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54
00357 357화
“저도 제가 부족하다는 걸 인정합니다.”
“그러면 스스로 물러나는 법도 알아야지.”
“하지만 제임스 박사님이 직접 절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번 수술에서 제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침묵하는 이추명 과장의 표정에 불쾌함이 노골적으로 비췄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수는 할 말을 끝까지 내뱉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제임스 박사님에게 직접 하시는 게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태수의 말이 끝났다.
그사이 이추명 과장은 입술을 들썩였다.
제임스를 거론한 태수의 마음을 읽었던 탓이다.
아니꼬우면 직접 말해라.
태수의 대답이다.
이추명 과장의 입이 꿈틀거리며 금방이라도 무슨 말을 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태수의 말은 논리 정연했다.
그렇다고 제임스에게 말하는 건?
불가능하다.
태수가 오기 전에 이미 무수히 설득했으나 제임스 박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후 싸늘한 침묵만이 오갔다.
잠시후 이추명 과장의 방에서 나온 태수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후우.”
참고 있던 짜증을 그렇게 흘려버렸다. 이추명 과장은 이번 제임스의 수술에 연성대학병원 의사가 함께 하길 원했다.
아니, 연성대학병원 측의 방침이리라.
그게 아니라면 이추명 과장이 저리 나올 리 없었다. 물론 태수가 거기에 장단을 맞춰 줄 이유도 없었다.
한국 의료계는 좁다.
좁아도 너무 좁다.
이번 수술이 끝나면 언제 어디에서 얼굴을 마주칠지 모른다.
그땐 그리 달가운 만남이 아닐 건 분명했다.
아니 이추명 과장이 태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흘릴지 안봐도 알 거 같았다. 결코 좋은 소리를 하진 않으리라.
그래도 태수는 웃었다.
“속은 시원하네.”
말처럼 가슴이 청량했다.
레지던트 지원때 이추명 과장으로 인해 당했던 설움이 한순간 씻겨내려가는 기분이다.
이거면 충분하다.
한방 멋지게 날린 느낌이 좋다.
이로 인해 닥칠 내일 일은 내일에게 물어볼 생각이다.
마음을 정리하니 짜증도 많이 가시는 것 같았다.
수술 성공에 대한 열망만이 남았다.
벌컥!
소회의장 문을 힘차게 열어젖힌 태수가 크게 소리쳤다.
“파이팅입니다!”
“그래. 이유는 모르지만 싸우자고.”
평소 장난기 가득한 조나단이 반사적으로 권투 준비 자세를 잡았다.
어설픈 모습이지만 본 건 있는 모양이다.
그때 브레드 김이 조나단을 나무랐다.
“그게 아니라 열심히 해 보자는 한국식 인사입니다. 주먹 좀 내리세요.”
“왜 하필이면 파이팅이야.”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혹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전혀 없었습니다. 자, 그럼 뭐부터 다시 시작할까요?”
어느새 자리에 앉은 태수는 환자에 대한 각종 인쇄물을 손에 쥐며 열정을 보였다.
브레드 김과 조나단은 조금 황당한 시선을 곧 거두고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이식할 신장 상태가 수술 성공의 최대 관건이라는 결론을 내렸어.”
“우선 왼쪽 신장부터…….”
브레드 김과 조나단이 차례로 이야기했다.
태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오전 내내 생각했던 부분을 물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먼저…….”
“그래, 그렇게 진행해야지. 그리고 이쪽은…….”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의견을 나누는 토의였다.
태수가 열정을 보이는 만큼 토의는 더욱 심도 깊은 주제로 이어져 갔다.
그 토의에 참여하지 않은 제임스는 태수를 가만히 바라봤다.
뭔가 일이 있었다.
그건 확실히 느껴졌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는 감이 집히지 않았다.
태수에게 일어난 일이 뭔지는 모르지만 상황은 오히려 좋아졌다.
‘뭔가 자극을 받은 모양인데.’
그게 신선한 자극인지, 우중충한 자극인지는 관심 없었다.
태수가 열의를 불태울수록 수술 성공 확률은 올라간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환자의 이상을 감지하고 수습하는 것만큼은 태수가 꼭 필요했다.
