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402
Chapter 170화.
반면 태수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수풀 쪽으로 향했다.
사박, 사박.
이름 모를 수풀 옆으로 돌아가자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부목을 짚고 있었고, 왼쪽 바지가 나풀거렸다.
그런 특징을 가진 마을 사람은 단 한 사람 밖에 없었다.
왕 노인이었다.
태수는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올 줄 알았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귀가 밝아.”
“워낙 조용하니까요.”
태수가 덤덤하게 미소 지으며 왕 노인과 거리를 좁혔다.
왕 노인이 의아하게 물었다.
“왜 오나?”
“부축하려고요.”
“할 줄 아나?”
“끝내줍니다.”
척.
태수는 대답과 동시에 부축했다.
의외로 왕 노인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자 태수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부축했다.
팔짱을 바짝 끼고 힘을 줘 자신에게 완전히 의지하도록 유도했다.
턱.
“끝내주지요?”
“재주가 많은 모양이야.”
“감사합니다. 편하게 가시죠.”
“그러지.”
사박, 사박.
태수의 부축은 정말 효과가 좋은 모양이었다.
왕 노인의 발걸음이 상당히 가벼워졌다.
느긋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의외로 다정해 보였다.
그런 순간도 잠시였다.
이내 야외 테이블에 도착했다.
태수가 천천히 팔짱을 풀며 권했다.
“앉으시죠.”
“그래. 음, 이렇게 고요하니 발소리가 들려도 이상하지 않지.”
“뭐, 그런 편이죠.”
태수는 반대 자리에 앉으며 수더분하게 답했다.
한편, 정민수는 왕 노인의 등장이 놀라웠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아니, 어……. 갑자기 왜?”
그때 김혁권이 정민수를 지나치며 말했다.
“차 한 잔 내어드리고 같이 애들보러 가십시다.”
“네, 그래야죠. 그런데 진짜 왜 오셨지?”
“이쯤 되면 슬슬 눈치 챌 법도 한데.”
김혁권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눈치 없는 정민수를 안타까워했다.
잠시 후.
야외 테이블엔 태수와 왕 노인이 서로 마주앉아 있었다.
둘 사이엔 김혁권과 정민수가 두고간 차가 놓여 있었다.
태수가 먼저 정중히 손짓하며 권했다.
“차드시죠.”
“구수한 차는 다 마신 모양이야.”
된장을 빗댄 말에 태수는 웃으며 답했다.
“그때 마지막 한 수저까지 모두 비우셨습니다.”
“그래. 그랬었지.”
“어떻게, 좀 더 구해볼까요?”
“아니야. 크흠. 그보다 어째 오늘 내가 올 줄 알았던 모양이야.”
왕 노인은 찾아온 용건이 더 중요한지 말을 돌렸다.
태수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조만간이라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오늘 아침일 줄은 몰랐습니다.”
“어째서 찾아올 거라 생각했지?”
“어제 송희 수술 경과를 확인했으니까요.”
태수의 대답은 너무도 수더분했다.
그게 오히려 왕 노인의 궁금증을 더하는 듯 했다.
“그런 이유라면 창규가 먼저 아닌가?”
“그땐 저희가 어떤 놈들인지 살피러 오셨었죠.”
“꽤나 표현이 직설적이야.”
“이리저리 돌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태수는 소신을 담아 답했다.
왕 노인은 오히려 그런 표현이 듣기 좋은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경청하겠습니다.”
스윽.
태수는 말 그대로 자세를 바로했다.
그렇게 왕 노인의 질문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돌연 왕 노인이 퉁명한 목소리로 태수를 타박했다.
“그런데 자네 지금 뭐하나?”
“말씀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도 봐준다고 하더니, 막상 오니까 손님 취급하는 게야?”
너무도 뜬금없이 구박했다.
방금 전과 목소리 톤과 표정도 달랐다.
스스로 변덕이 심하다더니 그 말에 꼭 맞는 변화였다.
그런데 태수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답했다.
