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53
00356 356화
태수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하늘을 바라봤다.
다행히 자신이 없어도 다들 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친 시간들이 보람으로 다가왔다.
정호철이나 예종혁 대원, 김덕현이 원활하게 회복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어서 더욱 마음이 가벼웠다.
자신이 수술한 환자의 건강회복.
의사에겐 보람이다.
그순간 태수는 문득 김혁권이 떠올랐다.
같이 초청받지 못했다고 투덜거리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울리는 것 같았다.
생각난김에 태수는 바로 김혁권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김혁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쁜 분이 어떻게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목소리에서 영 못마땅함이 느껴졌다.
“아직도 화가 안 풀리셨습니까?”
“초청받지 못한 간병인 주제에 무슨 화가 났겠습니까.”
“이쪽 사정이 그랬다니까요.”
태수가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이내 김혁권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농담입니다. 서울 공기는 어때요? 듣자하니 숨이 턱턱 막힌다는데.”
“목도 칼칼하고 코도 맹맹합니다. 공주에 비하면 너무 매연이 심해서요.”
“제임스는 왜 그런 각박한 동네까지 닥터 최를 불러내고 그런답니까. 이 동네에서 수술하면 회복도 더 빠르겠던데.”
김혁권은 아쉬운 목소리였다.
연성대학병원에서 수술하는 것보다 동성종합병원에서 수술했으면 하는 바람이 느껴졌다.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이기도 하거니와 태수와 민수가 더욱 돋보일 수 있는 수술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태수는 그런 관심이 언제나 고마웠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서로 잘 알고 있다.
“저도 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문제인 거 같습니다.”
“하여간 그놈의 아집들…….”
김혁권의 말이 이어지던 중이었다. 갑자기 멀찍이서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바꿔 달라니까요.
-아! 좀 가만히 있어요. 통화도 못하게.
-당신이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으니까 내가 답답해서 그렇지.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너무도 익숙했다.
누군지 대번에 알 것 같았다.
“혁권 씨, 지금 박 선배하고 계십니까?”
“옆에서 떽떽거려서 시끄러워 죽겠습니다. 아! 좀 있어 보라고.”
통화하는데 박성민이 지분거리는지 김혁권의 목소리가 따갑게 울렸다.
그런 목소리도 잠시, 곧 박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수야, 야, 너 안 끊었지?”
“그럼요, 선배님.”
“내가 진짜 이 전화 뺏으려고……. 잠깐만요. 나 몇 마디만 하면 된다니까.”
두 사람은 계속 투덕거리는 모양이었다.
태수는 미소 띤 얼굴로 기다렸다.
은근히 비슷한 성향으로 오가는 말투는 투박했지만 역시 예상대로 조금 친해진 모양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전화라면 조금 시간이 지체되어도 기다릴 수 있었다.
끝내 박성민이 이겼는지 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싸웠노라. 이겼노라. 그리고 휴대폰을 쟁취했노라. 음하하!”
“선배님도 참. 그런데 어떻게 두 분이 같이 계셨습니까?”
“뭘 같이 있어. 그냥 옥상에 올라왔는데 김씨 아저씨가 있어서 함께 커피 한 잔 마시는 중이었어. 얘가 이상한 오해를 하네.”
박성민이 당황한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 아니었는지 멀리서 김혁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배 전화라고 똥폼 잡기는. 지가 먼저 전화해서 옥상으로 올라오라고 통보해 놓고.
-아, 진짜 이 아저씨가. 좀 조용히 합시다. 통화 중이잖아.
-그 휴대폰 내 거거든. 공짜로 사용하는 주제에 큰 소리는 왜 쳐? 내가 어이가 없어서.
두 사람이 투덕거리는 소리가 또다시 이어졌다.
말은 그렇게 해도 요즘은 서로 얼굴을 자주 보는 것 같았다.
표현은 서툴지만 조금씩 친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태수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했다.
