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77
00380 380화
미국 의사 면허증을 취득해 놓으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선택의 폭이 굉장히 넓어진다.
이력 사항에 가장 빵빵한 한 줄을 적어 넣을 수도 있다.
물론 태수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제임스의 보증으로 세계적인 병원 수술실에서 한 차례 어시스던트할 기회를 얻었다.
솔직히 외과 의사로서 일은 거기서 끝이고, 나머지 기간에는 연수 과정에 들어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일이 참 오묘하게 돌아가니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좋은 기회다.
놓치기 싫었다.
탁.
탁자에 손을 올린 태수의 얼굴에 승부욕이 활활 타올랐다. 태수는 바로 자리를 잡고 앉아 책과 프린트물을 살폈다.
그때까지 조용히 생각하고 있던 박성민이 태수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마지막 시험만 통과하면 나도 미국에서 정식으로 의사가 된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래. 죽자. 한번 제대로 죽어 보자.”
박성민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도 옆자리에 바짝 앉았다.
그러나 막상 내용을 보니 머리가 팽팽 돌 것 같았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기회가 왔다면 머리가 깨지더라도 해야 한다.
이것이 두 사람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한 가지 생각이다.
두 사람은 그때부터 죽어라 공부했다.
해야 할 공부는 많고 시간은 없다.
오죽하면 빵을 한 아름 사와 씹어 먹으며 식사를 대신할 정도였다.
그래도 두 사람은 행복했다.
이런 시간을 준비해 준 제임스에 대한 고마움으로 더더욱 열정적으로 공부했다.
하루, 그리고 이틀.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갔다.
공부를 시작한 지 5일째에 접어들 무렵이다.
두꺼운 종이 뭉치를 두 번 정독하고 세 번째 정독하는 중이다.
USMLE의 STEP 3는 다른 의사의 감독 없이 의학 지식을 통해 진료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이다.
태수는 수많은 임상 경험이 있고, 박성민은 전문의다.
충분히 어지간한 진료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USMLE의 STEP 3시험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하루에 8시간씩 총 이틀 동안 주어진 과제까지 완료해야 한다.
첫날은 336개 문제를, 두 번째 날에는 144개의 문제를 평가받아야 한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8개의 임상증례모사 테스트가 있다.
실제 임상증례를 그대로 적용한 컴퓨터 프로그램에 약물 투여나 검사를 입력해 가상의 환자를 치료하는 테스트다.
어떤 케이스가 테스트에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가장 보편적인 증상들에 대해서 모조리 공부해야 했다.
게다가 남들이 1년에 걸쳐 공부하는 걸 1주일 만에 모두 해내야 한다. 그 과정이 쉬울 리 없다.
태수가 가장 중점적으로 파고든 게 바로 임상증례모사였다.
짧은 시간 다양한 케이스를 접할 수 있기에 흥미를 느끼고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반대쪽에 앉아 있던 박성민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피…… 피다. 내, 내 코에서 성혈이 흐르고 있어.”
“세수하고 오십시오.”
태수의 덤덤한 말에 박성민이 울컥했다.
“인마, 선배님의 성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씻고 오라고?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말할 수가 있어?”
“시간 갑니다.”
“시간이……. 젠장. 휴지, 휴지 어디 있어?”
박성민이 수선을 떨어도 태수는 요지부동이었다.
“옆에요.”
“고개 들고 있어서 안 보여, 인마.”
“의사가 그러시면 됩니까. 그러다가 기도로 들어가면 골치 아픈 거 모르세요?”
“아, 맞다. 그런데 진짜 저 새끼가. 야!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고마운 말을 할 수가 있냐? 너무하는 거 아니야?”
“시간.”
태수가 또 한 번 강조해서 말하자 움찔한 박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네가 이렇게 나온다면 좋다, 이거야. 해보자. 나 혼자 딱 붙어서 네 코를 뭉개 줄 테니까.”
“파이팅입니다.”
“그렇지. 아자! 잘해 보자. 파이팅! 그런데 이게 아닌 거 같은데.”
박성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다시 공부에 집중했다.
잠깐 수선을 떨었지만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 그런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느새 기숙사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렇게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마침내 이틀간의 시험을 마치고 나온 태수와 박성민의 얼굴은 완전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박성민의 코에는 아직도 휴지 뭉치가 달려 있을 정도였다.