카슈미르에서 갈고닦은 야전 의사의 모습이 필요하단 의미였다.
늦은 시간.
그때까지 소회의장은 불이 켜진 채였다.
환자 상태가 변함으로써 바뀌어야 하는 부분과 위험부담을 최소로 할 수 있는 방법이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제임스는 상당히 만족한 얼굴로 태수와 NGO 의료진에게 말했다.
“이제 모두 정리하고 좀 쉬도록 하지. 이후에는 가급적이면 환자 상태는 그만 확인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까지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 최대한 휴식을 취하도록.”
“수고하셨습니다!”
소회의장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모두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이제 좀 쉬나?”
조나단이 기지개를 켜며 굳은 몸을 크게 움직여 스트레칭했다. 중간중간 맨손체조를 했지만 그래도 몸이 많이 굳어졌던 모양이다.
태수와 브레드 김, 그리고 간호사들도 마찬가지다.
장시간 이어진 회의에 각자 굳어진 몸을 이완시키기에 바빴다.
그때였다.
띠리릭.
아직 해후를 나누지 못한 인턴 동기의 전화다.
여기서 통화하는 건 예의가 아니기에 태수는 곧장 소회의장을 나섰다.
복도로 나온 태수가 입을 열었다.
“재환아, 오랜만이야.”
“태수야, 이게 얼마만의 통화야.”
“그러게 말이야.”
“아직 병원이야?”
“어. 이제 회의 끝나서 여기서 쉬려고.”
“어떻게 같은 병원에 있으면서 얼굴도 못 봐. 내 신세도 참.”
박재환의 안타까운 목소리에 태수는 잠시 생각했다. 잠깐 대화할 시간은 충분했다.
“네가 못 오면 내가 가면 되지. 거기 응급실이랬지?”
“괜찮겠어?”
“지금부터는 별다른 일정 없어서 괜찮아.”
태수가 수더분하게 대답하자 박재환의 목소리가 더욱 기어들어갔다.
“너도 알다시피 응급실이 다 그렇잖아. 내가 지금 꼼짝도 못하는 상황이라서 그래. 미안하다.”
“됐어. 얼굴 보고 이야기해.”
통화를 마친 태수는 그길로 응급실로 향했다.
박재환이 왜 불렀는지는 잘 안다.
동기?
물론 그것도 이유가 되지만 현재 태수 위치다.
제임스와 막역한 사이란 사실이 가장 큰 이유였다.
혹시 모를 내일?
박재환도 그걸 의식해 얼굴도장이라도 찍을 요량이다.
그나마 용기를 낸 결과였다.
현재 태수와 친하다는 건 연성대학병원에 다니는 사람들에겐 부담이다.
‘머리 아프겠네.’
태수는 그저 웃으며 걸었다.
그는 본관과 연결된 응급실 뒷문으로 들어섰다.
대부분 소등된 한적한 복도와 달리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다.
그리고 여기저기 환자들도 보였다.
“으으, 약 준다더니 언제 주는 거야.”
“아, 속이 왜 이렇게 쓰려.”
환자와 보호자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응급실은 태수가 인턴이었던 그 시절처럼 북적였다.
연성대학병원 응급실의 평소 모습이다.
태수도 인턴 때 응급의학과에서 수련을 받으며 숱하게 경험했던 일이다.
“김 선생은 저쪽으로 가. 저기는 왜 아무도 안 가? 빨리 가서 환자부터 확인해!”
간호사실 앞에 뚝심 있게 서서 레지던트들을 조율하는 의사가 있었다.
약간 통통한 얼굴과 다르게 피로에 절어 눈이 퀭했다.
그의 오더에 레지던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태수의 머릿속으로 그와의 첫 만남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인턴 때 안과에서 처음 인사한 사이다. 그 전까지는 서로 얼굴만 알고 간간이 눈인사만 하는 정도였다.
안과에서 같이 수련하며 의외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은근히 성격이 맞았기에 그 후에는 몇몇 의과를 같이 전전하기도 했었다.
‘자식.’
태수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재환아?”
“누구…… 세…….”
“나야.”