“잘 보고 있습니다.”
“누가 쭈글쭈글한 얼굴 뜯어보라나?”
“아니요. 저기서 부축할 때부터 쭉 살펴보고 있었는데요.”
스윽.
태수가 수풀 너머를 가리키기까지했다.
그게 허풍이라 생각했는지 왕 노인 표정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입심만 좋은 모양이야.”
“흠. 정 그러시면 말씀을 좀 드려볼까요?”
“뭔가 알아낸 게 있단 뜻이렷다.”
의심어린 왕 노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거렸다.
그 눈빛은 너무도 살벌했다.
위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태수는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외려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면 정신 차리기가 좀 힘드시죠?”
“음? 흐음.”
“체온이 높고 맥박이 좀 느린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왕 노인이 툭하니 반발했다.
놀람을 억지로 누르는 느낌이었다.
태수는 개의치 않고 이어서 말했다.
“보통의 경우엔 반대로 나타납니다.”
“그걸 내가 어찌 알아.”
“그럼, 한쪽 다리에만 체중이 실려 몸의 균형이 많이 틀어졌습니다.”
“그건 누가 봐도 알아.”
괜히 역정이었다.
날카로운 눈빛도 일순간 흔들렸다.
정곡을 찔린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인정하지 않았다.
태수는 그런 역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 외에 찾아낸 문제들을 술술 읊기만 했다.
“안색이 엄청 노란데 곳곳에 홍조가 보입니다.”
“그게 뭐?”
“부축한 팔이 전체적으로 부은 증상까지 더해보면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
“흐음.”
왕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태수는 반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더 말씀드릴까요?”
“없으니까 괜한 소리를 하는 거렸다.”
“흠. 입과 몸에서 쓴 냄새가 풍깁니다.”
태수가 바로 다른 증상을 말했다.
왕 노인은 허점을 찔린 듯 괜히 버럭 역정을 냈다.
“늙으면 다 그래.”
“나이 탓이 아닙니다.”
“그럼.”
“소화가 잘 안 되시죠? 몸속에 쌓인 독소가 땀으로 배출되면서 나는 냄새입니다.”
“…….”
왕 노인의 눈빛이 묵직하게 가라 앉았다.
태수는 더욱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우선 여기까지 파악했습니다. 아직 애송이 의사라 전부 맞는지는 잘모르겠습니다.”
“지 잘났다고 떠들고 슬쩍 꼬리 내리면 정중하다고 할까.”
“그럼 진짜 다 맞습니까?”
“뭬야?”
“최근에 집중적으로 공부한 부분들이라 저도 약간 자신이 없었거든요.”
긁적긁적.
태수가 머쓱했는지 뒷머리를 문지르며 답했다.
순간 왕 노인은 눈까지 크게 뜨며, 더욱 황당해 했다.
“그냥 제 멋대로 떠든 거란 말이야?”
“엄연히 사실에 근거해서 살핀 겁니다.”
“만약 틀렸다면?”
“할 수 없죠.”
태수의 심드렁한 대답에 왕 노인은 이젠 기가 막힌 표정으로 변했다.
“뭐 이런 무책임한 사람이 다 있나.”
“그건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대충 떠들어 놓고 맞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라는 거잖아.”
왕 노인이 역정을 내자 태수는 억울했다.
“제가 진찰한 건 아니잖습니까.”
“음?”
“그냥 보고, 듣고, 맡고, 그렇게 오감으로 살핀 걸 답해 드린 거라고요.”
태수는 불확실한 기본 검사였음을 강조해 말했다.
왕 노인이 먼저 해보라고 멍석을 깔아준 일이었다.
스스로도 그걸 기억하는지 왕 노인 표정이 살짝 어색해졌다.
“크허험. 어디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눈 똑바로 뜨고, 떽.”
“참 다양한 모습이 있으시네요.”
“이런 시건방진 녀석 같으니라고. 쯧.”
왕 노인은 대놓고 혀까지 찼다.
