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40
00343 343화
시작부터 꼭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태수는 주변으로 시선으로 돌렸다.
새로운 세상에 온 듯이 풍경 구경에 바빴다.
비록 특별할 거 없는, 아니, 조금은 황량할 정도의 터미널이었지만 태수 나름대로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부르릉!
출발 시간인지 버스에 시동이 걸리고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간만에 서울로 올라가는 길.
‘이번에는 사고가 없길.’
솔직한 마음이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단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났지만 애써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고속버스가 천안을 통과할 때까지 연락이 없었다.
‘오늘은 가네.’
태수가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
지금 향하는 장소가 연성대학병원이다.
어쩌면 그 시절이 있기에 지금도 있다.
동시에 가슴속에 작은 한을 심어준 곳이기도 했다.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묻고 눈을 감은 태수가 애써 잠을 청했다.
지금 생각해 봐야 골치만 아플 뿐이다.
‘닥치면 닥치는 대로.’
내심 중얼거린 태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세 시간 후.
태수는 연성대학병원 정문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 모습과 하나도 달라진 점이 없다.
전에는 웅장하다고 느껴졌던 연성대학병원의 건물들.
그러나.
동성종합병원도 이에 못지않았다.
“여기에 그렇게 목을 맸다니.”
새삼 태수는 이전의 자신이 얼마나 우물 속에서 지냈었는지 느꼈다.
연성대학병원 건물을 바라보는 사이 태수의 머릿속에는 인턴 때 경험한 일들도 같이 떠올랐다.
그중에 가장 마음속 깊이 남아 있던 건 역시나 카프레네와의 일이었다.
하나 엄연히 따지면 병원 내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었기에 곧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리고 나니?
남은 기억은 온통 고생뿐이다.
또한 마지막 날 힘없이 걸어 나와야 했던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때 자신과는 너무도 달라져 있다.
초청을 받아 돌아온 곳이다.
기죽을 거 없다.
당당해도 된다.
태수는 힘이 가득한 걸음걸이로 현관으로 향하면서도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잊지 않았다.
곧 병원 현관에 도착한 태수는 휴대폰을 들었다.
제임스가 어디에 있는지 듣지 못한 터였다.
뚜루루.
신호음이 몇 번 울리더니 제임스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오, 닥터 최. 어딘가?”
“지금 현관에 도착했습니다.”
“그럼 외과로 올라와서 날 찾으면 될 거야.”
“네,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태수는 짧게 통화하고 몸부터 움직였다.
병원 안으로 들어가자 또 한 번 익숙한 모습들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수없이 뛰어다녔던 병원 로비.
카프레네의 이름을 처음 신문으로 확인했던 카페도 아직 그대로였다.
카프레네 부인과 대화를 나눴던 장소도 바로 저곳이다.
동시에 카프레네 부인의 인자하고 고운 미소가 떠올랐다.
-제가 떳떳해지면 찾아가겠습니다.
그 약속이 다시 한 번 머릿속을 울렸다.
살면서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그리고 떳떳해지기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이다.
다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다시 시선을 돌려보니 곳곳에 추억들이 묻어 있었다.
병원엔 썩 좋은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둘러보는 태수의 눈빛은 어딘지 모를 그리움도 담겨 있었다.
그때였다.
타다닥!
“저쪽이라고 했지?”
“빨리 뛰어!”
젊은 의사 네댓 명이 우르르 한쪽으로 뛰어갔다.
대충 나이를 짐작해 보니 인턴들이다.
풋풋하면서도 패기만 가득한 그들의 모습에 태수도 그때 자신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인턴 때는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다.
뭐가 뭔지도 모르지만 일단 뛰어다녀야 칭찬받는 시절이었다.
그때는 그게 정답이었다.
이유는 단지 레지던트 선배들의 눈에 들어보겠다는 일념 때문이다.
다른 인턴 동기들과 경쟁하듯이 뛰어다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화이팅.’
태수가 속으로 응원했다.
지금 뛰어가는 그들에겐 어떤 감정도 없다.
오히려 선배로서 무럭무럭 자라날 후배들을 푸근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렇게 좀 더 걸어갔다.
로비에는 수많은 보호자와 몇몇 의사가 지나갔다.
한데 태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었다.