그런 태수와 박성민이 시험장에서 걸어 나올 때였다.
일주일 동안 그림자도 보지 못한 제임스가 떡하니 서 있었다.
제임스 앞에 다가온 태수와 박성민은 동시에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이 고개를 든 순간 제임스가 물었다.
“둘 다 만족할 만한 결과가 있었나?”
그 질문에 두 사람의 희비가 교차됐다.
득의만면한 태수의 눈빛.
반면에 박성민은 허탈함이 가득했다.
그 반응만으로 두 사람의 당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임스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수고했어. 일단 가지. 고생한 만큼 맛있는 걸로 영양 보충을 해야 하지 않겠나?”
“저는…….”
박성민이 우물쭈물했지만 제임스는 개의치 않았다.
“자네 코를 막고 있는 휴지만으로도 충분히 밥 먹을 자격이 있어. 가지.”
제임스는 더 지체하지 않고 태수와 박성민을 이끌었다.
대학생들이 이용하는 푸짐하고 저렴한 스테이크 집에서 식사를 마친 후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스테이크를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박성민의 표정이 여전히 복잡했다.
태수와 제임스는 그런 박성민을 잠자코 기다려 줬다.
기숙사에 얼추 도착했을 무렵이다.
박성민이 독기 서린 얼굴로 제임스에게 말했다.
“1년. 딱 1년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음 시험은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기대하지.”
“그럼 전 내일 비행기로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박성민의 눈빛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제임스는 그런 박성민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렇게 해.”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얼굴 뵙는 것도 쪽팔려서요. 죄송합니다.”
끄덕.
제임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박성민은 깊숙하게 고개를 숙인 후 먼저 기숙사로 향했다.
평소 장난스럽던 표정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 시험에서 떨어진 사실이 그에게 커다란 자극이 된 모양이었다.
박성민이 떠나간 후 태수와 제임스만이 남았다.
“잠깐 앉을까?”
제임스의 제안에 두 사람은 벤치에 자리했다.
제임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환자의 용종은 전이된 암으로 밝혀져서 항암 치료를 좀 더 강하게 진행한다고 하더군.”
“완치는 가능하답니까?”
“현재까지 경과로 보면 아마도.”
“다행입니다.”
태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순수한 그 미소에 제임스도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임스는 잠시 생각하다 다음 질문을 이어 갔다.
“혹시 한국 소식 들었나?”
“솔직히 정신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언론에서 계속 자네 행적을 뒤쫓고 있는 모양이야. 연성, 그리고 카슈미르는 물론 네팔까지 갔다더군. 한국 기자들도 상당히 집요한 구석이 있어.”
제임스의 말에 태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졸지에 유명 인사가 된 기분입니다.”
“그건 나중에 확인해 보면 알게 될 거고, 조용해지려면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할 거 같아.”
“상황이 그렇다면 미국에 더 있어야 할 거 같습니다.”
태수가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자 제임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난 계속 곁에 있을 수 없어.”
“어디 가십니까?”
“기부 수술이 많아. 이번에 의약품을 잔뜩 챙겨서 한 아름 들고 돌아가야지.”
“그럼 같이 가겠습니다.”
태수가 바로 말했지만 제임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안 돼.”
“왜 안 됩니까?”
“언제까지 이 늙은이 뒤꽁무니를 쫓아다닐 건가. 내가 혹 달고 다니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 말이야.”
제임스의 냉정한 말을 듣자마자 태수가 반박했다.
“쫓아다니는 게 아니라…….”
“자네는 아직 배우고 익혀야 할 게 수두룩한 사람이야. 아니면 의술에 대해 조금 알 거 같다고 자만하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더 배우고 익혀. 내 주변에는 자기만의 의술 세계가 확고한 의사들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제임스의 목소리가 태수를 따갑게 찔렀다.
응급에 강하다.
그게 태수만의 장점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이번에 이식수술과 암수술을 경험하며 부족함이 더욱 도드라졌다.
남들보다 이해하는 속도가 빠르단 장점이 있지만 제임스를 언제까지나 물고 늘어질 수도 없다.
이렇게 갑자기 헤어질 순간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태수는 몰랐지만 제임스는 여기까지 예상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미국 의사 면허를 취득하게 도와줬는지도 모른다.
