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221
03225 3225화
여기 분위기가 약간 이질적으로 변해 갈 때였다.
투다, 투다다다!
헬기의 프로펠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빠르게 회전하더니 이윽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우리도 갑시다.”
“안내 부탁드립니다.”
줄리앙 협회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으며 화답했다.
헬기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지켜보던 제임스와 모두는 뒤돌아 대기 중인 전세 버스로 향했다.
이번 손님맞이를 위해 인천국제공항에서 특별히 허락해 줘서 가능했다.
물론 한국의사협회에서 장문의 협조공문을 보냈단 사실도 한몫했다.
전세 버스 앞엔 서강재가 제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척. 척.
일행들이 한 명씩 오르고 마지막으로 제임스 차례가 됐다.
그제야 서강재가 입을 열어 보고했다.
“모두 탑승했습니다.”
“우리도 출발하지. 호텔로 간다고?”
“네. 오늘 당장 수술하는 게 아니라서 여독부터 풀게 한답니다.”
“그냥 손님인 모양이야. 역시 닥터 최다워.”
제임스는 옅게 미소 띤 얼굴로 버스에 올랐다.
지금 한 말은 상당히 깊은 뜻이 있었다.
태수의 눈에 이들은 수술 구경꾼들이란 의미였다.
의사라고 생각했다면 병원으로 오라고 했을 터였다.
그 차이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서강재는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저놈들이 알기나 할까요?”
혼자 조용히 뇌까린 서강재는 차갑게 미소 지으며 마지막으로 버스에 올랐다.
1시간 후.
태수는 희망병원의 병실에 서 있었다.
병상에는 방금 이송을 마친 빅토리아가 누워 있었다. 그 주변으로 서영우 등 여러 팀원들이 움직였다.
태수는 팀원들을 대표해서 빅토리아에게 말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많이 힘들었는데, 점점 좋아지는 거 같아요.”
자그마한 목소리였지만 얼굴에 옅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대화가 상당히 자연스러워졌다.
1시간 가까이 헬기로 이동하는 사이 여러 대화를 나눈 탓이다.
그만큼 친분도 쌓았지만 동시에 신뢰감도 많이 올라간 얼굴이다.
그때 지켜보던 팀원들이 하나둘 뒤로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서영우가 태수에게 사인을 보냈다.
척.
오케이 사인을 본 태수가 가볍게 손짓했다.
먼저 나가란 의미였다.
그 신호에 맞춰 팀원들이 빅토리아에게 조용히 인사하고 병실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두 사람만 자리했다.
태수는 가볍게 이불을 정돈해 주며 빅토리아에게 말했다.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 아침부터 정밀 검사 들어갈 겁니다.”
“네.”
“걱정이 많으실 겁니다. 그렇죠?”
“…….”
빅토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두툼한 이불을 움켜쥐었다.
그 행동이 지금 그녀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지금 태수가 따로 시간을 마련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태수와 의료진들에 대한 불신 문제가 아니었다.
SAS란 병이 갖는 특이점 탓이었다.
얼마 전 세계 최초로 수술에 성공한 병이다.
그 수술의 두 번째 대상이 된 아기에 대한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였다.
더욱이 보호자도 없이 홀로 외딴 한국에 와 있으니 더욱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태수는 그 모습에서 살짝 연민을 느꼈다.
이럴땐 보여주는 편이 나았다.
힘을 가득 준 그녀의 손 위에 가볍게 자신의 손을 덮었다.
스윽.
그렇게 따스한 온기를 전해 주며 부드럽게 물었다.
“아기 이름은 지으셨습니까?”
“……칼리안이요.”
“칼리안……. 이름부터 아주 씩씩하고 강한 느낌이 드네요.”
“네.”
빅토리아가 답하자 태수가 빙그레 웃었다.
“씩씩한 이름만큼 씩씩하게 이겨 낼 겁니다.”
“네.”
“생각을 많이 하는 것보다 충분히 쉬는 게 아기에게 더 좋습니다.”
끄덕.
빅토리아가 가볍게 고갯짓했다.