태수가 대답하자 박재환은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다 눈빛을 반짝였다.
“왔어?”
“진짜 오랜만이다.”
태수는 부드럽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요새 들어 완전히 병원을 뒤집어엎은 인물 등장이네.”
“네가 더 엎던데?”
“나야 4년 차라고 여기 서서 잔소리만 늘어놓는 거지.”
“네가 치프야?”
태수가 묻자 박재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 우리 치프 비번이라 내가 당직 서는 중이야.”
“치프가 누군데?”
“넌 모르는 친구야. 레지던트부터 연성대학병원에서 수련한 녀석이거든.”
“그렇구나.”
태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재환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너야 들려오는 소문이 있으니 물어볼 것도 없는 거 같은데. 엄청 잘 지낸 것 같고 말이야.”
“지금 생각하면 끔찍해.”
“그래도 우리는 꿈도 꾸지 못할 제임스 박사님과 인연이 됐잖아. 그거 하나만으로도 잘 지낸 거라고.”
박재환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풀어 가자 태수도 미소를 지었다.
“그렇긴 해.”
“하하. 자식, 그 넉살 여전하네. 그보다 진짜 반갑다.”
박재환은 태수를 향해 더욱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태수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나랑 있으면 찍히는 거 아냐?”
“찍히면 나 모른 척 할거야?”
박재환의 농담.
전부가 농담은 아니다.
어느 정도는 마음이 들어간 말이다.
연성대학병원에서 잘못되면 부탁한다.
그런 의미도 담겨있음을 태수가 잘 알았다.
“야, 레지던트 4년차가 아는 척 한다고 뾰족한 수 있냐?”
“넌 있잖아. 높은 데 있을 때 잘 봐줘라.”
박재환이 미소를 머금으며 말하자 태수가 피식 웃었다.
“같이 개업하자고?”
“그것도 방법이고.”
박재환이 우물쭈물 거리며 대답할 뿐이다.
대화는 거기서 끝이다.
응급실은 언제나 부산하다.
언제 어떤 환자가 들어올지 어느 누구도 모른다.
그렇기에 오늘 레지던트들을 이끌어야 하는 박재환은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의 재회에도 할 수 있는 건 간호사실 옆에 간이의자를 놓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정도다.
박재환이 태수에게 미안해했다.
“진짜 내가 생각해도 이런 데서 손님 대접하는 거 참 가관이다.”
“같은 처지라 이해해.”
“그래도 요기 앞에 벤치라도 나가서 편안하게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게 뭐야?”
“난 이런 게 더 좋아.”
태수가 종이컵을 슬쩍 들어 올리며 찡긋거렸다.
태수는 진심이었지만 박재환은 여전히 미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진짜 일을 맡길 만한 놈이 없어.”
“응급실 레지던트에게 편하게 대접받는 게 더 이상해.”
“그런가?”
“물론.”
태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재환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말해 주니까 좋긴 하다. 그보다 애들 만났다는 소식만 들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박재환은 다른 동기들과 궁금한 점이 같았다.
이미 몇 번이나 한 이야기지만 대화 상대가 달라졌으니 또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조금 귀찮은 일이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본 동기였기에 태수는 차분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태수의 이야기가 한창 이어질 때였다.
벌컥!
응급실 문이 부서질 듯 열리더니 구급대원이 스트레쳐카를 밀고 들어오며 소리쳤다.
“여기요! 응급입니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박재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태수야, 미안.”
양해를 구함과 동시에 박재환은 환자를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에 태수도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뛰어가진 않았다.
여긴 엄연히 연성대학병원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란 의미였다. 더구나 무턱대고 나설 만큼 태수는 앞뒤 분간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거의 습관적으로 저 앞에서 구급대원의 손에 실려 가는 환자에게 시선이 자연스럽게 향했다.
태수의 귀에 박재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만취자입니다. 발을 헛디뎌서 계단에서 구른 모양입니다.”
“좌우간 술이 웬수죠. 환자분! 제 말 들리세요?”
박재환이 몇 번 불렀지만 환자는 대답이 없는 것 같았다.
환자를 촉진하다 보니 머리에서 피가 묻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