태수는 새삼 제임스의 혜안에 한 번 더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런 상황에 더는 발목을 잡을 순 없다.
태수는 잠시 생각하고는 곧 결정을 내렸다.
“그럼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리고 다음에는 제가 제임스를 찾아가겠습니다. 절대 내치지 못할 때 말입니다.”
태수의 강단 어린 각오가 제임스를 기쁘게 했다.
“그때가 언제 올진 몰라도 내가 독한 위스키 한 병은 준비해 놓도록 하지.”
“여기까지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저 때문에 고생하신 거 같아 죄송합니다.”
“그걸 알고 있다면 다시 만났을 때는 내가 자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해 봐.”
“당연한 거 아닙니까.”
태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제임스는 그런 태수의 모습조차도 젊음이 주는 호기로움으로 받아들이며 기분 좋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척.
악수를 청한 제임스가 태수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기분 좋게 헤어지도록 하지.”
“어디에 계시든지, 누구와 계시든지 꼭 건강하십시오.”
“자네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무사할 거야.”
“약속하신 겁니다.”
끄덕.
제임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순간이다.
태수는 제임스의 손을 옆으로 밀어내고 그대로 안겨 들었다.
제임스는 품에 안겨 든 태수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 순간 태수의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제임스와의 헤어짐이다.
태수는 제임스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지켜봤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은 후에야 기숙사로 돌아왔다.
끼익.
미국 의사 면허증을 취득한 정말 기분 좋은 날인데 방으로 들어오는 태수의 표정이 영 힘이 없었다.
무심한 얼굴로 방 안을 바라보던 태수가 멈칫했다.
박성민이 이미 짐을 모두 싸 놓았기 때문이다. 침대에 걸터앉은 박성민의 표정은 태수보다 더 무거웠다.
태수는 얼른 박성민에게 다가갔다.
“선배님, 진짜 돌아가실 겁니까?”
“그래.”
“연수 프로그램이라도 참가하시면 좀 더…….”
태수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박성민이 끼어들었다.
“태수야, 내가 진짜 너라서 이야기하는데 씨발, 겁나게 쪽팔린다.”
“선배님, 그렇게 생각하실 게 아니라…….”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네가 진짜 내가 존중하는 후배만 아니었으면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어 버렸을지도 몰라.”
박성민의 자괴감이 생각보다 심한 것 같았다.
태수도 이런 박성민은 처음이라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난감했다.
“선배님.”
“그래. 말이 나왔으니까. 태수야, 내가 네 선배 맞지?”
“그럼요.”
“그럼 이 선배가 후배한테 쪽팔리는 게 보기 좋냐?”
박성민의 직설적인 물음에 태수가 멈칫했다.
“그게…….”
“쪽팔려서 어깨 축 늘어뜨리고 콧물 질질 흘리면서 헤헤거리는 게 좋냐고.”
“그건 싫습니다.”
태수가 얼른 고개를 젓자 박성민이 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니까 나 말리지 마라. 그리고 이런 쪽팔리는 모습은 오늘만 보여 주는 거니까 내일 되면 싹 잊어버리고.”
“알겠습니다.”
“그럼 자자. 그냥 아무 소리 말고, 얼굴도 더 보지 말고 자자. 오늘은 그냥 그렇게 하자.”
박성민은 그 말을 마치고는 그대로 침대로 쓰러졌다. 눈을 감는 척했지만 잠을 자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박성민이 느끼고 있을 자괴감이 생각보다 심한 모양이었다.
태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끄고 침대로 향했다.
오늘은 제임스와 헤어진 날이자 박성민과도 미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알게 모르게 만감이 교차했다.
미국 의사 면허증을 취득한 기쁜 날이지만 태수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아침이 밝았다.
뒤척이다 느지막이 잠든 태수는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땡땡땡.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태수의 귀를 자극했다.
“으음.”
태수가 뒤치락거리는 순간 박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허, 이렇게 널브러져 자는 모습이 아름다운 녀석아, 얼른 일어나지 못해? 해가 밝아서 햇살이 따사로운 이때에 웬 늦잠이야?”
그 소리에 태수의 귀가 꿈틀거렸다.
평소와 같은 박성민의 넉살 좋은 목소리 때문이다.
번쩍.
태수가 얼른 눈을 떠 바라보자 박성민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