당연할지도 몰랐다.
흉부외과에서는 문제아 취급을 받았지만, 다른 의과에서는 태수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그리고 벌써 그 시간이 4년 가까이 지났다.
연성종합병원이란 곳이란 한 해에도 수없이 오가는 인턴들이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지금 태수를 바로 알아볼 의료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같이 인턴 생활을 한 동기들도 모두 최고 년차가 되어 있다.
그래도 아직 일과 시간에 한가롭게 로비를 거닐 위치가 아니다.
그 아래 기수들은 아예 태수를 모르기에 어쩌면 당연했다.
스쳐 가던 간호사들도 태수를 선뜻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차라리 지금은 이게 편했다.
태수는 주위를 둘러보며 외과로 향했다.
4년 만에 돌아온 연성대학병원이었지만 머릿속에 기억이 생생한지 움직이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렇게 움직이니 곧 외과에 도착했다.
제임스가 외과로만 오라고 했기에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
간호사들에게 물어야 할 거 같았다.
그런 생각으로 태수는 간호사실로 다가가며 주변을 크게 둘러봤다.
외과도 태수가 한 달 정도 인턴 생활을 했던 의과다.
한데 변한 게 없었다.
4년 만에 돌아왔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예전과 그대로였다.
변한 게 있다면 페인트칠을 다시하고 포스터를 바꾼 정도다. 복도에 비치된 벤치의 위치나 바닥에 오돌토돌한 부분까지도 그대로다.
마음 한구석에 묘한 느낌이 가득했다.
그러는 사이 태수는 간호사실 근처에 도착했다.
거기엔 한 의사가 차트를 확인하며 간호사와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박 간호사님, 조승덕 환자 금식 중이죠?”
“네, 내일 오전에 수술이라고 하셨으니까요.”
“좋습니다. 한 번 더 확인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치프.”
두 사람의 대화로 태수는 등을 돌린 채 차트를 살피는 의사가 외과 치프라는 걸 알았다.
연성대학병원 외과 치프.
‘누구지?’
동기일 확률이 높기에 태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갔다.
마침 차트 확인을 마친 외과 치프가 돌아섰다.
다가가선 태수와 외과 치프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외과 치프가 태수를 보곤 한마디 했다.
“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그러던 그가 순간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이름을 불렀다.
“최태수?”
“영준아!”
태수의 얼굴에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강영준.
태수와 같이 지옥 같은 인턴 생활을 한 동기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외과에서 인턴을 보냈던 특이한 이력을 가진 동기기도 했다.
순간 강영준은 조금 당황했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일이 있어서.”
“일? 무슨 일?”
순간 태수가 망설였으나 이내 솔직하게 말했다.
“제임스 박사 만나러 왔어.”
“제임스 박사님? 그 분과 알아?”
“약간은?”
“설마?”
강영준이 크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태수는 그런 강영준에게 넌지시 물었다.
“왜 그래?”
“설마…… 아니지?”
“뭐가?”
“에이. 말도 안돼.”
강영준이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맞아떨어졌을 뿐이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세계적 외과의사인 제임스 박사가 태수를 부른다?
되도 않는 일이라 넘어가려했다. 그런데 태수가 빙그레 웃으며 물어왔다.
“무슨 말?”
“제임스 박사님이 의사 한명을 초청했어.”
“알아.”
“알아…… 정말 너냐?”
강영준 안색이 급변했으나 태수는 태연했다.
“두 명을 초청한 게 아니라면 내가 맞을거야.”
“그럼 동성종합병원에서 온다는 의사가 너야?”
강영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았어.”
“자식. 아, 자식!”
순간 강영준이 얼른 다가와 태수의 양쪽 어깨를 강하게 흔들었다. 태수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파.”
“인마. 우리가 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외국에 갔다는 소식은 기준이한테 들었는데, 그 이후에는 전혀 몰랐다고.”
“그랬어?”
“이런 태평한 새끼. 아, 우리 태수가 살벌한 고난과 역경을 딛고 드디어 금의환향했네. 멋진 새끼!”
강영준의 호쾌한 목소리가 외과 간호사실을 가득 울렸다.
그런 그의 눈빛 속에 약간의 질투도 있다.
