈압과 맥박도 안정세로 접어 들어가는 중이다.
이 모든 상황을 조합해 보면 정호석 환자에게 혈액응고인자제제가 작용하고 있다는 뜻과 같았다.
다시 환자를 살펴보는 박완용 과장과 성진수의 초조한 얼굴이 한시름 덜어졌다.
“후우.”
“과장님, 혈액응고인자제제를 조금 더 투여할까요?”
“아니. 일단 현 상태부터 유지해. 그나저나 이 사람은 왜 안 와?”
박완용 과장도 그렇게밖에 이야기할 수 없었다.
하석준 과장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아직도 오지 않은 게 조금은 갑갑한 모양이었다.
아직 어떤 이야기가 되기 전이었기에 어떤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당장은 현상 유지가 최적의 의료 행위였다.
박완용 과장이 시간을 벌고 있는 사이 정호철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시간이 많이 지체된 상황이라 식구들에게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태수는 응급실 뒷문을 바라보며 조금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