그때 박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야, 김씨 아저씨 눈에서 레이저 나올 거 같으니까 짧게 이야기하자.”
“말씀하십시오.”
“수술했냐?”
“아직이요. 내일입니다.”
태수가 빠르게 대답하자 박성민이 이어서 물었다.
“그럼 꾹꾹, 그리고 꼼꼼하게 찍어 누르고 있냐? 아주 주둥이를 팍팍 털어서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고 있냐고.”
“그런 거 없습니다.”
태수의 대답에 박성민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가득 물들었다.
“왜 앞뒤가 달라. 너 분명히 나한테 찍어 눌러 버리겠다고 당당하게 소리치고 올라갔잖아.”
“말로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착각했나. 좌우당간 주둥이로 찍든지, 실력으로 부숴 버리든지 화끈하게 마무리 짓고 내려와. 이건 내가 너한테 직접 내리는 오더야. 알았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물론 수술을 성공적으로 진행하겠다는 이야기였지만 박성민은 오해한 모양이다.
“그렇지. 내가 수술계획카드 걸어 놓고 레드카펫 깔아 놓을게. 수술계획카드 문구는 ‘최태수 선생, 연성대를 누르고 돌아오다!’ 어때?”
“그건 너무 거창하고요, 고기나 듬뿍 사 주십시오.”
“고기? 자식, 내가 또 박고기 아니냐. 꽃등심? 안심? 아니면 부채나 치맛살? 말만 해. 먹다가 배 터지면 남은 고기로 네 위장 꿰매게 해 줄게.”
다소 오버스러운 이야기였지만 박성민의 들뜬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비단 태수 때문만은 아니다.
박성민이 품고 있는 억하심정도 같이 풀어 달란 속뜻이 담겨 있다. 연성대학병원에서 밀려날 때의 서러움이 아직 남았던 모양이다.
태수는 미소 지으며 그저 장단을 맞춰 줄 뿐이다.
“마음껏 고기 얻어먹을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 정도면 됐어. 아주 겁나게 파이팅해라.”
“네!”
“오케이. 이상 통화 끝!”
호탕한 목소리와 동시에 통화가 끝났다.
박성민만의 깔끔한 통화법이다.
물론 김혁권이 한바탕 쏘아붙이며 또다시 설전이 벌어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짧은 통화였지만 조금은 차가웠던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일부러 이런 기회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고마운 사람들이다.
태수는 가슴이 따뜻함으로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태수는 하석준 과장과 오재욱과도 통화했다.
-이렇게 일부러 전화하지 않아도 돼. 수술 잘 끝내고 몸 성하게 복귀하면 그걸로 되는 거야.
-돌아오면 어떻게 수술했는지 같이 이야기 좀 하지. 이쪽은 걱정 말고.
하석준 과장과 오재욱의 따스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를 울리는 것 같았다.
외과 돌아가는 것도 순조로웠고, 다른 의과와의 의사소통도 더욱 원활해졌다는 소식도 함께 들었다.
태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거의 30분이 지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크게 기지개를 켜고 천천히 옥상 문으로 향했다.
옥상을 막 벗어난 직후였다.
띠리릭.
휴대폰 벨소리에 태수가 발신자를 확인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전화번호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의아한 태수는 고민하지 않고 통화를 연결했다.
“최태수입니다.”
“나야. 쉬는 중이라던데, 잠깐 시간 되나?”
들려온 목소리에 태수가 멈칫했다. 상대가 이추명 과장인 탓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의 전화에 조금 당황했으나 만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아니 만나고싶었다.
“어디로 찾아뵐까요?”
“내 방으로 와.”
“바로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태수는 그렇게 말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지금 자신을 찾는 이유가 뭘까?
솔직히 궁금했다. 그래서 여러 말 하지 않고 승낙했다.
가서 얼굴 보고 이야기해 보면 자신을 왜 불렀는지 알 터였다.