태수는 그런 그의 모습이 익숙했다. 한국의 고향 동네 할아버지들이 꼭 저렇게 행동한 탓이었다.
누가 봐도 ‘억지 부리기.’ 였다.
배째라 식으로 나오면 솔직히 답이 없었다.
할 말이 없으니 저렇게 무작정 억지를 부리는 게 들림없었다.
태수는 순간순간 돌변하는 왕 노인의 모습에 휘둘리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어르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소리냐.”
“제가 지금까지 만난 모두가 비슷한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렸다.”
왕 노인의 표정이 삽시간에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태수도 진지하게 답했다.
“실은 창규를 통해…….”
NGO본부에서 이창규 피검사 결과를 풀어서 설명했다.
그저 추측만이 아님을 또렷하게 밝혔다.
“…….”
왕 노인은 그런 태수의 말을 굳은 표정으로 경청했다.
곧 태수의 긴 설명이 끝났다.
“……그래서 fatty liver 아니, 지방간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간에만 지방이 쌓일 수 있단 게냐?”
“지금 어르신 얼굴의 황달(icterus)이 증거입니다.”
태수는 그저 말로만 하지 않았다.
스윽.
가운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 내밀었다.
청진기와 더불어 몇 가지 꼭 챙기고 다니는 물품 중 하나였다.
노인은 거울 속 자신의 노란 피부를 직접 확인했다.
태수와 비교해보니 확실히 달랐다.
눈에 뻔히 보이는 차이를 부정하진 않았다.
“다르긴 다르구나.”
“혹시 약주를 자주 하십니까?”
“술? 언제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왕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태수는 반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의심 없이 믿는 게냐?”
“그렇게 될 정도라면 술을 매일 입에 달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술이 아니라 하면?”
왕 노인이 의아할 정도로 재촉했다.
태수는 그 순간 느낌이 왔다.
“역시 마을 분들도 대부분 비슷한증상이 있는 모양입니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술이 아니라면, 음식일 겁니다.”
“음식이라. 이유는?”
“특정한 음식, 혹은 식재료를 장시간 복용해도 생길 수 있는 증상입니다.”
태수는 닥터 월릭에게 배운 지식을 쉽게 풀어 설명했다.
왕 노인은 신중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음.”
“떠오르는 게 있으십니까?”
“거 녀석, 보채지 말고 좀 기다려라.”
“이제 생각나십니까?”
태수가 연속해 물어보자 왕 노인이 인상을 푹 찡그렸다.
“성격 참.”
“그냥 평소 먹는 게 뭔지 말씀하시면 되잖습니까.”
“이 놈이 어디서 성질이야?”
왕 노인이 버럭 역정을 냈다.
그 순간 태수도 목소리가 높아졌다.
“같이 고민해 봐야 빨리 찾을 거 아닙니까.”
“오랫동안 먹은 게 한두 개가 아니니까 이러지.”
“언제부터 먹었는지, 어떻게 먹게 됐는지 말씀하시면 되죠.”
태수는 움츠리지 않고 강하게 맞섰다.
순간 왕 노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으르렁 거렸다.
“과거지사까지 모두 말하라는 건가?”
“필요하다면요.”
“뭐라?”
“왜 찾아오셨습니까. 마을 사람들 건강 챙기자고 오신 거 아닙니까.”
태수도 답답함을 터트리며 목청껏 소리를 높였다.
왕 노인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 이놈아. 건강 챙기자고 이렇게 왔다.”
“그런데 뭘 숨기십니까.”
“네놈이 알 필요 없으니까.”
“누가 전부 알려달랍니까. 그냥 뭘 먹는지만 알려 달라잖습니까.”
태수의 눈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마주한 왕 노인의 눈빛 또한 타오를 정도로 이글거렸다.
평행선을 달리는 느낌이다.
서로 생각이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그 상태로 잠시 대치했다.
말을 하지 않는 건 격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함이었다.
너무 격해진 대화라 한 박자 쉬어가는 게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