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46
00349 349화
이기준과 제임스.
아무리 그림을 그려 봐도 별로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그러나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다.
거절한다면 동기조차 무시하는 인간으로 보일 뿐이다.
그게 두려운 건 아니다.
말만 전하면 되는 일이다.
결정은 제임스의 몫이다.
태수는 생각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전화해서 여쭤볼게.”
“의향만 물어봐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지. 아마 내 생각이 맞는다면 제임스 박사님은 날 만나주실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태수가 정말 궁금해 묻자 이기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임스 박사님이 초청한 의사가 너잖아. 그런 네가 하는 부탁을 쉽게 내치진 않으실 거 같다는 느낌이 들어.”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아니, 내 느낌은 그래. 이 느낌이 여태까지 틀린 적이 없거든.”
이기준은 끝까지 자신만만했다.
스스로의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이기준 또한 열심이다.
태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아차차. 난 공짜로 받는 건 싫으니까 네가 나한테 원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들어줄게. 이 정도면 될까?”
이기준은 역시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훗날을 기약하는 건 이기준에게도 뭔가 계획이 있음을 의미했다.
‘지독한 녀석.’
그 철두철미한 계획성은 인정할 만 했다.
여태까지 수많은 의사를 봐왔지만 질렸단 생각이 드는 건 이기준뿐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거리를 두고 싶진 않았다.
어쩌면 연성대학병원에서 나온 이후 이기준은 그동안 꾸준히 연락하고 지낸 유일한 동기다.
“그런 건 모르겠고, 일단 전화부터 하고 올게.”
“얼마든지. 아니지. 내가 저쪽으로 갈게. 저기서는 전혀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말고.”
“그럴 거 없는데.”
“아니야. 이게 예의지. 그럼 통화 끝나고 불러.”
이기준은 친절하게 자리까지 옮겼다.
태수는 그 뒷모습을 조금 어이없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나 자리를 피해준 건 고마웠다.
옆에 있다고 눈치 볼 태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용히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던 탓이다.
이기준이 옥상 반대편까지 멀어지자 태수는 그제야 제임스에게 전화했다.
뚜루루.
몇 번 신호음이 가더니 제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날 사람 있다더니, 벌써 다 만났나?”
“아닙…… 니다. 여쭤볼 게 있어서요.”
“무슨 일인데 그렇게 어려워하나?”
“실은 제임스를 좀 만나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부탁을 받았는데 일단 여쭤보는 게 순서일 거 같아서요.”
태수가 어렵사리 말을 꺼내자 제임스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어떤 친구인데?”
“그러니까…….”
태수가 간단하게 이기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자 제임스는 얼핏 기억이 나는 거 같았다.
“아아, 예전에 카슈미르에서 잠깐 얼굴을 본 기억은 나는 거 같아.”
“네, 그 친구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수술 끝나고 한 번 얼굴을 보도록 하자고.”
의외로 호쾌한 제임스의 목소리에 태수는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걱정이지?”
제임스가 외려 물어오자 태수는 걱정을 보였다.
“피곤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수술 후에 바로 만나는 건 아니니까 괜찮아. 그리고 닥터 최의 동기기도 하고 또 카슈미르에서 얼굴 한 번 본 사이인데 못 볼 이유가 없지.”
제임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젊고 혈기 넘치는 의사와 만나는 건 내 유일한 취미기도 해. 그 열정이 언제나 나에게 자극을 주니까 말이야.”
“저도 자극을 드리고 있습니까?”
태수의 물음에 제임스의 호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감사합니다. 그럼 친구에게 이야기해 놓겠습니다.”
“그렇게 해. 그나저나 조카는 안 봐?”
“수술 끝나고 보러 갈 생각입니다.”
태수가 빠르게 대답하자 제임스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보고 싶을 텐데 말이야.”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수술이 잘 끝난 후에 가족들을 만나야 마음이 편할 거 같습니다.”
“닥터 최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그럼 이따가 호텔에서 보자고.”
“네, 그럼.”
태수는 정중하게 통화를 마쳤다.