태수는 그걸 보면서 한마디 더 했다.
“칼리안이 힘을 낼 수 있게 저희가 열심히 돕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희도요. 어려운 결정이셨을 텐데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수는 빅토리아의 눈을 마주한 채 정중하게 인사했다.
한 치의 가식도 없는 진심이었다.
더불어 수술에 대한 의욕을 더욱 끌어올렸다.
의사들의 참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건 그들의 사정이었다.
태수는 수술,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후.
빅토리아가 잠든 걸 확인하고 병실을 나온 태수가 진료실로 향했다.
간호사실을 지나던 중 김혁권 간호팀장이 보였다.
그는 태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뜬금없이 한마디 건넸다.
“울어요?”
“아니요. 방금 잠들었습니다.”
“쉽게 잠들진 못한 모양이네요.”
김혁권 간호팀장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기에 태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저쪽 사정도 엄청 기구한 모양입니다.”
“그건 모르는 거죠.”
“딱 사이즈 나오잖아요.”
김혁권 간호팀장은 아예 단정 지었다.
가정사가 불행할 거란 추측이었다.
하지만 태수는 그에 대해선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그런가요?”
“에휴, 참 살아가는 게 왜 다들 힘든지. 어떻게 가슴속에 응어리 없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겁니까?”
김혁권 간호팀장이 어두운 얼굴로 투덜거렸다.
태수도 같이 쓴 미소를 그려 보였다.
“어쩔 수 없겠죠. 아무튼 잘 좀 살펴봐 주세요.”
“어련히 알아서 할까요. 아, 진료실에 손님 와 있습니다.”
“손님이요?”
“제라르인가, 제랄인가 하는 의사요.”
김혁권이 답하자 태수가 혹시나 싶은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의사들은요?”
“혼자 왔던데요.”
“흠.”
“나머지는 호텔에서 자빠져 자겠죠. 시차에 비행 피로까지 더해졌으니까……. 이해는 되지만 썩 마음에 들진 않네요.”
김혁권이 슬쩍 불만을 얹어 말했다.
써전 유망주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참관 허락을 받고 왔다면 최소한 병원에 들러 인사라도 하는 게 예의였다.
태수와 팀원들은 초정을 받으면 아무리 시차로 피곤해도 그 부분은 꼭 지켰다.
그런데 써전 유망주들은 그런 생각까진 없는 거 같았다.
태수는 별다른 반응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
“우리랑 같이 일할 거 아닌데요, 뭐.”
“그 잔챙이들이 떠나는 날에 외국 의사들 들어온다면서요.”
“그렇죠.”
태수가 대답하자 김혁권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놈들이라고 다르겠습니까?”
“같다면 문제가 되겠죠.”
태수가 한쪽 입꼬리만 씰룩거렸다.
그 차가운 미소를 보니 간담에 냉기가 스치는 느낌이었다.
찍히면?
국물도 없다.
딱 그런 의미였다.
김혁권은 태수의 표정을 본 심정을 그대로 입 밖으로 표현했다.
“내가 벌집을 건드렸나?”
“그건 나중에 아시게 될 겁니다.”
“뭐, 캡틴이 알아서 잘 하시겠지.”
“아무튼 전 손님부터 만나러 갑니다.”
휙휙.
태수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진료실로 향했다.
돌아선 태수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지금 당장은 눈앞의 수술이 더 중요했다.
곧 태수는 진료실에 도착했다.
똑똑.
자기 진료실이지만 그래도 손님이 있다니 노크하는 예의 정도는 갖췄다.
“컴 인.”
안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태수는 문을 열었다.
끼익.
안으로 들어간 태수는 점잖게 서서 기다리는 제라르 부협회장과 시선이 마주쳤다.
짧고 단정한 갈색 머리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나이는 대략 50대 초, 중반 즈음으로 보였다.
공항에서 한 번 봤다고 해도 낯선 이목구비였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큼 익숙함이 감돌았다.
아무튼 정식으로 만난 건 처음이다.