태수는 곧 이추명 과장의 방에 들어섰다.
인턴 때 들어와 보고 처음이다.
가구를 한 번 교체했는지 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태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찾으셨습니까?”
“그래. 일단 앉지.”
피차 어색한 자리다.
이추명 과장은 물론 태수도 그리 내키는 만남은 아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이추명 과장이 태수를 직시했다.
나이 탓인지 노련한 표정 관리에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게 알아채기 힘들었다.
잠시 후, 이추명 과장이 차분하게 운을 뗐다.
“수술 준비는 잘되어 가나?”
“모르는 부분이 많아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태수는 가볍게 첫마디를 받았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이추명 과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쉬운 수술은 아니지.”
“그러게 말입니다.”
“더 필요한 건 없고?”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태수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추명 과장은 그 몇 마디로 무언가 고심했던 부분에 더욱 확신을 가진 모양이었다.
살짝 눈빛이 변하는가 싶더니 본론을 꺼냈다.
“제임스 박사님이 한국 의료계 실정은 잘 모르시지?”
“아무래도 한국에 오래 계신 경험이 없으시니 그러실 겁니다.”
태수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이추명 과장이 눈을 빛냈다.
“자넨 어떤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국 의료계 사정은 알지?”
“어느 정도는요.”
태수가 떨떠름하게 말하자 이추명 과장이 기회를 잡았단 듯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연성대학병원은 한국에서 알아주는 종합병원이야. 그런데 아무리 제임스 박사님이라 해도 전문의를 마다하고 레지던트를 어시스던트로 한다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
태수가 침묵했다.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하기 애매한 상황이다.
태수의 반응에 이추명 과장은 노련한 화술로 유혹의 손길을 던졌다.
“외과 수술 영상 보고 싶지 않나? 필요하다면 비슷한 수술에 관한 영상들을 보여 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들어 보니 연성대학병원에서 그동안 축적해 온 수술 영상들에 대한 언급이다.
이런 영상은 절대 외부로 유출시키지 않는다.
일정 수준 이상의 수술 영상들은 전문의들도 과장의 허락을 받아야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수위에 드는 병원인 만큼 수술 영상들의 양이나 질을 논할 필요가 없었다.
임상 경험이 무엇보다 필요한 태수 입장에선 당연히 혹할 일이다.
“저야 감사한 일이죠. 그리해 주신다면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물론 그렇겠지. 그건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자고. 그런데 말이야…….”
이추명 과장이 말꼬리를 흐렸다.
태수는 이미 직감했다.
자신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이추명 과장의 호의?
뭔가 어두운 거래의 느낌이 든다.
“말씀하십시오.”
“필요한 수술 영상들을 확인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태수가 슬쩍 장단을 맞춰 주자 이추명 과장은 덤덤하게 뒷말을 이어 갔다.
“그럼 편안하게 영상실 가서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보는 건 어떨까.”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까 말했듯이 우리 병원에서 진행하는 수술인데, 우리 전문의들이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다면 남들 보기에 썩 좋지 않을 거 같아서 말이야.”
“…….”
태수가 침묵하고 있었지만 이추명 과장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최 선생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만약 이 사실이 소문나면 아무래도 건방지단 소리밖에 더 듣겠어?”
“제가 결정할 사안은 아닌 거 같습니다만.”
“좀 섭섭하군. 난 최 선생이 이쯤에서 뒤로 빠지는 게 나중에라도 서로 웃으며 얼굴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이추명 과장의 흑심이 드디어 드러났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러나 그 예상이 그대로 적중하자 태수도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태수는 화부터 내지 않고 침착하게 응대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태수의 말에 이추명 과장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싫다는 거군.”
“만약 제임스 박사님이 수술실에 들어오지 말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수술에 참여하겠습니다.”
“자신 있나?”
이추명 과장의 얼굴이 매섭게 변했으나 태수는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