제임스가 부른 의사가 누군지 사실 궁금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다.
게다가 레지던트라니.
기함할 일이다.
하지만 태수의 방문을 환영하는 것 또한 진심이었다.
태수는 감격하는 강영준을 향해 조용히 부탁했다.
“아프다. 좀 놓아주라.”
“아차차, 미안. 인마. 갑자기 툭 튀어나오니까 내가 놀라서 그렇잖아.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거냐. 거의 3년 반 만이지?”
“대충 그 정도 됐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요기 앞 호프집이었잖아. 그때 정민수……. 아차차, 민수는? 혹시 민수 소식 알아?”
강영준의 화제가 휙 돌아갔지만 태수는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지금 나랑 같이 동성종합병원에 있어.”
“아, 역시. 그때 많이 힘들었을 거야. 나중에 그 자식이 실토해 네게 향한 오해는 풀렸지만 우리도 그때 1년차라 도와주지도 못 했어. 결국 병원 그만두고 외국으로 갔다더니. 지금 같이 있다니까 내가 다 고맙다.”
“자식.”
“진짜야. 그때 오해한 것도 얼마나 마음에 많이 남아 있었는데. 소식이라도 알아야 술이라도 한잔 사줬을 텐데. 그러지도 못 했잖아.”
강영준의 얼굴에 진심 어린 미안함이 가득했다.
이래서 동기라고 하나?
예전에 있었던 오해도 이젠 지난 일일 뿐이다.
지금은 태수와 정민수의 안부를 살갑게 챙기며 진정으로 걱정했다.
태수도 계속 이야기하고 싶지만 지금은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미안한데, 지금 내가 먼저 봬야 할 분이 있어서. 해후는 나중에 또 나누면 안 될까?”
“아차차차, 미안. 제임스 박사님이 기다리시는데 얼른 가봐야지. 아니야. 내가 안내할게. 가자.”
“너 일해야지.”
“자식아, 나 치프야. 어떤 레지던트가 나 하는 일에 딴죽을 걸어. 죽을라고. 하하.”
강영준은 호쾌한 웃음을 내뱉으며 태수를 직접 안내했다.
처음에 놀랐지만 그걸 지나니 남은 건 반가움뿐인 거 같았다.
태수도 솔직히 기뻤다.
예전의 일은 이미 머릿속에서만 남았다. 또 나중에 몇몇 동기와 진하게 술 한잔 마시며 대화로 풀었다.
그렇기에 동기들에 대해 지금 남은 건 반가움뿐이었다.
태수가 강영준의 어깨에 슬쩍 손을 올렸다.
힐끔 쳐다본 강영준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같이 어깨동무했다.
“태수야.”
“왜?”
“박박기던 인턴 시절 말이야. 시계가 거꾸로 가는 것 같았지?
“그래.”
“그런 두명이 이젠 치프가 되고 한 놈은 눈 돌아갈 일 저지르고 인생 재밌네.”
“하하.”
태수가 웃었다.
나란히 걸어가는 걸음걸이에 반가움과 설렘이 가득했다.
이내 강영준이 태수를 어느 방 앞에 멈춰 세우며 한마디 했다.
“여기 소회의장 안에 계셔.”
“고마워.”
“그보다 너, 중간에 시간나면 진짜 애들 얼굴 보는 거다. 다들 너 보면 반가워할거야.”
“당연하지. 네 전화번호 다시 저장했으니까 조만간 연락할게.”
태수가 시원스럽게 대답하자 강영준이 만족한 얼굴로 변했다.
“다 떠나서 얼굴 다시 보니 좋네. 아, 오늘은 이상하게 일과가 즐거울 거 같네. 그럼 이따가 보자.”
강영준은 끝까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멀어져갔다.
인턴 동기다.
의사 생활중 가장 힘들고 서럽단 인턴 생활이다. 그 지옥같은 시간을 같이 보내서 그런지 그 끈끈함을 이루 설명할 수가 없었다.
강영준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본 후에야 태수도 몸을 돌렸다.
소회의장 문을 보고 선 태수가 가볍게 옷차림을 손 봤다.
툭툭.
제임스는 형식이나 격식을 따지지 않는다.
태수도 알고 있지만 어른을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까지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에야 태수는 조심스럽게 노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