휴대폰을 품에 넣은 태수가 이기준에게 손짓했다.
이기준은 느긋한 평소 모습답지 않게 빠르게 다가왔다.
“어떻게 됐어?”
“수술 끝나고 같이 보자고 하셨어.”
“봐. 내 말이 맞지?”
이기준의 얼굴에 처음으로 해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간절히 원하던 일이었나 보다.
오죽하면 태수도 순박한 이기준의 미소를 처음 봤다.
“그렇게 좋아?”
“좋다마다. 이런 기회가 어디 있어?”
“하긴 나도 아직 제임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쿵쾅거리는데.”
태수의 말에 이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 아, 곧 애들 부를까?”
“애들?”
“어제 강 선생에게 들었어.”
강영준과 한 이야기가 어느새 전달된 모양이다.
시간?
호텔로 돌아가기 전까지 아직 여유가 있다.
오래 이야기할 순 없어도 동기들 얼굴 한 번은 꼭 보고 싶었다.
“그래, 불러.”
“그럼 내가 전화할게. 그런데 제임스 박사님과 내가 만나기로 했다는 건 비밀로 해줘.”
“그것도 비밀이야?”
태수가 묻자 이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만약에 애들이 나랑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 아니다. 그럴 주변머리들도 안 되니까 그건 괜찮을 거야.”
이기준은 혼자 결정을 내리고는 휴대폰을 들었다.
“강 선생, 지금 최 선생이랑 옥상에 있어. ……그래. 기다릴게.”
통화를 마친 이기준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동기들을 기다리는 사이 태수와 이기준은 옥상 한쪽에 자리했다.
그동안 지내왔던 이야기를 간단하게 나눴다.
“……그렇게 해서 여기 왔지.”
“난 그동안…….”
이기준도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놨다.
그 속에서 연성대학병원의 레지던트 시스템을 다시 한 번 간접 체험했다.
1년차는 구박만 받는다.
인턴 중에서도 성적이 좋은 이기준도 레지던트 1년차는 욕만 먹었다고 한다.
2년차.
밑에 1년차가 들어왔지만 실질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시기였다.
환자들의 각종 검사를 진행하는 건 2년차의 몫이었다.
3년차.
이제야 숨통이 조금 트이고 조교수나 부교수의 수술에 어시스던트로 참여하는 시절이다.
가뭄에 콩 나듯이 수술에 들어갔기에 개인적인 수련에 몰두해야 할 시기라는 설명도 함께였다.
그리고 마지막 4년차.
정교수나 과장의 수술 어시스던트를 하고 자그마한 수술을 집도할 기회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수술의 폭은 너무도 좁다.
대신에 자유 시간이 많아 여러 수술 영상을 살펴보며 개인 수련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태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서울 유명 병원의 체계를 그대로 가져온 게 지방 병원의 시스템인 거 같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기준에게 듣고 나니 더욱 확신이 섰다.
차라리 자신과 정민수가 특별한 경우다.
다른 레지던트들이라면 그런 순서로 차근차근 성장하는 게 당연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태수가 이기준에게 물었다.
“여기서 수련하는 장점은 뭐가 있어?”
“가장 큰 장점은 아무래도 수술 영상들이지. 방대하고 다양한 수술들을 영상으로 직접 확인하고 연구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니까.”
“그럼 단점은 뭐가 있을까?”
“집도 횟수. 절대적으로 부족해. 펠로우들도 있고, 조교수에 부교수. 정교수에 부과장, 과장까지. 너무 전문의가 많아서 수술할 기회가 적어.”
솔직한 이기준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집도 경험이 그래도 조금 많은 지방 병원이 좋지 않아?”
“내 실력을 키우기는 좋지만, 높이 올라가진 못하지. 단적인 예로 네가 펠로우……. 아니다. 넌 특이 케이스니까 패스하고.”
“특이하기는.”
“정상적은 아니잖아. 좌우간 일반적으로 지방 병원에서 수련한 레지던트들은 펠로우가 돼도 서울로 올라오기 힘들잖아.”