먼저 다가간 태수가 인사부터 하고 손을 내밀며 첫마디를 꺼냈다.
“이제야 인사드립니다. 최태수라고 합니다.”
“제라르입니다.”
턱.
제라르는 가볍게 손을 맞잡으며 화답했다.
그길로 두 사람은 소파로 향했다.
마주 자리한 후였다.
태수가 그동안 받은 고마움에 대해 말하려 했다.
그렇게 시선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제라르 부협회장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는 게 보였다.
마치 대견하다는 느낌이 담겨 있었다.
그런 느낌은 상대를 예전부터 알고 있어야 보일 수 있는 반응이었다.
태수 기억으로는 처음 만났다.
지금까지 여러 번 곱씹어 봤지만 역시나 결과는 똑같았다.
그렇다면 저 미소는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게 의아한 태수는 바로 질문의 방향을 바꿔 물었다.
“혹시 제가 예전에 부협회장님을 뵌 적이 있었습니까?”
“음, 기억이 없으신가 보네요.”
“정말 만났습니까?”
태수가 재차 묻자 제라르 부협회장은 진한 미소를 머금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글쎄요.”
“전…… 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태수는 그냥 솔직하게 답했다.
사실 머리가 좀 아팠다.
지금까지 모든 과거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닌 탓이다. 지워진 기억 속에 그가 있다면 그건 더 낭패였다.
그 난감함이 점점 짙어질 때였다.
제라르 부협회장이 더욱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장난이 길어지면 안 될 거 같네요.”
“그럼 진짜 만났단 말씀이십니까?”
“네.”
“언제요?”
태수는 몸을 앞으로 쭉 내밀며 반사적으로 물었다.
그런 태수의 격한 모습에도 제라르 부협회장은 덤덤하게 말했다.
“시애틀에서요.”
“시애틀? 시애틀이면……. 어?”
태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지금까지 수없이 미국을 방문했지만 시애틀은 딱 한 번 가 봤다. 그것도 동성종합병원 외과 치프 시절 때였다.
USMLE 취득을 위해 제임스와 함께 LA에 왔던 그 시절이었다.
그때 제임스와 함께 시애틀에 다녀온 이유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행사에 다녀온 거였다.
그 행사의 이름은…….
-카프레네 추모의 밤
카프레네를 좋아하고 존경한 의사들이 그를 기리고자 뜻을 모아 만든 행사라고 했다.
태수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다가 너무 놀랐었다.
그때를 회상하던 태수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까 그때 인사드렸던 분들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얼굴로 제임스 박사님 손에 이끌려 다녔으니까요.”
“네. 그랬을 겁니다. 정말 그랬던 거 같습니다.”
태수는 곱씹어 생각해도 미세스 카프레네를 만났단 사실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그만큼 마음의 준비 없이 맞닥뜨린 상황이기도 했다.
태수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제라르 부협회장이 더욱 정이 듬뿍 담긴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닥터 최가 그분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 줬다는 걸요.”
“……그러셨습니까.”
“그 후로 틈틈이 들려오는 소식에 반가웠습니다. 제임스 박사님이 해 주신 얘기도 많고요.”
그가 거기까지 말하자 태수가 혹시나 싶은 얼굴로 물었다.
“그때 프랑스에 갔을 때 뒤를 봐주신 건…….”
“내 나름대로 보답한 겁니다. 그분이 쓸쓸히 떠나지 않게 도와주신 보답이요.”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요.”
태수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지만 제라르 부협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똑같이 했을 겁니다.”
“……사실 그때 저는…….”
“닥터 최.”
제라르 부협회장이 말을 끊었다.
그 순간 태수는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답했다.
“네.”
“지금을 보세요.”
“…….”
“아무도 닥터 최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들 기뻐했습니다.”
그 말에 태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기뻐…… 해요?”
“그분의 마지막을 지켜 준 사람이 의사란 사실에, 또 그 의사가 성장해 가는 소식에, 그리고 그분이 이루지 못한 수술을 완성시켰단 사실에 말입니다.”
“…….”
태수는 할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