이기준이 차분하게 설명하자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지.”
“그게 가장 큰 문제야. 연봉도 차이가 심하고 경험도 점점 격차가 벌어지게 되는 거지. 그러다 보면 지방만 전전하게 되는 거고.”
“음.”
태수가 탄식을 흘리는 사이 이기준이 이어서 말했다.
“우리 또래 애들이 일단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하는 거와 똑같아. 그래서 시작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거 같고 말이야.”
“그런가?”
“네 말 들어보면 동성종합병원은 그런 틀에서 조금 벗어난 거 같긴 한데, 모든 병원이 동성종합병원과 같진 않아.”
이기준이 꼬집어 말했다.
태수도 그 점은 어느 정도 수긍했다.
“동성종합병원이 좀 특별한 병원은 맞아.”
“너랑 정 선생이 선택한 병원이라면 특별하겠지. 그보다 이제 전문의 취득한 후에도 계속 동성종합병원에 있을 거야?”
“아직 결정한 건 없어.”
태수는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출발 전에 방문했던 환자들 모두 꼭 돌아오길 희망했다.
그리고 태수도 알게 모르게 정이 들어 있다.
사실 획기적인 앞날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다시 돌아갈 확률이 높았지만 아직 미래는 미정이다.
그 대답을 들은 이기준이 나지막이 말했다.
“가급적이면 외국으로 나가.”
“응?”
“내가 봤을 때 너는 한국 체질이 아니야. 차라리 외국에서 제임스 박사님 밑에서 죽어라 배우고 유명해진 후에 돌아오는 게 맞아.”
이기준의 확신 어린 목소리에 태수가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국 의료 시스템은 한계가 분명해. 넌 그 한계와 계속 부딪칠 거고. 그러면서 지쳐가는 건 결국 너야.”
“난 의료 시스템과 싸울 생각은 없어.”
태수의 말에 이기준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 생각이고. 난 차라리 네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사가 되어서 돌아왔으면 싶다. 그때가 되면 아마도 내가 너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 거 같으니까.”
“네가?”
“전에 말했잖아. 내가 겨우 연성대학병원에서 과장이나 하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라니까.”
이기준의 말에 태수는 멈칫했다.
서울의 유명대학병원 과장.
수많은 의사에게는 인생을 건 목표였다.
그러나 이기준은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이기준의 목표가 어디인지 아직 모르지만, 최소한 과장급보다는 훨씬 높은 곳이란 것만 짐작됐다.
태수는 순수한 걱정을 보였다.
“올라갈 수 있겠어?”
“어떻게든 올라갈 거야. 내 몸이 구정물로 뒤덮이든 똥밭을 구르든.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진짜 승자니까.”
“…….”
“넌 이런 내가 이해가 안 되지?”
이기준의 소탈한 물음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어. 이해 안 돼.”
“자식. 이럴 때는 너무 솔직하다니까.”
“이해는 안 되는데, 응원은 할게.”
태수의 반전 가득한 말에 이기준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의외인데. 갑자기 왜 응원을 한다는 거야?”
“넌 웃기는 놈이니까.”
“내가? 하하.”
이기준이 기가 막힌다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태수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꼭 높은 자리에 올라가. 그리고 그때 가서 모르는 척하지 말고.”
“그 말을 들으니까 예전에 여기서 했던 대화가 떠오르는 거 같은데 말이야.”
“그러게.”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옥상 한 곳으로 향했다.
그 장소에 마치 신기루처럼 인턴시절 태수와 이기준의 앳된 모습이 나타난 거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기준이 태수에게 진지한 얼굴로 뭔가 말을 건네고 있다.
-넌 열심히 사람 치료해. 난 그런 널 부릴 위치까지 올라갈 테니까.
마치 그 다짐 어린 목소리가 지금에 태수와 이기준의 귀를 다시 울리는 거 같았다.
이기준은 그때 자신이 한 말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중이다.
태수 또한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만 온 힘을 쏟고 있다.
시간만 흘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